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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992쪽 | 1760g | 174*247*50mm
ISBN13 9791192486079
ISBN10 119248607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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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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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전통무예의 역사와 실기를 복원하기 위해 무인의 삶을 걸었다. 이를 위해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복원하여 2013년 8월 15일, 『본국검예 1. 조선세법』과 『본국검예 2. 본국검법』을 출간하고 쌍수도와 왜검류를 복원하여 2018년 12월 1일,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를 출간했다.

무예도보통지의 나머지 권법과 쌍검 창법의 복원을 위해, 한·중·일의 여러 고무예서를 비교 연구하던 중에 뜻하지 않게 잃어버린 우리의 고무예서를 찾게 되면서, 우리의 무예가 고조선-상나라-고구려-발해를 거쳐 전승된 사료를 찾았다는 기쁨보다는 우리의 슬픈 역사를 보게 되었다.

신화를 잃어버리면 역사도 잃어버린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종국에는 나라를 잃는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고토를 찾는다. 전통무예를 접하게 되면 누구나 자랑스러운 역사와 함께 잃어버린 역사와도 마주서게 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저자가 무예를 통해 바라본 우리의 역사는 학교에서 배웠던 역사와 많이 달랐다. 2020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에서 정세균 국무총리는 “식민사관이 만들어낸 신화적 관점을 극복하겠다.”라고 선언했지만, 이것이 실현되려면 많은 난관이 있을 것이다.

홍산문화와 사고전서 등을 연구하는 재야사학자들 덕분에 고조선이 실존의 역사임이 밝혀지고 있다. 요하문명권에 살던 동이족 일파가 건국했던 商(상)이 망하면서 箕子(기자)를 따라 유민들이 伯夷(백이)와 叔齊(숙제)가 있던 요하의 孤竹國(고죽국)으로 이동했다.

『隋書(수서)·唐書(당서)』와 宋(송)의 『삼국유사』에도 고조선과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있다. 중국 孫作雲(손작운)은 『산해경』을 동이의 「古書(고서)」로 규정하였고 『海內經(해내경)』을 아예 『朝鮮記(조선기)』라고 부른다. 중국 정사에 고조선은 은나라 이전에 북경(연변)에서 건국했다는 기록도 있고 사마천의 「조선열전」에도 “蠻夷(만이)의 세력이 옛 연과 제까지 미쳤다(朝鮮蠻夷及故燕).”는 기록과 역사가 왜곡되기 전의 『설문해자』에 “패수는 낙랑누방에서 나와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浿水出樂浪鏤方東入海(패수출낙랑루방동입해)”라는 명확한 기록이 있음에도 우리 강단의 사학자들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차고도 넘친다. 오늘날은 김부식과 일연이 볼 수 없었던 사료들을 볼 수 있다. 그 속에는 강단사학계가 그렇게 부정하는 고조선과 북부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도 당과 신라 관점에서 썼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이후, 세조·예 종·성종은 어명을 내려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 도증기·통천록·지화록』 등과 같은 고서를 민가에서 거두어들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시대에도 한민족의 고대 사료가 상당수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이 주권을 상실한 결과 조선총독부는 「尋常小學國史補充敎 材(심상소학국사보충교제)」를 통해 한반도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임나가 다스린 것으로 조작하여 소학교에서 가르쳤다. 일본 역사학자 세키노 타타시는 낙랑 유물을 평양에 묻고 한사군 평양설을 조작했지만, 사후 그의 일기장에서 조작에 사용하기 위해 낙랑 유물을 샀던 기록이 발견되면서 한사군이 평양에서 대륙으로 이제서야 이동하게 됐다.

해방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지금은 해방된 주권국이 아닌가? 일본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세 가지의 논리를 세웠다. 첫째 단군의 역사성 말살, 둘째 한사군의 한반도설, 셋째 임나-가야설이다. 이 역사 조작에 참여한 이병도와 신석호는 해방 후, 승승장구하여 역사학계의 태두가 되었고, 그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가르친 덕분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지 못한 결과 중국은 동북공정을 쉽게 완성했다. 언젠가 이 역사로 인해 중국이 북한을 점령할 명분으로 삼을 것이고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이 남한을 점령할 명분으로 삼을 것이 불 보듯 뻔하다.

