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5월 22일, 문제의 ‘오둘둘 사건’이 터졌다. 점심시간 무렵 두세 명의 학생들이 꽹과리를 두드리며 교내 이곳저곳으로 학우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을 따라 수백 명이 교문 쪽으로 몰려 갔다. 경찰이 학내로 들어와 무차별적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보통은 경찰이 시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고 있다가 주동자들만 체포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날은 강의실이고 뭐고 가릴 것 없이 경찰이 난입하여 단순 가담자들까지 마구 체포했다는 것이 김항수 군의 기억이다.
그때 원순은 도서관에서 〈타임〉지를 읽고 있다가, 야만적인 진압에 격분한 나머지 시위에 합류했다. 시골집에 있다가 개강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상경했던 그가, 더욱이 방과 후에 이화여대 학생과 미팅을 앞두고 있었던 그가 주동자일리 없건만, 원순은 4개월 동안이나 구치소 생활을 해야 했고 학교에서도 제적당했다. 참으로 야만의 시절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던 것 같다.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한 사람」중에서
박 변호사는 현대사 전공자인 나보다도 훨씬 많은 책을 샀다. 청계천 고서점 등에서 살 때 한꺼번에 수십 권 수백 권씩 이른바 ‘싹쓸이’로 사기도 한 것 같았다. 나중에는 책을 쌓아둘 곳이 없었다. 전셋집에 마냥 쌓아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재동 역문연 건물에 도서시설을 확충해 그 시설의 반 이상을 박 변호사의 현대사 관련 서적들을 넣어두는 데 활용했지만, 그것으로도 턱없이 부족해 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다른 집 건물을 빌려 대량으로 보관을 했다. 지금은 그 책들이 어디로 가 있는지 궁금하다.
박 변호사는 역비에도 글을 많이 썼다. 그중 특히 지금까지도 인용이 많이 되는 ‘국회프락치 사건, 사실인가’, 당시로서는 아주 민감한 주제였던 ‘전쟁 부역자 5만여 명 어떻게 처리되었나’(160매), 독일과 일본의 전범 처리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다룬, 260매나 되는 ‘일본 전쟁 범죄 처벌 지금도 가능한가’, 어쩌면 한국에서 최초로 세계 여러 국가의 과거사 문제를 다루었을 ‘세계 각국은 과거사를 어떻게 심판했는가-부당한 권력의 ‘불처벌’ 사례 문제를 중심으로’(150매) 등이 기억에 남는다. 모두 그가 탁월한 역사학자이자, 사회과학도, 법학도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뛰어난 논문들이었다.
---「공공을 위해 사는 사람」중에서
1996년 말 한 주간지가 참여연대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다. 그 후 우리는 이 슬로건을 참여연대의 지향과 사명을 설명하는 슬로건으로 사용해왔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에는 시민사회단체 공통의 연대사업으로 확대되고 김대중 대통령을 포함한 여야 국회의원 과반수로부터 법제정을 약속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을 비롯한 맑은사회만들기운동의 결과로 1999년 사상 최초 특별검사 임명(고위층 옷로비 특검), 2001년 돈세탁방지를 위한 패키지법 제정, 2002년 부패방지법 제정과 국가청렴위원회 발족 등이 이어져 지금까지 우리나라 반부패제도의 기본 틀로 작동하고 있다.
부패방지법 제정운동은 참여연대가 같은 기간 동안 진행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운동, 재벌개혁을 위한 소액주주 운동 등과 더불어 외환위기 전후의 한국사회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민 행동의 기념비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기간 내내 상근 시민활동가로 변신한 박원순과 우리는 한 팀이었다.
