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기에 시조가 중요한 까닭이 있다.
첫째, 시조는 근·현대 우리 문화 속에서 살아남은 우리 전통시다. 우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우리 문학사에는 여러 문학 장르가 생겼다가 사라졌다. 예술 장르는 유기체처럼 생성, 성장, 난숙, 쇠멸의 과정을 비켜가기 어렵다. 시조는 이 유기체 생멸의 법칙을 이기고 용케도 살아남았다.
외국인들은 우리 문화 유산 가운데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 묻는다. 한글, 고려 금속 활자, 팔만대장경판, 이순신 전법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우리의 자랑거리다. 또 있다. 시조다. 통설에 따르면, 시조는 고려 말 우탁이 늙음을 한탄한 ‘탄로가’ 몇 수를 발표하면서 우리 문학사에 나왔다. 시조의 나이는 7백 세가 넘었다.
지금까지 시조가 살아남은 것은 1920년대 후반에 일어난 ‘시조 부흥 운동’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말살하려는 ‘조선혼’과 ‘조선심(朝鮮心)’을 일깨우려는 저항적 민족주의의 발로였다. 이 운동을 일으킨 최남선·이광수·이병기·이은상·주요한·양주동 등은 시조의 은인이다. 세계 노동자 계급의 투쟁 운동과 합세한 카프(KAPF)파에 맞선 민족 정체성(nation identity) 수호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카프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에스페란토 이니셜이다.
독립된 대한민국 시대에 민족혼의 수호니 계급주의 배격이니 하는 이념적 목적성과 시조는 관계가 없다. 또 시조가 본디 양반 사대부, 선비들의 문학이었기에 자유 민주 시대의 문학 장르로 부적합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시조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보편적 우리 문학 장르다.
둘째, 시조는 알맞게 짧다. 3장 6구 12음보에 45음절 전후로 이루어졌다. 5·7음절을 단위로 하는 일본 하이쿠(俳句)는 너무 짧고, 서구식 자유시는 길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시가 찰나주의자 신인류의 옷자락 이라도 잡아 잠시 머물게 하기에 시조의 길이는 적절하다. 하이쿠는 일본인 모두의 교양상의 미덕으로 보편화되어 있고, 촌철살인의 감수성 벼리기와 지혜 터득에 기여한다. 하지만 너무 짧다. 시조보다는 짧으나, 와카(和歌)는 시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셋째, 세계화되다시피 한 서구식 자유시의 도도한 문화 권력에 맞서며 세계 문단에 나설 우리의 유일한 문학 장르는 시조다.
자유시를 쓰는 우리 대학 교수의 한 체험담이 우리의 폐부를 찌른 바 있다. 외국 학술 세미나에 참석한 그 교수는 자유시에 대한 연구 내용을 발표했다. 그 자리에서 한 외국 교수가 물었다. “한국 고유의 시는 없습니까?” 이 질문에 한국 교수는 충격을 받았다. 요사이 자유시 작가들이 시조를 쓴다는 소식이 들린다. 평론가 구중서가 시조를 쓰고,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시절에 문효치 시인은 신작 시조집 『나도 바람꽃』(2017)을 내었다.
바람 속
파도 소리
못 말리는
몸살이다
누구를 사모하여
바다 끝에 기대 섰나
뒷산이
우루루 몰려와
물속에 뛰어든다
「우루루·수송나물」이다. 자유시 작가가 쓴 시조이기에 인용했다. 신춘문예 출신 권갑하 시조시인이 평설에서 극찬한 작품이다. 초·중장이 3·4음절 또는 4·4음절씩 구를 이루어 호흡이 순탄하다. 종장 첫 음보 3음절 고정형에 둘째 음보 5음절로 이어지며 완급률(緩急律)을 조성한다. 고시조(평시조) 기본 형태인 석 줄을 4개 연 아홉 줄로 배열했다. 이른바 ‘형식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려는 욕구의 표현이다. 초·중·종장이 각 15음절씩, 도합 45음절로 된 정격 시조의 변이형이다. 초장은 넉 줄에 2개 연으로 나누었고, 중장은 두 줄짜리 1개 연이다. 왜 그랬을까? 배열 형태에 변화를 주려는 의도다. 본질적인 이유도 있다. 호흡의 길이와 의미의 절박성, 충전도(充電度)와 관련되는 시적 기법이다.
(...중략...)
살포시 다루고 넘어가야 할 계제인데, 시조 형태 얘기가 방만해졌다. 일탈이다. 이런 일탈도 문학 얘기의 매력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시인 시조로 세계 문단에 나서자는 뜻이다.
넷째, 시조는 문학 현상론적 이점이 있다. 시조의 ‘소통 지연 장치’는 독자를 좌절시킬 만큼 까다롭지 않다. 시조에도 자유시에서처럼 비유와 상징의 기법이 쓰이나, 그 지연 장치가 과도하여 극난해 시조로 치닫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찰나주의적인 현대인들에게 난해 시조 읽기의 짐을 지우는 것은 무리다. 가붓한 비유와 상징이 시조의 격을 높이는 정도면 충분하다.
다섯째, 시조의 형태는 여느 정형시에 비하여 대단히 유연하다. 시조에는 다른 나라 정형시처럼 경직된 틀이 없다. 시조는 중국이나 영국의 정형시에 요구되는 두운·요운·각운 등의 운(韻)이나 엄격한 강약률이 없다. 시조에는 앞에서 본 바와 같은 초·중·종장의 박자가 같은 등장성(等長性), 각 음보별 음절 수 증감에 따른 호흡의 느림과 급박성, 곧 완급률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시조는 틀이 엄격한 외국 정형시(定型詩)의 고정형(fixed form)과는 다르다. 일정한 범위 안에서 음절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유연성이 있다. 시조는 형태가 가지런한 정형시다. 외국 시를 공부한 이들 중에 시조의 음절 수를 지나치게 고착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시조의 장점인 유연성을 오해하는 데서 온다. 시조에 강약률을 입히려는 관점도 바람직하지 않다.
시조는 ‘절제된 자유’를 본질로 하는 우리만의 전통시다. 시조는 절제 지향적 구심력과 자유 지향적 원심력의 역학적 에너지가 길항을 빚는 그 어름에 자리한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