고조선의 멸망에 따른 한민족의 이동, 북방민족의 분열과 중원정복이 오늘날 중 국의 역사다. 우리의 사료가 중원에 남아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마천은 漢(한) 건국 100년 후, 서기전 135년 한 무제가, 서로는 흉노를, 동으로는 고조선을 남으로는 월을 침략하여 중원의 강역을 넓힐 당시에 태어났다. 사마천은 한 무제 이전의 중화 3천 년 역사를 만들기 위해, 晉(진)부터 漢(한)까지의 계보가 필요했다. 그 당시에 三皇五帝(삼황오제)의 계보가 있지만, 사마천은 동이족인 태호 복희와 염제 신농을 삼황에서 뺐다.

치우와 싸운 같은 동이족인 황제 헌원을 중화의 시조로 만들기 위해, 황제를 계승했던 장남 소호 금천의 행적이 동이족임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에, 소호 금천을 빼고 차남 창의의 아들 재전욱(고양)이 황제를 계승한 것처럼 ‘황제-재전욱-제곡-제요-제순’으로 계보를 조작했다. 한술 더 떠서, 皇甫謐 (한보밀:215~282)은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 황제를 소호의 아들로 조작하여 부자 관계를 아예 바꿨다. 황제의 부인은 누조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두 자식이 동이족이면 재전욱도 당연히 동이족 아닌가!

중국은 동이의 역사를 숨길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동북공정이 완성된 자신감 때 문인지 최근 산동성 임기시 동이문화박물관에서 ‘태호복희·소호김천·치우·순임금’ 네 명을 동이의 영웅이라고 밝히고 큰 동상을 세웠다.

『사기』 권28 封禪書(봉선서)에 “진나라 제후 양공이 자신의 조상인 소호에게 제사를 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秦(진)이 동이족임을 명확하게 밝혔다.『사기』 조선열전에 ‘연나라 장수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투는 고조선의 고유문화라고 여러 기록에 있다. 실제 진시황의 병마용갱의 토용들은 上斗(상두)를 했다. 上斗(상두)는 북두칠성을 숭배한 동이족이 해오던 머리 형태다. 머리카락을 묶을 때도 앞으로 네 번, 뒤로 세 번 돌린 뒤에 網巾(망건) 끈으로 묶는다. 이것은 북두칠성 7의 수를 상징한다. 칠언율시의 시문도 마찬가지다. 홍산문화(B.C: 4800~2900)는 고조선 문명의 전 단계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서 상투 머리를 고정하는 ‘옥고’가 발견되었다. 옥고 중원 내륙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최소한 신석기시대부터도 상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투가 『무비문』과 『유구무비지』의 그림에서 발견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무비문』은 商(상)을 건국한 契(설)의 뒤를 이은 2대 왕 昭明(소명)이 남긴 冊(책)이니, 잃어버린 고조선의 무예가 부활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 문화를 꽃피워 400년을 이어온 漢(한)시조 劉邦(유방)은 어느 민족인가? 사마천도 「高祖?紀(고조본기)」에 유방을 화하족이라 기록하지 않았다. 高祖(고조) 유방은 중국 영역 밖에 있는 沛縣(패현) ?邑(풍읍) 中陽里(중양리) 사람이다. 성은 劉(유), 자는 季(계)다. 淮水(회수)와 泗水(사수)가 흐르는 淮夷族(회이족)이 살던 지역이다.

『사기』 「고조본기」에 “유방은 패현의 뜰에서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다.”라고 한 다. 武神(무신) 蚩尤天皇(치우천황)은 사마천도 인정한 동이족의 무신이다. 황제가 중화의 시조이고, 치우가 원수라면 치우에게 제사를 지냈겠는가?

고려 제25대(1287, 1290) 충렬왕도 두 차례 纛旗(둑기)에 제사를 지냈고,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뚝섬에 纛神祠(둑신사)를 세워 치우를 모셨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계사(1593년)·갑오(1594년)·을미(1595년)’에 纛祭(둑제)를 지냈고 「거영일기」에 병오(1606년) 경칩일에 둑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삼군수군통제영에서는 경칩과 상강일에 둑제를 올렸다.

한편, 장군들의 머리위에 쓰는 투구 위에는 작은 삼지창과 붉은 술이 붙어 있다. 이것은 치우기를 축소시킨 것으로 한민족이 치우의 후예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무신 치우와 함께 한다는 상징적 표현이다.

오죽하면 일본의 아고기요히코(吾鄕淸彦) 같은 양심적인 학자는 “史記(사기)는 고조선 역사를 뒤엎어 쓴 책”이라 평가하겠는가!

