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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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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상상시선-003이동
김재윤 | 상상 | 2022년 06월 29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7 리뷰 9건 | 판매지수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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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29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204g | 123*190*20mm
ISBN13 9791191197778
ISBN10 1191197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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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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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안의 나는 찬란하고
너는 쓸쓸하다

나는 자유롭고
사랑은 갇혀 있다
--- 「벽」 중에서

몸을 뚫어야 문을 만들 수 있다 몸의 이곳저곳을 뚫어 여기저기 문을 만들었다 사는 동안 닫힌 문도 있고 열린 문도 있다 반듯한 문도 있고 고장 난 문도 있다 바람에 덜컹거리기도 하고 바람이 거침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문도 생겼다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문을 만들어야 한다 문을 만들기 위해 몸을 계속 뚫어야 한다 더 뚫을 몸이 없어 몸은 사라지고 문만 남을 때 비로소 문은 완성된다
--- 「문門」 중에서

아카시아꽃으로 향을 피우고 제祭를 올렸다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제문祭文을 읽느라
현기증이 났다
‘유세차維歲次’는 있는데 ‘상향尙饗’이 없다니
그녀가 달려왔다
내 손에서 제문을 빼앗아
돼지를 삶고 있는 장작불에 태우고
내게 입맞춤했다
나는 검은 관에서 일어나 시를 읽었다
그녀는 산수유로 내 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혀줬다
칡꽃은 그녀와 나의 봄을 휘감아
하늘을 지향했고
나는 그녀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움직이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다
그녀는 내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안아달라 했다
--- 「시를 읽다」 중에서

하얀 목련꽃 핀 날
그대 위해 집자한 문장을
봄볕에 말립니다
오래된 문장에 쌓인 먼지를 털며
시간을 놓습니다
수도원 묘비처럼
가지런히 줄 서 있는 문장 사이를
아무리 톺아봐도
그대 사랑
보이지 않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핀셋을 들고
몇 번을 집어도
그대 숨결
잡히지 않습니다
여러 해, 여러 달, 여러 날, 여러 시간을
한 문장이 울고 있습니다
--- 「시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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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매화 꽃잎
의자에
앉는다

이 문장이 눈에 꽂힌다. 아프기도 하고 내심 안심이 되기도 한다. 허공에서 의자에 착지한 꽃잎이 벽 안에 갇혀 있던 김재윤 같아서. 벽 안에 갇혀 혼자 밥을 먹던 시간, 그는 외로움의 간격을 재고 몸 안으로 방을 들였다. 그가 그 방에서 빠져나온 후 몇 차례 만났다. 세상이라는 방으로 귀환한 그는 놀랍게도 천진한 소년 같았다. 시를 쌓아 놓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고, 몇 가지 일을 구상하고 있었다. 서귀포에 같이 한번 가자 하였다. 그의 원고는 붉은 불꽃과 하얀 연기 사이의 광채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말은 간결하고 생각은 단아했다. 김재윤은 “제가 질 수 있는 만큼의 껍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시집 속의 말들은 그래서 현실의 고통을 봄볕에 말린 냄새가 난다. 자신의 생을 일찌감치 내려다본 조감도를 우리에게 넌지시 보여주고 떠난 시인이여, 부디 편히 잠들라. 상향(尙饗).
- 안도현 (시인,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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