문학계의 거성 이청준 소설가가 타계했다.
〈서편제〉는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사람들』 5편 중, 일부만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그리고 배후에 많은 일화를 간직한 영화이다. 영화배우 오정혜를 발굴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고 업신여기던 우리의 소리에 가치를 부여할 계기가 된 영화이다. 또한 제작자 이태원과 임권택 감독에게는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임권택 감독은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소리와 춤을 접하고 가슴 깊은 곳을 정통으로 맞은 듯 얼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고 술회했다.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판소리는 그의 안에서 뿌리내려 ‘서편제’가 되고 ‘춘향뎐’이 되었던 것이다.
서편제는 고졸(古拙)하고 소박한 동편제의 전통적 창법에서 탈피해 가공과 수식으로 소리를 만드는 후천적 기법의 소리로 광주, 나주, 보성 등 주로 섬진강 서쪽 지방에서 불린다.
돌을 갓 넘긴 사내아이가 뙤약볕이 내리쬐는 콩밭 머리에서 탯줄을 길게 늘어뜨린 듯 광목 끈에 묶여 흙을 파먹고 있다. 김을 매고 있는 젊디젊은 어미는 마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홀려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머리 위의 해는 이글거리고 흙투성이가 된 어린아이는 이미 고달프고 한 많은 인생살이에 한발을 빠뜨리고 있다.
잔칫집에서 구성진 가락을 뽑아 올리던 소리꾼 사내는 달빛이 교교한 밤, 청상과부의 방에 달빛 타고 스며들어 돌배기 아들 앞에서 뜨거운 몸뚱이를 섞고 만다. 여인과는 길지 않은 인연인가 아이를 낳다가 여인은 죽고 어린 남매 둘을 데리고 사내는 불타는 단풍잎을 즈려밟으며 소리 여행을 시작한다.
사내는 소리가 시원찮은 아들에게는 북채를 잡히고 어린 딸에게는 소리를 가르치려 무던히도 애쓴다.
“서편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하는데 네 소리는 예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밀고, 달고, 맺고, 푸는 북장단의 추임새로 길을 안내하듯 소리를 이끌려면 장판지가 절듯이 몸뚱이 속에 북가락이 절어야 한다.” 사내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리를 구현하고자 남매를 혹독하게 휘몰아친다.
이미 장거리에서는 약장사와 서커스단이 아코디언과 트럼펫 소리로 구경꾼들을 몰아가고 소외된 소리꾼 사내와 남매는 연명하기조차 힘들어진다.
“소리꾼 목구멍이 갈보년 밑구멍보다도 못한 세상!” 사내는 절망하여 술에 절어 남매를 더욱더 학대한다. 아비의 술주정에 지친 아들은 ‘소리하면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이놈의 광대 노릇 때려치우면 그만 아냐’고 사내의 매를 피해 가족 곁을 떠난다. 둘만 남은 부녀는 다 허물어져 가는 폐가 한 귀퉁이에 기거하며 악착같이 소리에 매진한다. 그러나 오라비를 떠나보낸 딸이 시름에 빠져 소리를 놓자 사내는 한약을 달여 먹이고, 한약재 부자(附子)를 많이 먹으면 눈이 멀게 되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자, 비정한 아비가 되고 만다.
보약인 줄 알고 먹은 약기운이 번져 점점 시야가 흐려오자 딸은 체념한 듯 읊조린다. “전 이제, 하늘도 달도 별도 노을도 못 보게 되나요?” 핏빛 노을을 등지고 언덕에 서 있는 소녀의 처연한 모습 위로 유장하고 창연한 진양조 가락이 휘감아 돌고 있다.
죽은 눈빛이 목청으로 살아났던지 딸아이의 소리는 윤택해지고 이제 목이 트인 듯하다. 구불구불한 초가지붕을 끼고 터져 나온 심청가 가락이 애처롭게 매달린 선홍빛 감 가지에 피를 쏟듯 매달린다.
“통성을 쓰지 말고 코를 울려 가성을 써라. 상성을 지를 때는 창이라도 찌를 듯 힘차게 내질러라, 아님 넋두리, 흥타령이 된다.”
한 젊은 사내가 고을마다 돌며 소리하는 여인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비로소 소리재 주막에 와서야 애타게 찾던 누이를 발견한 것 같았다. 사내가 떠날 때, 아버지가 지긋지긋하지 않나 물었었다. 누이의 ‘난 소리가 좋아, 소리를 하면 만사 다 잊을 수 있거든’ 그 말을 회상하며 사내는 북채를 잡고 장님 여인과 마주 앉았다.
여인의 소리에는 점점 더 힘이 태이고 이마와 콧잔등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리고……” 여인의 머릿속으로 피울음 같은 세월이 스쳐 지나간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백설이 휘날리며 구성진 가락은 세월을 잘도 떠밀고 지나갔다.
남매는 서로에 대해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라비가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제 소리가 저 사람의 북장단을 만났을 때, 진즉 알아봤지요.” 하고 실토한다.
장님 여인을 10년이나 품어줬던 주막 사내는 여인을 보내며 피 같은 절규를 뿜어낸다.
“한이라는 건, 누구한테 받아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녀, 긴긴 세월, 먼지처럼 쌓이는 것이라네…….”
--- 「한(恨)의 소리, 서편제」 중에서

