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에?”
조용히 컵을 식탁에 내려놓고 눈을 내리깔았던 도윤은 강우의 말에 고개를 발칵 들었다. 강우는 더 없이 진지했다. 자신이 여태까지 알고 있던 이강우의 모습 중에 가장.
“좋아한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지. 내가 좋아한다는 건 사랑한단 의민데, 너도 그래?”
저 웃음……. 대학시절 동아리 내의 모든 여자들을 홀리면서 꽃미소라는 찬사까지 불렀던 저 웃음!
몸의 모든 수분들이 어디론가 쭉쭉 빨려가는 것만 같다.
“하.하하. 마, 말도 안 돼.”
“그래.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
“에?”
연신 ‘에? 에?’거리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 멍청하게만 느껴지지만 어쩌겠는가, 상대가 나를 멍청이로 만들고 있는 것을.
“이다지도 완벽한 내가 어떻게 너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나도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만.”
“허…….”
이거 뭐야.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고백은 고백인데, 고백이 뭐 이따위인가 싶기도 하고. 진심인 것 같은데 그러기엔 너무 장난스럽고 그러면서 또 진지하고. 도무지 어디에다가 장단을 맞춰야 할지도 모를, 굉장히 고단수를 부리고 있는 강우였다.
“어떡해, 그런데. 난 네가 좋아졌는데.”
“……말도 안 돼, 정말.”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니까?”
“선배!”
“왜.”
도무지! 저렇게 태연하게 말하는 사람. 열불 나, 정말. 도윤은 참다못해 결국 자리에서 발칵 일어섰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넌 내가 장난으로 보여?”
“…그건 아니지만요.”
장난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니 다행인 건가. 강우는 어느새 비워진 자신의 그릇들과 도윤의 그릇들을 함께 들고 일어났다. 도윤은 일어서서 싱크대 앞에 서서 바로 설거지를 하는 강우의 뒷모습을 입을 내밀고 쳐다봤다.
대체 저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방금 전 자신이 말했던 대로,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는 이강우란 사람은 사람의 진심으로 장난을 칠만한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그는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도윤은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좋은데요?”
“내가 원해서 된 게 아니래도.”
고개만 쓱 돌려 씨익, 웃으면서 하는 말이란. 아, 뒷목이야.
어느새 설거지를 다 끝내고 며칠 전에 사다놓은 봉지커피까지 찾아내 끓여 내 놓는 강우에게 도윤은 한숨을 팍팍 내 쉬었지만 강우는 커피를 후후 불며 한 모금 마실 뿐이다.
“내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면 너 말고 다른 여잘 좋아했겠지.”
“뭐라고요?”
“네가 성격이 좋아, 얼굴이 예뻐, 머리가 좋아, 그것도 아니면…….”
“선배!”
마지막에 자신의 상체를 쓰윽 훑다가 가슴팍을 딱 보며 교묘하게 흘리는 말꼬리에 도윤은 꽥 하니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데도 강우는 여전히 유유자적이었다.
“네 선배 귀 안 먹었어. 살살 말해도 다 들려.”
“하. 난 뭐 선배한테 사랑받고 싶은 줄 알아요?”
“누군가가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거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선배 같은 남자는 사절이거든요?”
“그래?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네 머리 나쁜 거야 익히 알고 있었다만 네 머리 진짜 나쁘네. 아니면 벌써부터 치매야? 고스톱이라도 해보던지. 그게 치매 예방엔 좋다던데. 내가 몇 번을 말해. 이게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게 아니라고.”
도윤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떼었다.
“…정말 좋, 좋아해요? 나, 나를?”
“그렇다니까.”
도저히 할 말이 없다. 도윤은 볼에 바람을 가득 불어넣었다가 파, 하고 소리를 내며 철푸덕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일은 강우가 말한 대로 너무나 고맙고 또 기분 좋은 일인데, 도윤은 왠지 모르게 자꾸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뭐가 이렇게 서럽나. 강우는 눈물이 그렁그렁 차 오른 도윤의 눈을 보며 턱을 괴었다.
“왜 또 울려고 그래?”
“모르겠어요.”
“뭘.”
“그냥 전부 다요.”
“모를 게 뭐 있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다소 돌발적이긴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게 너라서 나도 너무나 당혹스럽다만.”
도윤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봐 강우는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너도 날 좋아한다면 나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만 네 마음을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거고. 네 마음을 네게 강요하지는 않아. 물론 너도 날 좋아하는 걸 간절히 바라고는 있지만. 말이 좀 이상하네.”
강우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고는 씩 웃었다. 그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 배어 있는 목소리로 말을 계속 이었다.
“그냥 넌 내가 주는 것만 받아. 지금은 그거면 돼. 음, 나중엔 더 바랄지도 모르겠다. 네게 다른 남자가 꼬리친다면 굉장히 짜증스러워지겠고, 네가 나 아닌 다른 놈팡이와 눈이 맞아버린다면 굉장히 성질나겠지만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가 주는 거 일단 거부하지 말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받아. 그러다가 내가 좋아지면 그때 네가 말해주면 돼, ‘강우 선배, 사랑해요. 사랑하고 있었어요.’”
“풉.”
“생각보단 쉽지?”
입을 가리고 순정만화 속 여고생처럼 부끄럽게 말하는 시늉을 보이는 강우 탓에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던 얼굴을 하고 있던 도윤은 웃음이 터졌고 그도 픽 하니 웃었다.
강우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연신 벙글거리는 얼굴로 계속 말했다.
“나중에 말하기 정 부끄러우면, 신호를 만들까? 말해줘, 하는 표시로 네 입에 두 손으로 이렇게 야호 표시를 만들면 내가 한 번 더 말해줄게. ‘우리 연애할래?’”