---「우리 청춘의 참여연대, 그리고 박원순」중에서
박원순 변호사는 나눔과 관련된 것이라면 밤낮으로 틈틈이 조사하고 상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한국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름다운재단이라는 사례만 갖고서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해외의 기부와 관련된 연구, 심포지엄, 각종 저널, 교육기관, 싱크탱크들을 보며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지식정보의 고양이 시민사회나 기업, 나아가 정부와 제도의 큰 변화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는 상근연구원이 없는 네트워크 연구소 형태로 각 분야 전문가들의 자원봉사협업으로 구성되고 운영되었다. 적은 연구비에도 훌륭한 연구자들이 참여해 한 해는 개인기부에 대해서, 한 해는 기업기부에 대한 리서치와 각종 테마연구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기부문화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활동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시작된 아름다운재단 기부문화연구소의 대표연구인 ‘Giving Korea’는 최근 다양한 정부 및 민간 연구기관들의 연구발표 속에서도 한국의 대표적인 기부문화에 대한 연구물로 자리매김하며 기부문화의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가장 작은 나눔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씨앗이 될 수 있게」중에서
그는 시속 100km로 앞장서 달리면서 시속 10~20km로 터덕대며 뒤따라오는 연구(위)원들을 ‘집중회의’를 통해 직접 가르치며 끌고 나갔다. 그에게 집중회의란 혹독한 조련의 과정이었다. 특정 주제나 과제에 대해 연구원들이 먼저 자료들을 조사해 연구·사업계획(안)을 발표하게 한 뒤, 자신이 상세한 ‘핀셋 코칭’으로 정밀하게 보완해주었다. 집중회의에선 그의 날카로운 질책이 쏟아지기 일쑤여서 연구원들은 몹시 힘들어했다. 하지만 그런 ‘혹독한 조련’을 거치며 연구원들의 역량도 조금씩 발전하였다. 희망제작소에 몸담았던 후배들이 다른 기관이나 단체에서 ‘일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때마다 나는 늘 박원순의 혹독한 조련 덕이려니 생각했다.
그는 자신에게도 가혹했다. 1년에도 몇 번씩 국제 컨퍼런스나 선진지 견학 등을 위해 해외여행을 다녔는데, 인천공항에 내리면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사무실로 돌아와 밤늦게까지 일을 했다. 후배들이 건강을 걱정하면 “이렇게 몸을 힘들게 해야 시차를 빨리 극복한다.”라고 말하며 웃었다. 지리산 종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산을 그리 잘 타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매년 여름과 겨울, 거르지 않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다녔다. “발톱 10개를 다 지리산에 상납했다.”라는 말을 ‘자랑’처럼 했는데, 그 또한 힘들게 걷고 되돌아보며 다지는 ‘자기 조련’의 과정 아니었을까 싶다.
---「박원순과 함께한 희망제작소 6년」중에서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요청한 자료보다 먼저 ‘서민의 발 보도 하루 만에 서울시 심야버스운행’이라는 제목의 내 이름이 실린 인터뷰 기사가 크게 나온 것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시장보고도 결정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사가 먼저 나갔으니 윗선에서 어떤 불벼락이 떨어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사를 본 박원순 시장이 곧바로 소셜미디어에 기사를 공유하면서 서울시 정책으로 표방하자, 심야버스운행을 반기는 뜨거운 응원과 격려의 댓글이 쏟아졌다.
박원순 시장은 즉시 나를 불러 적극적인 의논과 함께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SNS로 소통하는 시민들의 반응이 사업을 추진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내가 SNS를 긍정적으로 보고 입문한 계기가 되었다. 시민공모로 ‘올빼미버스’라는 이름이 선정되고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적절한 노선이 결정되었다. N으로 시작하는 넘버를 단 올빼미버스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택시업계의 반발이 있었지만 터진 물길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시민 중심의 정치 철학에 초지일관하신 분」중에서
2019년 7월 어느 날, 서울메이드 브랜드의 팝업 스토어 행사를 위해 베트남 하노이에 출장 중이었는데 시장님이 전화를 주셨다. “제가 남미에 순방을 가는데 수행으로 따라 오세요. 우리 중소기업 제품을 남미에도 팔아야 할 것 아닙니까. 순방 팀에게 이야기해놓을 테니 곧장 멕시코로 오세요.” 결국 나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멕시코로 날아가야 했다. 멕시코에 도착했는데 서울시 수행원들이 졸지에 멀리까지 불려온 나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막상 와서 상황을 보니 시장님이 나를 급히 부를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각 정상들과의 회의에 항상 경제와 스타트업 생태계는 주된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누군가 옆에서 보좌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관련 회의는 멕시코, 콜롬비아 메데진, 보고타에서 연일 이어졌고, 그 나라 정부 관료들은 서울의 산업과 창업 생태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때마다 박원순 시장님은 그들에게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고 회의가 끝나면 항상 나에게 숙제를 남겼다.
