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무척 엄격하셨는데, 어린 내게 항상 ‘궁리(窮理)하라’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다. 어렸던 나는 그냥 ‘생각하라. 될 때까지 생각하라. 머리를 써라.’라는 의미로 대충 이해했다. 요즘은 궁리(窮理)라는 말을 잘 안 쓰지만, 그 말은 내가 커 가면서 어려울 때마다 많이 떠올 리며 깊이 생각하게 한 좌우명이 되었다.
그 궁리는 평생 나에게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곳, 가 보지 않을 길을 가 보는 호기심을 키워 주었고, 뒤집어서 또는 엉뚱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으며, 때론 공상 속에서 헤매게 해 주었다. 아버지가 어린 내게 자주 해 주신 말씀 ‘궁리(窮理)’는 자연스럽게 몸에 배 평생에 걸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p.28~29
돌이켜 보면 나의 23년여의 직업공무원 생활은 역마살이 낀 유랑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루어진 노마드(Nomad, 유목민·유랑자)의 공직 생활은 변화와 혁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1971년부터 1995년 민선 충주시장이 되기까지 23년여 동안 지역으로 보면 충북, 충남, 강원, 부산 등 4개 시도를 섭렵했고, 중앙부처로 보면 내무부, 사회정화위원회, 청와대, 국무총리실 등 4개 부처를 오갔던 것이니, 전국 직업공무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유랑 경력을 가 졌다고 자부할 만하다. 그 과정에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는 유랑 생활에서 귀중한 두 가지 큰 소득을 얻었다.
첫째는 무인도나 마찬가지인 객지에 가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 즉 서바이벌 게임에 상당한 훈련을 쌓았고, 둘째는 4개 부처와 4개 시도를 오가는 동안에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인맥을 형성하고 폭넓은 안목을 키웠다. 이러한 경험들이 그 후 민선 충주시장, 국회의원, 민선 도지사를 하는 데 많은 자산이자 교본이 되었으며, 또한 올곧고 깨끗한 자기관리 철학을 만드는 데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 p.37~38
9월 11일 저녁,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충주댐 방류가 초당 몇 톤 을 넘으면 충주시내 제방이 넘치는지, 넘치면 시내 어디까지 물에 잠기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자료도 없었다. 상급기관인 충북도, 중앙 부처, 청와대, 그 어디에서도 대답을 주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심지어 수자원공사조차도 충주댐 방류량을 얼마까지 늘려 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답답했다. 만약 이대로 뒀다가 한밤중에 시내 달천강 제방이 붕괴한다면 수천 명의 시민이 수장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외로운 고민 끝에 그날 밤 9시쯤 주민 대피령을 내렸다.
… 그날 밤 11시쯤이 되어서야 4개동 3~4천 명을 모두 대피시켰다. 그때 마침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비가 더 오겠구나 싶었는데 그 천둥소리가 끊이질 않고 몇 분 동안 계속 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다시 하늘을 보니 번개가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이건 천둥이 아니라 건너편 달천강 제방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탄금대를 돌아 시내로 들어왔는데, 들어오자마자 탄금대 쪽 제방이 굉음을 내며 터졌고 탄금대 일대가 순식간에 물에 잠겼다. 아찔했다. 1분만 늦게 나왔어도 물귀신이 됐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날 밤새도록 인명 피해 조사를 했는데, 모두가 대피하여 다행히도 한 사람의 인명 피해도 없었다.
--- p.46~48
세계 각국의 전통무예들을 충주세계무술축제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당시 외교통상부 반기문 차관(나중에 UN사무총장)을 찾아갔다. 당시 반기문 차관은 “세계무술축제가 바로 문화외교”라며 해외한국대사관과 주한외국대사관을 적극 연결해 주었고, 당시 외교부 문화외교국장이던 김경임 국장에게 특별 지시까지 내려 마침내 세계무술축제를 성황리에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제1회 충주세계무술축제는 2000년 9월 28일부터 10월 3일까지 전 세계 25개국 45개 무술단체 600여 명의 무예고수들이 대거 참석하여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무예를 주제로 한 세계축제가 지구촌에 처음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양반의 도시, 내륙 깊숙한 은둔의 도시 같은 충주에 갑자기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들, 특히 무예인들이 대거 머물다 보니 충주 시민들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대부분 시민은 호기심을 보였고, 특히 젊은 학생들은 영어로 소통하고 외국 선수들과 자원해 사진을 찍는 등 도시가 갑자기 국제도시화(?)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충주의 국제화·세계화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p.262
“진실이 최대의 무기다. 그리고 가장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다.”
늘 진실을 갖고 밀고 나가면 그것이 언젠가 최대의 무기가 되고 나중에는 가장 정치적일 수 있다. 화려한 정치적 언어 수사는 우선은 달콤하지만, 생명력이 짧고, 비정치적인 진실은 우선은 쓰지만, 생명력이 길다.
“쌀 한 톨 한 톨 주워 담는 심정으로 표를 구하라.”
영·호남이나 수도권과는 달리 충북은 바람이나 쏠림현상이 별로 통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쌀 한 톨 한 톨 주워 쌀 한 가마니를 채우는 심정으로 표를 하나씩 하나씩 구해 나갔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밤의 몇 백 표가 당락을 결정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선거운동 마지막 날 밤 12시까지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 p.3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