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면 그것은 무엇을 이루는 과정이 아니었다.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소속된 회사도, 직업의 타이틀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갖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나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민감하지 않은 나라에서 하루하루 밥 해 먹고, 그날 무엇을 할지에 집중하는 시간들이었다. 도피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맞다. 길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것도 괜찮았다. 그저 하루하루 나로 지내는 게 좋았다. 인생을 바꿀 변화가 없다 한들 뭐 어떤가. 우리에게는 가슴이 두근대는 일을 하고,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길을 잃을 자유가 있다. --- 「프롤로그」 중에서
돌연 시모나가 사람들에게 “한국어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고 물어봤다. 약간의 민망함에 ‘시모나, 여기에 한국어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라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자, 아까 유독 나를 향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낸 두 사람이 손을 들고 있었다. ‘응? 이것은 무슨 상황이지?’ --- p.24
귀엽네, 어쩌네 하더니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하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 놀랐다. 생각보다 나는 서양인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벤은 내 안에 뚫려있는 깊은 구멍을 확인이라도 한 듯, 그 뒤로 나를 엄청 편하고 막 대하기 시작했다. 역시 국적불문, 누군가의 허점이란 것은 사람과 사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인가 보다. 결국 벤과 시모나는 서로 투닥거리는 ‘티키타카’의 케미를 발휘하는 사이로, 나는 그 둘 사이에서 똘똘하고 부지런하기로 유명하다는 아시아인의 대표 구멍이 되었다. --- p.29
“두 분은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저희는 길에서 만났어요.”
“네??”
누군가에게 길에서 시작된 인연은 위험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을지도 모른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계를 정해 놓고 갖는 만남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좋은 인연을 만나고 맺을 기회와 자유가 있다. --- p.34
우리는 타지의 이방인으로 언어도, 음식도,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에 서투른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만났다. 그런 그들을 그들의 공간, 일상에서 만난다는 것이 어쩐지 내가 알던 어린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을 느끼게도 했지만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들도 다른 곳에서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저 완벽하지만은 않은 현지인. 나의 서투름을 포용해줄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끌렸다. --- p.99~100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리 없듯이 관광객, 현지인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술집에는 맥주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들 축제모드에 맞춰 친화력 레벨을 상향시킨 것 같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옥토버페스트를 즐기러 뮌헨까지 왔다고 하면, 그때부터 다들 “나도, 나도.” 하면서 건배를 하기 시작했다. --- p.276
여행의 시작도 가는 방향도 모두 달랐던 우리. 그런 우리가 맥주를 마시고 노는 아주 흔한 주말 일상을 ‘축제’란 이름으로 대놓고 크게 벌려놓은 뮌헨에서 만났다. 각자 걸어가던 여정의 한 접점이었던 곳. 어쩌면 방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함께 어울리며 즐기게 하는 것이 축제의 원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각자 만들어내는 선들이 모여 하나의 점이 생겨났다. 이런 점들이 계속 모여 또 다른 선이 만들어지기를! --- p.282
시모나도 유럽 내에서 여행 다닐 때는 항상 짐을 조심하라고 입버릇처럼 잔소리하곤 했다. 실제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여행담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수화물 분실이 아니었던가. 이런 사건 사고가 수집의 대상이 아닌 걸 알면서도, 어째서 여행을 그렇게 다니는 동안 내게는 한 번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지 남들이 다 겪은 경험을 나만 아직 하지 못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짐이 사라진 것이었다. --- p.285~286
떠나기 전은 또 어떤가. 직장생활에서 연차는 왜 그렇게 쓰기 힘든지. 혼자 가기 무서워서 혹은 좀 그래서, 아니면 외로울까 봐, 동행을 찾아보지만 이것도 녹록지 않다. 힘들게 조율해서 연차를 잡았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여서 날짜가 안 맞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또 ‘혼자라도 가야지’ 하고 꾸역꾸역 짐을 싸 들고 떠났다.
세상의 많은 말들이 여행을 막는다. 그 돈으로 저축을 해라, 그럴 시간에 무얼 더 배워라, 위험하니 가지 마라, 혼자 왜 굳이 가야 하냐고도 한다. 그럼에도 계속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