---「오! 나의 변호사님, 오! 나의 시장님」중에서
박 시장의 시정 운영 방식은 아주 달랐다. 그는 시민 의견 경청, 시민 참여, 정보 공개와 역동적인 실험을 강조했다. 시장에 당선된 직후, 그는 사회혁신본부를 설치하고 글로벌 사회혁신가 행사를 개최했다. 나는 사회혁신 네트워크와 함께 이 행사를 구성하는 데 참여했다가 새로 만들어진 국제 자문 위원회의 의장을 맡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 위원회에서는 인도의 아닐 굽타, 이탈리아의 에지오 만지니, 홍콩의 에이다 웡, 캐나다의 팀 드레이민, 태국의 수닛 시레스타, 영국의 루이스 풀포드와 피터 람스덴, 멕시코의 가브리엘라 고메즈몽을 비롯해 전 세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매년 서울에 와서 프로젝트를 둘러보고 서울시청 공무원과 사회혁신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중략)
나는 전 세계의 시장과 정치 지도자들을 많이 알고 지냈지만 박 시장처럼 열정과 헌신성, 친절함을 다 갖춘 사람은 드물었다. 지난 10여 년간 박 시장의 업적 덕분에 서울은 전 세계의 사회혁신가와 도시 리더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 시기는 한국이 디지털 제품이 되었든 음악가와 영화인의 작품을 통해서든 전 세계에 훨씬 눈에 띄게 부각된 시기이기도 하다. 박 시장의 재임 기간 동안 환경, 지역사회, 복지와 도시 개발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도함으로써 역동적이고 혁신적인 도시로 탈바꿈한 서울은 한류열풍에 부합하는 도시가 되었다.
---「도시 혁신 정책을 세계에 전파하다」중에서
박원순 변호사와 첫 만남은 14년 전이었다. 그 당시 그는 시민사회 리더로 홍콩에 와서 강연했는데 그의 명함에는 ‘Social Designer(소셜 디자이너)’라고 되어 있었다. 소셜 디자이너는 뭘까? 시민이 사회를 디자인한다는 개념이 낯설었고 ‘커뮤니티의 권리’라는 개념은 시민이 함께 창조한 아래로부터 위로의 사회 혁신이라고 하는데 이런 개념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그 후 알게 되었지만 박 시장은 불평불만을 버리고 스스로 개혁을 설계하는 게 특징인 것 같다. 시민사회에 있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아이디어들은 시장이 되어 실행해나갈 수 있었다.
박원순 시장은 서울을 ‘공유도시(Sharing City)’로 추진하였고, 공유경제를 장려하고 시청 내 회의실과 주차장을 개방해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시민이 서울의 시장이 되다.”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의 빅데이터를 개방하여 시민사회에게 제공하고, 작업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경계를 넘나드는 토의회의를 끊임없이 열었다. 그가 변화시키고자 한 것은 정부와 공공기관의 역할로 관리자에서 촉진자에 이르기까지, 각종 사회공의와 도시의 지속적 발전에 중요한 정책을 촉진하고, 시민과 공동으로 서울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다.
---「시민 중심의 도시 정책을 실현한 혁신적 사회운동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