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빈자리를 한국인이 채워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영업 업무를 겸해야 하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내 정체성을 무시당하는 느낌마저 들어 사표를 내던지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고생 끝에 겨우 장만한 새집과 곧 태어날 토끼 같은 자식을 생각하며 사직서를 꽉 움켜쥐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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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에서도 길을 잘못 들어서면 그 안에서 생각지도 못한 배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지금 가고 있는 길이 틀렸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조금 돌아갈 수도 있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길일 수도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길은 이어져 있으니,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갈림길에서도 앞만 보고 힘껏 페달을 밟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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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결혼을 한 사람들은 서로 태어나 자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때문에 소소한 단점들이 보이긴 하겠지만, 국제 부부로 살다 보면 단점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고맙다는 표현을 많이 하는 문화, 나보다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화, 더치페이 문화 등은 단점을 모두 잊게 할 만큼 큰 장점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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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면접에서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좋은 답을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 대답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가’였다. 일본에 온 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책과 논문을 읽는 데에 할애했기 때문에 회화 능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어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들은 영어를 섞어서 대답하기도 했는데 좋은 전략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면접관이 모두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사와는 다르게 오히려 건방지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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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의 효율성에 초점을 맞춘 조직 문화는 개성과 다양성을 배제했다. 형태를 규정하고 효율을 설정했다. 그렇기에 그 이상의 능력이 있어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평균적인 능력치에 맞춰 매뉴얼이 만들어지기에 업무 수행 능력에 있어서 특출남을 발휘하고 싶어도 회사에서는 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회사가 따분하고 지루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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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입식 교육의 문제점은 주입되는 교육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만큼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교사를 통해 학생에게 전달되면 이는 가르침이 된다. 그 가르침은 항상 옳은 것이며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일본 사회에 역사 왜곡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일방향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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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모난 돌이 정 맞는다’였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라, 시기의 대상이 되지 마라’ 이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에 있으면서 느낀 건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규정에 속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매뉴얼 안에 존재하지 않으면 돌발상황으로 인식되고, 결국 정을 맞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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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에도 나는 구태여 국산 제품인 ‘제도 샤프’와 ‘점보 지우개’를 고집했다. 일제 학용품을 아예 사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대체 가능한 수준의 품질이라면 가능한 한 국산 학용품을 사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역사를 공부하면서 과거 일본이 우리나라에 저지른 일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배운 일본은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참 나쁜 나라였다. 애국심도, 국제 사회의 역학도 모르던 어린 마음에도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못살게 군 나라의 물건을 나는 사주고 싶지 않았다.
--- p.155
조금 과장을 보태 얘기하자면, 오사카인들은 일본인과는 다른 인종처럼 느껴진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보통의 일본 사람들보다 오지랖이 넓고, 보다 적극적이고, 무엇보다 개그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개그에 목숨을 건다는 부분이 오사카인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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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필자의 집은 ‘형경식당’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과장을 좀 보태 2021년 1년간 적어도 100명 이상의 친구들이 방문했다. 한국과 일본인 친구들은 물론, 프랑스, 대만, 스페인, 영국, 중국, 미국 등 다양한 나라, 다양한 문화권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형경식당’은 현재도 성업(?) 중이다. 이제는 단순히 요리를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친구를 만나는 교류의 장으로도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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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옹성 같은 나의 방에 들어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 회사에 입사한 후, 나는 부모님께 내 초라한 월급에 대해서는 일체 말씀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세계 경제 3위, 대외 순자산 1위의 일본. 분명 표면적으로 국가는 부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은 가난한 나라였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분명 어머니께서 해 주신 말씀이었다. 가난한 나의 월급은 100엔을 1,000원으로 계산했을 때 기본급이 205만 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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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왕족들은 외부인과 결혼을 해서 출가하지 않는 이상 성(姓)을 가지지 않는데, 이 또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일본 왕의 이름이 철수라고 하면, 김철수, 박철수, 이철수처럼 성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철수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 신이 있기 때문에 다른 신을 모시는 종교는 종교인 듯 종교 아닌 종교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종교라기보단 그저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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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3세로서 일본 국적도, 대한민국 국적도, 북한 국적도 아닌, 조선의 국적을 가진 중년 남자. 스스로를 ‘죽어야 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힌 듯 작지만 큰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 오랫동안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고만 있었기에 이제는 스스로 아픔인 줄도 모르고 살아가다 주변에 더 큰 상처를 내야만 하는 사람. 나는 그를,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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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출은 끝난 게 아니었다. 결혼을 앞둔 커플들을 축하하기 위해 회식을 한다며 회식 참가비에, 부서 후배들끼리 결혼 축하 선물을 한다고 선물 비용까지 나의 지갑은 갈수록 얇아져만 갔다. 정말 결혼식에 몇 번만 더 참석하다간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처럼 축의금으로 5만 원 정도만 내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나는 배고파야 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차마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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