1300년 전, 해동성국으로 칭송받던 발해는 사료의 부족으로 여전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영토에서 세워진 황제의 나라다. 구당서에 “대조영은 본래 고려의 별종이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대조영은 고구려에 붙은 말갈족이다.”는 신당서를 가지고 중국은 말갈인이라 주장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 시중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 백제가 전성할 시기에 강병이 100만이었다. 고구려가 망한 후, 350만 고구려인은 그 땅에서 그대로 살았다. 이들이 발해를 건국하는 것은 당연하다. 과거 빈번했던 조공무역을 근거로 중국은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라 주장해왔다.

발해 무왕이 山東半島(산동반도)를 정복했는데, 발해가 중국의 속국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해는 스스로 靺鞨(말갈)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2004년 길림성 용두산에서 발굴된 발해 황후 묘비에 孝懿皇后(효의황후) 順穆皇后(수목황후)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왕비의 관도 고구려의 조우관과 같은 형식에 순목황후의 무덤도 고구려식 적석묘다. 皇后(황후)는 발해가 독자적인 皇帝(황제)의 나라라는 사료이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 왕후의 묘를 발굴하지 않고 한국 학자의 출입도 금하고 있다.

고구려인 설인귀는 당태종을 도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선두에 섰을 뿐만 아 니라, 고구려의 여러 무예서를 가져갔다. 그 속에 馬家?(마가창)도 있었다. 선대로부터 내려온 고조선의 무예서를 당나라가 가져간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척계광은 이런 무예서를 『기효신서』에 수집하여 정리했다.
전쟁터에서 병장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무예는 강한 군인을 양성하고 무예문화와 스포츠 무예로 변모해 가고 있다.

『기효신서』는 동양무예서를 대표한다. 기효신서를 집대성할 당시는 1584년이다. 척계광이 창안한 鴛鴦陣(원앙진)도 남방의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기존에 있었던 ‘狼?(낭선)·??(당파)·長槍(장창)·?牌(등패)’를 가지고 진법을 구성한 것뿐이다. 모원의 『武備志(무비지)』는 『기효신서』를 토대로 하고, 새로운 것을 수집하여 기록했다. 이때 조선세법도 기록하여 천우신조로 天符劍(천부검)이 남게 되었다. 고무예서는 무예의 동작에 이름을 붙이고 동작은 시로 구성하여 설명했다. 『기효신서』에 기록된 「권경」의 勢名(세명)과 詩文(시문)을 분석하여 문화의 시원과 기법을 해독했다.

또한, 상나라 昭明(소명)왕이 기록한 『武備門(무비문)』에서 잃어버린 고조선의 무예인 각종 무기류와 조선의 수박과 전장에서 사용된 호신유술의 사료인 『秘傳解法 (비전해법)』을 찾음으로써 대동류의 신라 삼랑설이 허구가 아님을 반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琉球武備志(유구무비지)』가 삼별초의 무예서임과 태껸의 술기와 같은 뿌리임을 밝혔다.

중국의 『紀效新書(기효신서)』에 의해 『武藝圖譜通志(무예도보통지)』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던 역사를 반전시키고, 반세기 넘도록 일본무도에 의해 숨통 막혔던 한국 무예의 독자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의 시원도 반전시켰다.

『기효신서』에 수록된 「권경 32세」는 중원에 전래됐던 맨손 무예를 수집한 문서다. 중국의 태극권을 비롯한 여타 무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에서 계승되었던 「권세」는 壬辰倭亂(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권경」 속에 있었던 「권법」에 통합됐다. 이런 사실도 모르고 「권경」은 중국무술이라 주장한다. 이런 탓에 『무예도 보통지』의 「권법」이 手搏(수박)과 택견의 뿌리라고 주장하면 이를 믿지 못하고, 자학 사관에 빠져 오히려 중화 무술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무인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다.

韓(한)·中(중)·日(일) 학자는 자국 무예의 주권과 무예 문화를 세워 세계에 알리 기 위해, 고문서를 연구하여 논문을 발표하고 있지만, 그들도 「권경」의 구성과 원문에 기록된 동작을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문서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명확한 동작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해독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동양 무예의 영역을 크게 보면, 중국은 ‘태극권·소림무술·영춘권’을 중심으로, 일본은 ‘大東流柔術(대동류유술)에서 파생된 合氣道(합기도)·柔道(유도)와 琉球國(유구국)에서 전해 내려온 空手道(공수도)’를 중심으로 세계에 보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무예를 내세워야 할까? 바로 『무예도보통지』다.

