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곳의 모든 책은 결국 희망만 이야기할까? 희망 없는 삶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서점가의 베스트셀러 코너를 살펴보며 든 생각이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는 은연중에 행복 강박증이 있는 것이 아닐까. 건강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면 당연히 지치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아야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내는 진취적인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메시지를 간직하기 위해서 말이다. 왜 이곳의 모든 책은 결국 희망만 이야기할까? 희망 없는 삶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 p.6
그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리더니 아빠가 속옷도 입지 않은 나체의 몸으로 달려들어 내 교복을 잡아당겼다. “이년 이거 교복 다 찢어 버려야 돼! 너 같은 건 학교 갈 필요가 없어!” 나는 교복을 찢으려 하는 것보다 나체인 아빠가 달려드는 것에 더 놀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엄마가 아빠를 말리며 안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닫힌 안방 문틈으로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 p.30~31
고시원 복도 중간에는 공용 컴퓨터가 있었다. 나는 급한 메일을 보내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는데, 바탕화면에 야동 여러 개가 버젓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이걸 어떻게 본 걸까. 나는 그 뒤로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공용 컴퓨터를 사용하는 대신 돈을 내고서 근처 PC방에 가는 걸 택했다.
--- p.68~69
H는 언젠가부터 나와 만날 때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모든 데이트 비용을 내가 내는 것은 자연스레 당연한 일이 되었다. 나는 그와 주말에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평일에는 모든 끼니를 라면으로 때웠다. 가끔 H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식사하는 사진을 찍어 보내줄 때면 서운한 감정이 들었지만, 절대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진짜’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4년이었으나, 나와 함께한 시간은 6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 함께한 6개월도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와 나눠 쓴 것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으니 그 여자만 정리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솔직한 마음은 나만 모르게 여전히 내가 ‘가짜’여도 상관없었는데, H는 단호히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H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H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했으니 믿어야 했다. 그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고,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동안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중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했다.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된 내 모습은 볼품없었다.
--- p.88~89
혼자 죽는 것이 아닌 동반 자살을 생각하게 된 것은 오로지 ‘확실하게’ 죽고 싶어서였다. 내가 서툰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불구가 되어 다시 깨어나거나 식물인간이 되는 경우가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확실한 자살 방법을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고, 행여나 죽음의 순간에 공포심이 생겨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마음을 다잡아주며 반드시 자살을 추진시켜 줄 또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 p.110
“실례합니다. 자살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아서요. 모니터 보니까 유서를 쓰고 계셨네요?” 내 자리 뒤로 경찰 서너 명이 와 있었다.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내가 자살하려는 걸 경찰이 어떻게 알았지? 대체 누가 신고를 했다는 거지? 근데 이런 것도 신고를 하나?’ 혼란스러움에 벙찐 표정으로 있다가 일어나라는 경찰의 독촉에 정신을 차렸다. “유서 아니고 그냥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이런 걸 누가 참견하고 신고했다는 거예요?” 그때 경찰 중 한 명이 내 가방을 허락도 없이 들췄다. 나는 신경질을 내며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쳤다. “가방에 연탄이 있네요. 일단 여긴 사람들이 많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시죠.”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PC방에 있는 모든 이가 나와 경찰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범죄자가 된 것 같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머뭇거리는 동안 한쪽에선 경찰이 내 유서를 읽고 있었다. “보지 마세요!” 나는 순간 수치스러움에 악을 쓰고 모니터를 껐다. 그리곤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PC방을 뛰쳐나갔다.
--- p.119
자판기 커피를 홀짝거리며 내 또래로 보이는 남경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근데 가족이랑은 왜 사이가 안 좋아요? 그래도 믿을 사람은 가족뿐이에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다들 힘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고….” “저기요. 설교하지 마세요.” 남경의 같잖은 설교에 기가 막힌 내가 노려보며 말하자 그도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역겨운 위선자들. PC방에서 신고한 그 오지랖 넓은 인간도 내가 오늘 한 생명을 살렸다며 뿌듯해하고 있겠지. 이들은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결코 모른다.
--- p.125~126
나는 눈물을 닦고 휴대폰을 연 뒤 엄마에게 보낼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내가 유년 시절 겪었던 아픔,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병들, 현재의 끔찍한 내 상태까지 낱낱이 고백하고 토로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길고 긴 고백 끝에, 사실 내 평생 진실로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으나 끝내 꺼내지 못했던 말을 적었다. ‘엄마, 나는 이제 정말 나를 사랑하고 싶어. 내가 죽고 싶은 생각을 멈추고 진심으로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제발 도와줘, 엄마.’
--- p.152
“만약 다안 님과 똑같은 상황인 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위로해주고 싶으세요?” 내 얘기를 모두 들은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고민했다.
--- p.172
그 남자가 생각하는 자살 방법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그렇게 믿고 있는) 질소 흡입이었고, 대량의 질소를 구입할 수 있는 지방의 어느 공장도 알아냈으니 차를 타고 함께 가져오자면서 흥분된 상태로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인터넷으로 검색해 찾아낸 듯한 질소 흡입으로 자살한 적나라한 시신 사진들을 내게 예고도 없이 무더기로 보냈다. 최대한 침착하게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려 애쓰던 차에, 무방비 상태로 시신 사진을 맞닥뜨리니 너무 충격적이고 화가 나 나는 곧바로 아무 말 없이 그 남자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 p.207
내가 그 연락마저 차단하면 급기야 ‘내 연락 계속 안 받아주면 자살할 거야. 유서에 언니 때문에 죽는 거라고 쓰고 죽을 거야. 진심이야’라는 협박 메일을 수차례 보냈다. 그럼 나는 혹시나 그녀가 진짜로 자살할까 봐 화나는 감정 반 걱정되는 감정 반으로 답장을 했고, 그녀는 앞으로 다시는 언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용서를 받아냈다. 그리곤 ‘이런 얘기 언니한테만 한 거야. 언니는 다 이해해줄까 봐. 솔직하게 다 말하고 싶어서’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이것은 마치 평생을 가면 속에 살면서 진실한 소통의 상실에 지쳐있던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아 이상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 p.215~216
L은 내게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네가 죽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그냥 너 혼자 편해지려고 죽겠다는 거야? 죽을 각오로 살아. 살아서 뭐라도 좀 해봐.’ 아, 그 말은…. 그 말은 정말이지 내가 인생을 살면서 들었던 최악의 폭력이었다. 가장 흔하디 흔하고 누구나 내뱉기 쉬운 폭력이자 가장 잔인하고 오만한 조언이며, 화자는 그게 오로지 상대를 위한 선의에 기인한 말이라고 믿고 있다는 의미에서 가장 서글픈 위로였다. 오랜만에 연락 와서는 기껏 한다는 말이 죽고 싶다는 징징거림이라니, L에게도 나는 최악의 폭력을 행세한 셈일 수 있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충분히 공유했던 친구였는데, 나의 멍청한 우울과 L의 서툰 위로 때문에 갑자기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군이 되어버렸다. 나는 순식간에 암울해져 L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채 카톡 앱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 p.226
나는 글쓰기를 멈추고 햇살에 반짝이는 카페 창가의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이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내 영혼을 태우고, 남은 잿더미를 텅 빈 몸뚱이로 열심히 휘적이는 상상을 해본다. 잿더미에는 우울과 상실과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여전히 죽고 싶은 마음들이 부서지지 못한 채 응어리져 있겠지. 나는 그 모든 것들을 그러모아 끌어안은 채 오늘도 숨 쉬며 살아있다.
--- p.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