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과정에서 부모로부터 자주 화풀이를 당하거나 혼난 아이들은 ‘베버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동일한 자극이 지속되면 둔감해져서 반응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큰 자극이 가해져야 반응한다’는 것이 베버의 법칙이다. 자주 화내는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은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한다. 언제까지 분노하는 부모에게 쩔쩔매며 살 것인가? 능력이 부족한데 어쩌란 말인가? 결국 아이는 부모의 감정적 반응을 무시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체벌과 호통으로 가르치면 아이들은 회피하는 법을 배운다.
논리력이 부족한 아이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쯤은 부모(특히 지식층 부모)에게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교육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는가? 부모에게 제압당한 아이가 무엇을 창의적으로 할 수 있겠는가? 강박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청소년을 만들어놓고, 그 잘못이 아이에게 있다고 푸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실제로 혼내거나 화내지 않을 때 아이 스스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은 많은 부모와 교사 들이 경험한 바이다. _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 중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잔소리(강요와 통제)를 스트레스 요인 1순위로 꼽았다. 그렇지만 부모들은 잔소리하는 것을 부모의 도리요, 가정교육의 수단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의 잔소리는 보약이 됩니다.”
“밥상머리교육을 하자니 잔소리가 나올 수밖에요.”
우리가 믿어온 것처럼 잔소리는 정말 교육 효과가 있는 것일까?
잔소리는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어떤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수단은 된다. 그러나 바람직한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는 없거나 오히려 그런 효과를 감소시킨다고 보는 것이 교육심리학의 견해 중 하나다. (…)
부모의 걱정과 잔소리는 아이를 위축시킨다. 부모가 걱정하지 않고 낙관할 때 아이는 허리를 펴고 멀리 볼 수 있다. 어릴 때부터 키가 작았던 나에게 아버지는 “나보다야 크겠지. 뭘 걱정이야.” 하셨다. 어떻게 하면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걱정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나보다야 잘 벌겠지. 뭘 걱정이야.” 하셨고,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까 궁리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바르게만 살면 되지, 뭘 걱정이야.” 하셨다. 아버지는 듣기 좋으라고 입에 발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었다. 그 진정성은 어린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_ [아이를 뒤흔드는 부모 강박증] 중
자녀교육의 처음과 끝은 아이로 하여금 ‘나는 유능하다’라는 확신을 갖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부모 자신의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아이의 자기 유능감 형성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니 모두에게 유익하다.
자기 유능감은 ‘절대적 자신감’이다. 이는 남과 비교하여 얻는 상대적 우월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상대적 우월감은 모래성과 같아서 작은 충격에도 쉽게 허물어진다. 우월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평생 무언가에 쫓기듯이 살 수도 있다. 또한 우월감을 유지하지 못하면 열등감이나 패배감에 빠지기 쉽다.
자기 유능감으로 충만한 아이가 되면 순풍에 돛 단 듯이 인생을 항해할 수 있다.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잠재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아실현을 향해서 갈 수 있다. 자아실현에는 특별한 목적지가 없다. 바람이 부는 대로 맡겨두고 항해를 즐기는 것, 그 자체가 자아실현이기 때문이다. _ [재능 발견하기] 중
“우리 애가 텔레비전을 좋아해요. 내가 집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다가 내가 나가기만 하면 텔레비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간다고 아내가 일러주더라고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이를 불러 세웠어요. 한바탕 혼찌검을 놓았죠. 그러고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텔레비전 플러그를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어요.”
“그래서 효과가 있던가요?”
김 선생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없었어요. 오히려 아내와 내가 일주일도 못 견디고 다시 연결했어요. 심심해서 못 살겠더라니까요.”
좌중에서 깔깔깔 웃음이 터졌다.
어디 텔레비전뿐이랴.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가세한 전자기기 삼총사는 현대인의 일상을 깊이 잠식하고 있다. 이것들은 특히 학업에의 몰입을 방해할 때가 많다. 지금 내 스마트폰도 메시지가 왔다고 징징 울며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
비단 이 삼총사만 학업에 훼방을 놓는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를 배회하거나 청소년이 삼가야 할 술이나 담배를 가까이하는 일, 종교나 동아리 활동에 심취하거나 연애에 넋을 빼앗기는 일 들 역시 학업에 지장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 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녀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부모라 할지라도 이를 강제로 억압하면 역효과 또는 부작용이 생긴다. 뚱뚱하니까 밥 먹지 말고 며칠 굶으라고 명령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자녀가 몇이나 있을까? 휴대폰을 밥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요즘 아이들이다.(…)
우리 속담에 ‘육곳간집 아들이 고기 싫어한다’는 말이 있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으니 고기에 연연할 필요가 없어서다. 마찬가지로 조건을 붙여 속박하지 않으면 스스로 절제하는 능력이 생긴다. 아이의 자아실현 경향성을 최대로 발휘하게 하는 조건은 ‘자유’이다. 자유 속에서 아이는 자신의 천재적 잠재력을 스스로 찾아내고 이를 발휘하게 된다. _ [집중력 만들기] 중
공부나 일이나 그 자체로 즐거워서 할 때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러한 능력이 과연 자신에게 있는지 의심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람은 천재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근래 대한민국에서는 천재의 등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운동 천재, 바둑 천재, 연기 천재, 노래 천재, 게임 천재, 컴퓨터 천재…. 몇십 년 사이에 특출한 재능을 가진 아이가 과거보다 더 많이 태어난 것일까? 하지만 이런 가정은 과학적인 개연성이 부족하다. 유전 정보는 쉽사리 변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확산되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는 천재의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
공부를 위한 최강의 동기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은 공부 자체가 목적일 때에 얻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서, 안전을 위해서, 자존심을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면 공부는 괴로운 일로 전락한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은 아이가 배움 자체에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공부에 조건을 달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대신 자녀가 공부할 수 있는 환경만 제공하면 된다.
_ [최강의 학습 동기] 중
나는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나 관습에 반대한다. 그 관습 때문에 어른은 아이를 깔보거나 함부로 대하게 되고, 그 결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아이들은 반항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자존심을 다치면 유능해지지 못한다. 유능하지 못하면 남을 이기고자 하는 일에 집착하게 되고, 그 결과 얻는 것은 허탈함뿐이다. 사람은 밥만 먹고 누워 자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두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게끔 되어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일을 회피하게 되는 것은 비교와 경쟁에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불편한 마음부터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자신의 의도대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아야 한다. 간절히 바란다는 것은 쉽사리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전제를 깔고 있고, 그런 생각은 각종 무리와 폐해를 낳게 마련이다. 자녀교육에 관한 한 담백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_ [바라지 않아야 바라는 대로 큰다] 중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