“푸핫. 뭐예요, 그게.”
“뭐긴. 신호라니까. 그럼 넌 수줍게 고개만 끄덕거리면 돼. 그럼 넌 나한테 다시 고백을 받는 거고, 나중에 남들에게도 ‘저 남자가 나한테 고백해서 내가 받아줬어.’라고 자랑할 수 있지 않아?”
“웃겨, 정말.”
“몇 번을 말하는데, 너 못지않게 나도 이 상황이 우습거든. 어디 나가면 여자들이 줄을 서는데. 내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턱을 괸 채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한탄스레 말하는 강우의 모습에 도윤은 아니꼽기도 하고 귀
“좋겠어요, 인기 많아서.”
“없는 것보단 낫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이제. 그나저나 너, 눈물이나 닦지?”
“아…….”
눈물이 흐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도윤은 얼른 얼굴을 닦았다.
‘이 사람, 나 정말로 좋아해주고 있구나.’ 강우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서 벅차오른다. 대학시절에 날 헷갈리게 만들었던 성재 선배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었구나, 이게 진짜 사랑이구나…….
---본문 중에서
“나 좀 방까지 끌고 가주라.”
“뭐?”
“손가락 하나도 못 움직이겠어.”
“야! 난 뭐 기운이 남아도는 줄 아냐? 너 땜에 사이코 의사한테 시달린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뭐가 예쁘다고!”
“그니깐 곱게 데려다 달라고는 안 하잖아. 그냥 짐짝처럼 질질 끌고라도 좋으니까 나 좀 데려다 주라. 기운 하나도 없었는데 광년이처럼 웃고 났더니 진짜로 죽을 거 같아. 그 대신 오늘 ‘불행의 여왕상’은 양보할게.”
“지랄하네.”
승희는 투덜거리면서도 이나가 내민 팔을 붙들었다. 작은 체구에 비해 승희는 설비용 공구들도 번쩍번쩍 들어 날라서 남자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힘이 좋았다. 그런 그녀가 몇 번 힘을 쓰고 나니 이나는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나마 이나 방에 침대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내일이 공휴일 아니었으면 강이나 아주 죽었겠네.”
“그러게 말이야. 그거 하나 믿고 오늘을 버텼다니깐.”
농담이 아니라 정말 우유처럼 하얗게 질려 있는 이나를 보며 승희는 잠시 망설였다.
“불행의 여왕 상은 너 가져라.”
난데없는 소리에 이나가 눈을 떴다.
“나 오늘 학원 갔었어.”
“야!”
이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자 승희는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걱정 마. 사고 안 치고 왔으니까. 병혁이는 아예 만나지도 못했는데 뭐.”
“거긴 뭐 하러 갔어. 쓸데없이.”
“문지방이란 년 낯짝이 궁금해서 갔다. 왜?”
잠시 입을 닫아 버렸던 이나가 어지러운지 도로 누우며 물었다.
“예……뻐?”
“계집애. 지도 궁금했으면서 버럭 거리기는. 예쁘긴 뭐가 예쁘냐? 아주 얼굴에 돈 칠을 했더구만. 수천은 쳐 발랐겠더라.”
“예쁜 모양이구나.”
“…….”
“하긴. 안 예쁘면 거들떠도 안 보던 인간인데 어련하겠어? 지 눈에 차는 여자니까 결혼한다는 결심까지 했겠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이나를 보며 승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더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지만 어차피 한 번은 터트려야 할 상처였다.
“그 여자, 너랑 똑같은 귀걸이 갖고 있더라.”
“어?”
“너랑 똑같은 귀걸이 선물 받았더라고. 안병혁한테서.”
지독한 피곤 때문인지 이해는 더디게 왔다. 이나는 그대로 석고처럼 굳어지고 말았다. 승희의 목소리가 잔인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전시장 갔다가 보는 순간 이나 널 떠올렸다던 저 그림도 그 여자 사무실에 떡 하니 걸려 있더라. 정품도 아니고 복제화더구만? 똑같은 그림이 두 개씩이나 있고 말이야. 그 뿐인 줄 아냐? 크리스마스 때 사왔던 가방이랑 네가 제일 좋아하는 팔찌랑…….”
피식 웃는 이나를 보며 승희는 말을 멈추었다.
“훗. 어쩐지 요 1년 동안 선물을 자주 해준다 싶었다. 그 여자 맘 잡으려고 선물 공세 하면서 양심에 찔리니까 나한테까지 해준 거였구나?”
“웃음이 나오냐, 지금!”
이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는 승희를 향해 허탈한 미소를 되돌렸다.
“하도 기가 막혀서 그런다. 정말 인간 안병혁,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제대로 뒤통수 때린다. 그치?”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참기 위해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정말 불행의 여왕은 나였네. 당분간 승희 넌 명함도 못 내밀겠다.”
“복수하자.”
단호한 승희의 목소리에 이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일어나봐, 강이나. 설마 너 이런 꼴까지 당하고서도 유치하게 복수냐 어쩌고 하진 않겠지? 네가 안 하더라도 난 할 거야. 내가 열 받아서도 못 살겠어!”
“어떻게…… 할 건데?”
“오호. 너도 슬슬 동하긴 하는 모양이지?”
“나라고 난데없는 결별 선언에 화가 전혀 안 났을까 봐? 나도 사람인데. 그렇지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헤어지는 마당에 구질구질해지지는 말아야지 싶어서 참은 것뿐이야. 하지만 그 인간이 먼저 저렇게 더티 하게 군다면 나도 가만이야 못 있지.”
“잘 생각했어! 네가 협조한다면 얘기가 빠르지.”
승희가 무릎을 탁 치며 이나 옆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들어 봐. 나한테 계획이 하나 있거든?”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