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 지배와 공존
1927년 프랑스 식민 통치 아래에 있었던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아만두 쿠루마Ahmadou Kourouma가 쓰고 유정애가 한국어로 번역한 『열두 살 소령』(미래인, 2008)이라는 소설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네 권의 사전을 갖고 있다. 라루스 사전, 쁘띠 로베르 사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쓰는 프랑스어가 나와 있는 특수 어휘 사전, 그리고 하렙 사전이다. 내가 똥같은 내 인생, 빌어먹을 내 인생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그럭저럭 들어줄 만한 프랑스어로 말할 수 있는 건 이 사전 덕분이다. 이 사전들은 내가 말하기 어려운 말을 설명하고 싶을 때 도움을 줄 거다. 이 사전으로 내가 사용하는 속어나 중요한 말들을 찾고 확인하고, 그 뜻을 설명할 것이다. 내가 떠들어 댈 이야기는 식민지의 백인 지배자들과 아프리카 흑인 토착민들은 물론 프랑스어를 쓰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읽어야 하기 때문에 설명을 잘 할 필요가 있다. 라루스 사전과 쁘띠 로베르 사전으로는 프랑스에서 쓰이는 어려운 단어들의 뜻을 찾아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프리카 프랑스어 특수 어휘 사전을 잘 이용하면 아프리카의 어려운 말들을 백인 프랑스인들에게 알려 줄 수 있다. 한편 피진 영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프랑스어권 사람들에게 피진 영어 속어들을 설명하고 싶을 땐 하랩 사전을 찾아 볼 것이다.
?중략? 여기서 잠깐 부족에 대한 설명을 좀 해야겠다. 우리가 사는 호로두구에는 밤바라와 말랑케, 두 부족이 있었다. 쿠루마, 시소코, 디아라, 코나테, 디울라 같은 가문들은 우리 말랑케족에 속했고 이슬람교도였다. 말랑케족은 원래 이방인이었지만 알라의 말씀을 섬겨온 사람들이다.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했고 야자 열매로 담근 술은 마시지 않았다. 돼지고기는 물론, 발라 같은 물신 숭배자가 잡은 짐승의 고기도 먹지 않았다. 다른 마을에는 밤바라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고 이슬람교를 거부한 카프로들이었다. 또 미개인인 데다 토착 종교를 믿는 마법사들이기도 했다. 밤바라족은 로비나 세누포스, 또는 카비에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가 식민지가 되기 전에는 발가벗고 다녔다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토착민들, 곧 진짜 옛날 땅주인들이다.”
그렇다. 아프리카의 코트디부아르의 한 마을에는 밤바라족과 말랑케족, 그리고 그 옛날 토착민들이 프랑스의 지배 아래 살면서 그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네 가지의 사전을 사용하는 소통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은 이러한 내용을 주제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식민 지배의 언어 침탈에 대한 고발과 지배자의 언어와 토착민의 언어 간의 갈등과 또 종교의 충돌을 통해 망가져 가는 12살짜리 주인공의 처참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네 권의 사전을 가지고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은 대단히 불편하고 비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배자의 언어인 프랑스어를 습득하면 될 일을 왜 이처럼 여러 가지 불편한 언어를 학습해야 하는가에 대해 간단하게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는 실마리는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다. 지난 15세기 이후 서구 유럽의 지배 언어를 중심으로 피지배 국가나 민족 또는 부족들에 대한 언어지배가 강력하게 또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다. 여러 제국은 기호(문자와 언어)를 지배함으로써 완성된다.
그러나 기호를 지배해 왔던 어떤 제국도 결코 영원하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응구기와 시옹오가 쓰고 박혜경이 옮긴 ??마음의 탈식민지화-내 마음 담는 그릇, 모국어Decolonising the Mind??(수밀원, 2007)에서 “권력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매혹하고 사로잡아 포로로 만드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개는 언어이다. 총탄은 육신을 종속시키는 수단이고, 언어는 정신적 종속 수단이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언어(기호 곧 문자, 그림, 텍스트, 아이콘, 오디오, 비디오, 이미지, 영상 등을 총칭)의 지배 방식은 제국의 논리에 감추어 둔 독수리의 발톱과 같은 숨겨진 무기이다.
21세기에는 최소한 세계 언어의 절반 정도가 절멸해 버릴 수 있다고 한다. 걷잡을 수 없는 언어의 혼종이 대량으로 출현하는 시대에 들어섰다. 무슨 일 때문에 이 다양한 목소리가 침묵하거나 뒤섞이게 되는 걸까? 지난 세기 서방 유럽의 몇몇 국가 언어가 아프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아메리카에 살던 수많은 원주민의 언어를 포식glottophagie하였다. 언어의 식민지화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영어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국가와 민족 그리고 부족들에 이르기까지 영어가 온통 세계를 지배할 기운이 보인다. 이미 영어 그 자체가 엄청나게 다양한 변이형을 가진 변종Variation이나 혼종의 영어로 둔갑하여, 지난 세기에 무서운 속도로 죽어간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언어의 자리를 다시 메우거나 뒤섞이고 있다.
토착민의 언어는 지구에서 한번 없어지면 대체할 수 없는 천연자원과도 같은 것이다. 언어의 다양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면 우리가 끌어와 쓸 수 있는 지적 기반도 함께 낮아지기 때문에 인류의 환경 적응력은 현저히 감소된다. 우리 주변의 다양한 언어와 방언이 두려우리만큼 빠른 속도로 절멸해 가고 있는데도 그 누구도 이런 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난 2백 년 동안 식민 지배, 벌목, 채광, 태풍, 산불, 이민, 고용, 국제결혼, SNS 등 언어 혼류, 다국적기업의 침투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언어의 절멸이 가속화되었다. 이처럼 언어의 절멸은 다양한 생물 종의 절멸이나 뒤섞임 위협과 마찬가지로 인류가 당면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생물 종의 다양성이 무너지면 지구의 위기를 예견할 수 있듯이 언어 다양성의 절멸 현상도 인류의 지적 문명의 재앙이자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지배 언어가 피지배 언어를 잡아먹는 언어 식민주의와 마찬가지로 나라 안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도시 언어(표준어)가 변두리 언어(방언)를 잡아먹는 관계, 곧 도시 언어가 지배 언어로, 변두리 언어가 피지배 언어의 관계로 대응된다. 나라 안에서도 어떤 중심의 공동체가 변두리 공동체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이론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언어 지배의 시도를 정당화하고 있다. 중심에 자리한 표준어 그리고 변방에 자리한 죽어가는 방언들을 바라보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할 때이다. 멸종으로 치닫는 생태계의 현상과 같이 죽어가는 강물, 물고기, 새들, 사라져 가는 나무와 들풀처럼 그것들을 명명하던 변두리의 방언도 함께 저 세상으로 보내야 할 것인가. 소수 변두리의 언어인 방언의 미학을 되살려 내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절멸 위기 방언으로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발전이든 그 발전은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하며, 오직 다양성이 보장될 때만이 진보적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어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상규ㆍ조태린 외 공저인 『한국어의 규범성과 다양성』(2008:31-32, 태학사)에 실린 김진해 교수의 「중심 지향의 문화 넘어서기」에서 표준어와 방언과의 끌어당기는 힘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표준어는 다시 자본 지배의 언어인 영어에 지배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01 왜 언어 다양성이 중요한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