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구성원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세상은 불안정하고 모순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담론은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직조된 복잡한 세상을 구성하는 경로(과정)이면서 이미 구성된 체계 그 자체(결과)이기도 하다. 담론은 텍스트로 만들어진 체계이면서 신념과 가치의 지식체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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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담화’와 ‘담론’은 학문 집단마다 선호에 따라 달리 선택하는 용어다. ‘담화’는 국내 언어학자 집단이 선호하는 용어이며 개별적이거나 자의적인 경험을 의미화시킨 언어사용의 구체적인 사례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인문사회 영역(문화연구, 인류학, 사회심리학, 정신분석학, 언론학, 정치학, 사회학, 여성학 등)에 속한 집단은 ‘담론’이란 용어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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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은 이동된다. 어떤 담론이든 어디선가 시작되어, 매체를 이동하며 여러 매체를 통해 유통되고, 누군가로부터 소비된다. 잘 순환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말기도 한다. 이동되는 담론이 상품이나 서비스의 유통과 다를 바 없으니 담론도 ‘물질적 효과’를 만든다고 본다. 영어경시대회, 영어마을, 영어유치원, 서울대학교가 개발한 영어능력시험인 텝스TEPS, 교육부가 주도해 만든 국가영어능력평가시험 니트NEAT, 영어특기자 대학전형, 영어졸업인증제, 글로벌 인재, 글로벌 캠퍼스 등에 관한 담론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질적 효과를 만든다. 수익이 생기고, 제도가 바뀌고, 인력 충원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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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공시적 구조는 학문 전통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되고 있다. 나는 담론자료를 분석할 때 직관적인 해석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 텍스트 분석결과를 범주별로 열거하거나, 미시와 거시 분석단위를 의도적으로 구분하는 편이다. 반 다이크van Dijk 등의 담론연구자도 텍스트 차원의 분석뿐 아니라 텍스트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콘텍스트와의 상호작용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미시와 거시 분석의 경계선이 애매할 수 있지만, 담론의 층위는 인지적-사회적-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나누거나 지역적local, 전체적global 범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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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계보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사회변화를 지배의 수단’으로 바라본 담론/권력 논점이 돋보인다. 푸코는 담론의 양가적이면서 다중적인 속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듯하다. 『감시와 처벌』과 같은 문헌을 읽으면 세상은 염세적으로 보인다. 개별적인 삶은 결코 창조적이거나 능동적일 수 없다. 권력과 지식으로부터 지배적인 담론질서에 포획되어 있다. 규율적 권력의 감시와 개입은 모세혈관처럼 사회 전 영역을 관통하고 있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순응적인 몸을 가진 무력한 인간으로 살고 있다.
--- p.142
텍스트 제공자가 현실을 어떻게 체험하고 관념화하고 있는지 파악하려면 문장구조를 분석할 수도 있다. 부정문이 빈번하게 사용된다면 부정형으로 현실이 이해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단정적인 현재형 혹은 긍정문 형식을 자주 사용하는가? 행위주가 모호한 수동태 문장구조가 자주 선택되는가? 명사화가 자주 등장되는가? 텍스트 제공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재현하는 배경, 방법, 이유 등을 찾는 과정에서 문장구조 차원의 분석에서 체험적 가치의 단서를 구할 수 있다.
--- p.189
텍스트 차원의 분석이 주로 어휘, 문법, 문장 결합 등과 같은 형식자질 축으로 이루어지거나, 체험적, 관계적, 표현적 가치 등과 같은 의미체계 축으로 이루어졌다면, 상호텍스트성 분석은 텍스트와 텍스트가 보다 일관적으로 연결되는 생산, 유통, 소비 과정이나, 장르, 스타일, 핵심주제와 같은 좀 더 큰 차원의 텍스트-콘텍스트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단계다.
--- p.236
텍스트는 서로 인용하고 전제하면서 연결된다. 학술논문이든, 신문 사설이든, 장르와 스타일이 선택되면서 핵심주제가 전달된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교수와 학생의 말 교환, 정치인의 TV토론, 학생이나 사원 인터뷰, 신제품의 판촉, 시상식 발표, 전쟁 영화와 같은 모든 유형의 담론구성물을 해석할 수 있는 관례적 장치가 있다. 그런 장치는 모두 개인적이거나 개별적이지 않다. 특수한 유형의 관례를 넘어서 다분히 사회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부산물이라고 추론될 수 있다.
--- p.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