이 다큐멘터리를 보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오랫동안 영화를 보면서 계속 가져온 생각인데 아무리 잘 만들어진 영화일지라도 원작(시나리오)과의 관계가 왠지 석연치 않아 시나리오의 행간을 샅샅이 읽고 싶은 답답함이 많았다. 말하자면 억지로 틀 속에 잡아넣은 듯한, 정형화된 화면을 쫘악 찢어내고 그 안에 갇혀있는 미처 표출되지 못한 진실을 틀 밖으로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숨 막히도록 답답한 내 영혼을 자유롭게 해방해준 작품이 바로 다큐멘터리 〈여성의 운명(Women's History Trilogy)〉(감독, 시나리오, 김소영)이다. 김소영 감독은 한국종합예술아카데미 1회 졸업생으로서 현재 한국영상예술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거류〉는 2001년 ‘서울여성영화제’와 ‘야나가타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출품작이다.
김소영 감독은 거류(居留- 남의 나라 영토에 머물러 삶, 去留-떠나감과 머물러 있음, 죽음과 삶)라는 제목을 통해 펼쳐질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김감독은 어릴 적, 할머니와 마실 가는 것을 즐겼다. 아랫목이 절절 끓는 방에서 노래도 곧잘 부르고 동치미 국물을 얻어 마신 후, 할머니 무릎에 누워 이웃 할머니들의 이해되지 않는 한스런 얘기를 가만히 듣곤 했다.
어떤 감정도 이입되지 않은 정갈한 목소리로 감독은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내가 열 살 때 즈음
한밤중이거나 혹은 새벽이거나
잠에서 깨면
할머니는 치마에 얼굴을 묻고 울고 계셨다.

할머니
일기를 써
난 10원짜리 공책을 내밀고

할머닌
연필에 침을 묻혀
종이에 몇 글자를 꼭꼭 새긴다.

함안 이씨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고성으로 시집온 김감독의 할머니는 남편과 일찍이 생이별을 했다. 남로당이었던 남편은 월북해, 온 집안을 연좌제에 묶어놓았다. 그런 남편을 평생토록 원망하며 살았다.
남편의 죽음을 애달파하는 친구에게 “그래도 넌 찾아갈 무덤이라도 있지!” 사무치듯 부러워했다. 돌아가시기 1년 전, 고향에 왔을 때 “성님, 고성 와도 우리 문디는 없네요!”라던 절규를 회상하며 일흔이 넘은 아들은 가슴이 미어지며 눈시울을 붉힌다.

할머니는 김감독이 어릴 때부터, 이다음에 크면 기차를 타고 고성에 가자고 밥 먹듯이 말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손녀딸과 고향에 가보지 못한 채 김감독이 18세 되던 해에 폐암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그리고 10년 후, 김감독은 할머니의 넋이 불러 귀향했다는 부친의 말처럼 할머니가 애타게 그렸던 고성 땅을 밟게 된다. 작가는 고성 땅을 밟아보고 비로소 고성에는 기차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막연히 그려보던 고향행 안내자로 18세기 중기에 만들어진 영남지도 고성현 편을 펼쳐놓고 있다. 함안, 고성, 창원, 진해가 장기판처럼 표시된 길을, 작가의 카메라는 집요하게 따라간다.

