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역사가 에버하르트 콜브(Eberhard Kolb)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비스마르크에게 있어서 1847년은 공사(公私) 모두 실로 ‘운명의 해’였다. 그때 그는 생애의 반려자를 얻음으로써 결국 사생활의 면에서 안정된 장소를 수중에 넣게 되었는데, 실은 이것을 전후로 해서 그는 국회의원으로 변신하고 활동의 장을 정치의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32세였다.
---「제1장 파천황으로서의 비스마르크」중에서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비스마르크는 강경 보수파 진영에 몸을 담고, 자신의 기득권익을 옹호하는 의미에서도 반혁명의 입장에 계속 서 있었다. 그것은, 즉 민족주의로 대표되는 19세기의 시대조류에 상반되는 것이며, 프로이센의 근대화에도 반대·저항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일본의 독일 역사학자인 오우치 고이치(大內宏一)가 단적으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반근대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스마르크가 의회, 신문, 협회 등의 근대적인 정치 수단을 이용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혁명이라는 대변동, 정치체제가 근대화로 향하는 커다란 물결 자체가 그에게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제2장 국회의원이 되다」중에서
실로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에 대해서 현재의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이 아니라 그가 지닌 보수적·전통적 측면, 즉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그의 입장에 대한 무조건의 지지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그의 마음을 얻는 것에 성공했다. 이 회답에 빌헬름 1세는 만족하여,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결심을 했던 것이다. 이후 26년 동안에 이르는 양자의 2인3각의 신뢰 관계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제3장 외교관이 되다」중에서
정권의 자리에 앉게 되어 득의양양해진 비스마르크는 그 직후에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곤란한 지경에 빠져버린다. 계기는 1862년 9월 30일에 그가 하원 예산위원회에서 한 연설인데, 그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연설로 인해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른바 ‘철혈 연설’이다. …… ‘철혈 연설’에 대한 반발은 상당히 컸으며 비스마르크는 그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는 이때 바덴 대공국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있었던 빌헬름 1세를 도중에서 맞이하고 국왕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비스마르크의 입지가 자신의 발언 탓에 불안정해져 버렸는가를 엿볼 수 있다. ‘철과 피에 의해’는 명백하게 실언이었다.
---「제4장 프로이센 총리가 되다」중에서
확실히 그는 19세기의 시대조류인 민족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북독일에서의 프로이센의 패권을 수립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원래 의중에 없었던 독일 통일 사업에 착수하게 되어, 독일 통일이 실현될 수 없었던 단계에서 프랑스를 완전히 적으로 돌리게 되는 외교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독일의 역사가 빌헬름 몸젠(Wilhelm Mommsen)이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때의 비스마르크는 민족주의를 잘 다루지 못해서 자신의 정책과 행동이 그것에 규정되어버렸던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정치가 비스마르크’의 한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5장 북독일 연방 재상이 되다」중에서
이 시기의 비스마르크 내정의 특징은 국민자유당과의 제휴 관계도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는데, 종합적으로 보면 자유주의적 색채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비스마르크를 밑받침하는 보좌진을 살펴보아도, 자유무역주의를 내세우는 총리실 장관 루돌프 폰 델브뤼크(Rudolf von Delbruck)를 위시해 국민자유당에 가까운 인물이 몇 명이나 간취된다. 의회주의를 혐오하는 비스마르크가 여기까지 국민자유당과의 제휴를 중시했던 것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립하지 얼마 되지 않은 제국에 있어서 필요 최저한의 법 정비를 행할 필요에 내몰렸기 때문에 다름 아니다.
---「제6장 독일 제국 재상이 되다」중에서
그때까지 해외 식민지의 획득에 부정적이었고 관심마저 갖고 있지 않았던 비스마르크가 왜 이때에 이르러 급히 식민지 정책에 착수했던 것일까? 이것만 해도 커다란 수수께끼인데, 게다가 그의 식민지 정책이 겨우 1년 반의 기간도 채우지 못했으며 그 이후에는 다시 식민지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그 동기를 둘러싸고 이제까지 몇 차례나 역사가들의 머리를 번뇌하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해석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내정의 요인으로부터 고찰하는 것(이른바 ‘내정의 우위’)과 주로 외정 방면의 정세 및 필요성에 기초하여 논하는 것(이른바 ‘외정의 우위’)의 두 가지로 나뉜다.
---「제7장 성실한 중매인으로서 활약하다」중에서
대중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열광은 늙은 재상의 퇴진에 따른 찰나적인 것이 아니었다. 1890년 그의 75세의 생일에는 눈사태와 같은 규모의 축하문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답지했으며 1895년에 80세의 생일을 맞이했을 때에는 일설에 의하면 약 1만 통의 축전, 45만 통이 넘는 카드가 보내져, 프리드리히스루의 우체국이 이 날에 한정하여 직원을 증가시켜 어쨌든 대처하는 모습이었다. 다양한 기관과 단체의 대표단이 연이어서 프리드리히스루를 경의를 표하기 위해 방문했고 약 450개의 도시가 비스마르크를 명예시민으로 선출했다.
---「제8장 카리스마적 존재가 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