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에는 많은 저자들이 아가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을 묘사한다고 보았습니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또는 그리스도와 개별 영혼 사이의 사랑을 이 책의 주제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적지 않은 이들은, 아가는 그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성경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입문」중에서
이런 줄거리에 앞서 타르굼 첫머리에서는 아가라는 책의 제목을 설명합니다.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어로 ‘쉬르 하쉬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노래들의 노래”입니다. 보통은 “거룩한 것들의 거룩한 것”이 지성소를 뜻하고 코헬렛에 나오는 “허무들의 허무”가 모든 것이 허무함, 또는 지극히 허무함을 나타내듯이 “노래들의 노래”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뜻한다고 생각하여 우리 성경에서도 “아가雅歌”라고 옮깁니다.
---「제1부 타르굼」중에서
사랑을 노래한 책인 아가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읽어 낸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인 힘이 사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제1부 타르굼」중에서
예를 들어 앞서 인용했던 아가 1,2에서 “아, 제발 그이가 내게 입 맞춰 주었으면!”이라고 할 때의 입맞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을 나타낸다고 이해했던 유다교 전통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것으로 해석되기는 하지만, 히폴리투스에게서는 신약에 비추어 말씀의 육화를 요청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구약은 바로 그 말씀에 대한 예언이었고, 이제 신약에 이르러 신랑의 입맞춤은 다름 아닌 육화하신 하느님의 말씀임이 밝혀집니다. 히폴리투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육화로 그분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또한 인간 전체와 결합되심으로써 아가에서 말하는 연인들의 합일이 이루어집니다.
---「제2부 히폴리투스」중에서
우리는 아가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개별 영혼의 사랑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인간적 사랑 특히 부부의 사랑은 신적인 사랑의 비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2부 히폴리투스」중에서
오리게네스는 때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하고 때로는 영, 영혼, 육체라는 세 요소로 구분합니다. 인간에게 영혼과 육체가 있다는 개념은 성경과 신학에서도 물론 자주 나타나고 철학에서도 널리 사용되지만, 삼분법도 성경에 기초합니다. 실상 오리게네스는, 인간은 오직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통해서만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에 대해서 역시 그러합니다.
---「제3부 오리게네스」중에서
오리게네스는 전통에 따라 아가를 솔로몬이 썼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 책을 일종의 연극으로 이해합니다. 아가의 역사적-문자적 의미는 여기에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연극에는 신부의 친구들과 신랑의 친구들 같은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고, 대화도 신랑과 신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향한 말들이 함께 들어 있으며, 이를 통하여 무대 위에서 서사적인 줄거리가 전개됩니다. 문자적 의미에서 이 노래는 혼인 축가입니다.
---「제3부 오리게네스」중에서
오리게네스에게 진정한 사랑은 오직 신적인 사랑뿐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진정한 사랑은 언제나 그런 것이기에 성경에서 실제로는 아가페에 대해 말하면서 마치 에로스에 대해 말하듯이 표현한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성경에서 두 개념을 따로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3부 오리게네스」중에서
오리게네스는, 아가의 신랑이 바로 그 말씀이시라고 봅니다. 아가가 참으로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책이라면 그 책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신랑의 친구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던 시대가 지나고 이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께서 신랑으로 직접 다가오십니다. 신부가 그 신랑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가 아가입니다.
---「제3부 오리게네스」중에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와 마찬가지로 솔로몬의 작품으로 되어 있는 잠언, 코헬렛, 아가가 지혜의 세 단계를 보여 준다고 여기면서, 《아가 강해》 에 앞서 《코헬렛 강해》를 썼습니다. 잠언은 인간적 지혜를 다루고, 코헬렛에서는 지상의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게 되며, 아가에 이르러서는 다른 모든 것을 떨쳐 버린 영혼이 하느님과 신비적인 결합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4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중에서
영혼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으로 끊임없이 그분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종착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계속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하느님께 도달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갈망의 대상인 하느님이 무한하시므로, 유한한 영혼은 결코 하느님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거꾸로, 영혼이 잠시라도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유한한 영혼은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제4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중에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부는 신랑에게 사랑의 질서를 잡아 주시기를 청하고, 신랑은 사랑의 화살로 정확하게 신부에게 상처를 입히며(2,5) 사랑으로 앓고 있는 신부를 팔로 붙잡아 줍니다(2,6). 이제 신부는, 곧 완전한 영혼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만을 갈망할 것입니다.
---「제4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중에서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3,4) 영혼이 천사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피조물을 포기하고 개념으로 하느님을 파악하려는 생각을 버릴 때, 비로소 영혼은 신앙으로 하느님을 발견하고 파악하게 됩니다. 이제 그 영혼은 하느님이 마음 안에 들어오시어 그 안에 머무실 때까지, 신앙으로 그 하느님을 붙잡고 놓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4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