전국에서도 드물게 풍광이 수려한 자란만에 도달하여 작가는 열락으로 몸을 떤다. 쪽빛 하늘에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바람에 술렁이는 대숲, 끝없이 이어지는 돌담을 카메라는 신들린 듯이 달려가고 있다.
할머니는 언문에 능해 동네의 편지와 제문까지도 대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글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문어체로 남긴 어떤 글보다도 어머니의 이야기는 문학이요, 철학이요, 텍스트였다고 일흔이 넘은 민속학 석학은 눈물이 그렁해서 어머니를 회고한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이 툇마루에 앉아 오래 묵은 두루마리 제문을 읽고 있다.
“아들딸 구별 없이 애지중지 사랑하여 금옥같이 자라날 때……”
그 가락이 아리랑 가락처럼 슬프고도 애잔하다. 할머니 앞에서 흔들리는 선홍빛 접시꽃은 또 왜 이다지도 가슴 속을 후벼 파고드는지…….

장면마다 여백을 많이 주어 시각과 청각을 한 치 오차도 없이 조응시킨 감독의 예술 감각이 신기에 가깝다.
예로부터 남성들이 세상과 교신하던 봉수는 최초의 디지털 방식인 셈이다. 감독은 고성 자이산 392미터 정상에 놓인 봉수대에 올라 핏빛으로 물든 자란만을 바라본다.
나는 여태까지, 그렇게 가슴이 얼얼하도록 처절한 노을을 본 적이 없다. 하늘과 땅은 태고의 울음을 질펀하게 쏟아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감독은 핍박받던 옛 여성의 고난과 시름을 끌어내어 원풀이하듯 그곳에 풀어놓았으리라.
이지러진 문창살, 찢어진 창호지를 통해서 들어오는 빛줄기, 수백 쪼가리로 정교하게 이어붙인 조각 이불, 무심한 듯 곳곳에 놓여있는 토속적인 소재들은 감독의 고향사랑이 얼마만큼 곡진한지 물 흐르듯 보여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진해 흑백다방이 소재이다. 흑백다방은 60년대부터 창원, 마산, 진해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두 자매의 부친은 서양화가 유택렬 화백이고 어머니는 민예품과 골동품을 수집하는 분이었다.
오방색을 주로 사용한 강렬한 느낌의 부적 같은 그림과 목단 수, 선반 위의 등잔, 떡살, 고리짝, 엿장수 가위 등의 민속품 하나하나가 제 모습을 온전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피아노를 전공한 둘째 딸은 대처로 나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집안의 대소사와 맞물리게 되어 이제껏 그곳에 붙박여있다. 문밖에는 현대의 속도를 과시하듯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데 케케묵은 뮤직 박스에서 여전히 낡은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커피를 끓이는 골동품 같은 여인 경아.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어요. 새벽 4시에 눈 비비고 일어나는 내게, 커피를 진하게 타서 마시게 하곤 학교 가기 전까지 매일 3시간씩 피아노를 치게 하셨죠!”
퍽 어릴 때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는 그녀는 흑백다방의 붙박이처럼 굳어져 버린 자신의 운명은 이미 그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해묵은 골동품처럼 고졸(古拙)한 모습이 가슴을 무너뜨리고 있다. 마치 흑백다방의 일부인 양 고집스레 제 자리를 지키는 여인을, 감독은 애잔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러나 그곳에서 절망이나 단절을 읽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묵은 것, 느린 것, 무덤덤함이 이 시대에 꼭 있어야 할 덕목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래서 유경아가 지키고 있는 흑백다방은 단지 공간으로만 존재하고 있지 않다.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한국 고유의 전통을 지켜가려는 꿋꿋한 정신으로써 존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후남 선생의 『후남의 영화읽기』는 순전한 ‘영화읽기’이다. 요즘에 나오는 우후죽순의 영화 관련한 책들의 화려한 자료 도판이나 기교를 말끔하게 걷어버린, 무성영화 시절의 변사로서 혹은, 복화술사로서 독자들을 새로운 영화 세계로 인도한다. 그의 문장을 읽노라면, 시와 소설이 녹아 있고 풍성한 인간군상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뜻이지만, 소통 부재의 시대에 영화를 통한 단절과 소통을 통합적으로 살펴보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후남의 영화읽기』는 영화가 끝난 이후의 잔상을 되살려, 인간 삶의 과정을 되돌아보는 성찰과 영화가 가진 특유의 미학적인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것이다.<br/>- 김영탁(시인·『문학청춘』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