2017년 10월 북한이 무예도보통지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렸다. 맨손 무예의 뿌리를 무예도보통지에 두면 한국무예의 가치는 중국·일본과 비교할 수 없는 역사적 가치와 품격을 갖게 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은 미군정에 의해 학교의 무도교육이 전면 폐지되었다. 1950년에 와서야 유도를 시작으로 1958년 중학교는 유도·검도·스모, 고등학교는 유도와 검도가 擊技(격기)로 학교 체육 과목으로 부활한다. 2012년 4월 일본 문부과학성은 學習指導要領(학습지도요령)을 개정해서 “무도는 에도(江戶)시대부터 계승되어 온 일본 고유의 신체 활동문화이자 대인 운동이다.”라며 중등교육과정에 무도 교 육(유도·검도·스모)을 필수교과목으로 지정했다. 학습지도요령의 해설에는 “무도는 武器(무기)와 무술로부터 발생한 일본 고유의 문화”로 설명하고 1993년부터 무도를 정식명칭으로 학교 체육으로 출발했다.

일본은 정체성과 관련된 문화는 ‘道(도)’ 자로 개념화시켜 신도 사상을 넣었다. ‘무도·유도·합기도·검도·공수도·궁도·서도·다도’는 천왕 중심의 神道(신도)다. 아베 총리가 “요시다 쇼인 선생의 사상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라고 공언하는 것은 제국의 망령이 신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준비는 2006년 제1기 아베신조(安倍晋三) 내각 때부터 평화헌법 개정과 집단자위권을 골자로 하는 극우파의 정치개혁 목적으로 교육기본법을 전면 개정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야 마모토(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의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미래의 분란을 심어주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미래에 한반도와의 영토분쟁은 필연으로 다가올 것이다.

중국은 法(법) 자를 취하여 ‘서법·다법’이라 하고 1990년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武藝(무예)를 武術(무술)로 개념화했다. 한국은 일제가 이식한 ‘道(도)’자를 깊은 성찰 없이 수용한 결과 오늘날 독자적 정체성을 세우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해방 후 소전 손재형 선생이 눈치채고 1945년 해방공간으로부터 ‘藝(예)’ 자로 개념화하여 書道(서도)를 書藝(서예)로 남북이 공동으로 바꿔 사용했다. 그 결과 武道(무도)는 武藝(무예)로, 茶道(다도)는 茶藝(다예)로, 劍道(검도)는 劍藝(검예)로, 弓道(궁도)는 射藝(사예)로 점차 바꿔가고 있다.

이처럼 글자 하나가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개념은 또 다른 형태의 문화영토다. 한국무예계도 외래 무도 명을 버리지 못하면 자주적 개념독립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무예가 국가의 비밀이고, 가문의 비전인 시대는 지났다. 무예에서 정체성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는가? 무예 인문학 시대가 도래했다. 중국의 무술, 일본의 무도와 차별된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개념이 바로 ‘무예’다. 무예 속에 역사와 정체성이 있어야만 술기 속에 인문학을 담을 수 있고 혼을 담을 수 있다. 고조선의 무예를 계승하면 우리 무예의 역사는 잃어버린 고조선과 연결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무예는 중국과 일제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된다.

전통무예진흥법이 2008년 3월 28일 제정된 지 14년이 흘렀지만, 오래전에 정착한 일본무도가 한국무예 종목의 대부분을 차지한 상태다. 고사 직전에 있는 전통무예는 길거리 공연문화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정부 시책은 보여주기식 행정에 머물고 오히려 외래무예를 지원 육성하고 있다. 대학교에 일본무도 학과는 있어도 전통무예 학과는 단 한 개도 없다. 일본을 반면교사로, 우리도 초·중·고등학교에서 체육 과목에 전통무예가 포함되도록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환인 배달국을 이어온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존속할지 장담할 수 없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국가로 전락했듯이, 국론이 분열되면 언제든지 나라는 망할 수 있다. 반대 로 우리가 올바른 역사관과 정체성을 지키면 언젠가는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할 수 있다.

역사는 기록자의 관점에서 쓴다. 중국은 패권사관과 영토사관으로 중국 내에서 발생한 사건은 모두 중국의 역사로 쓴다. 식민사관으로 쓴 역사를 배운 결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체성과 민족혼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써야 할 것인가? 바로 문화사관이다. 『桓檀古記(환단고기)』를 가지고 고조선과 단군 역사를 말하면 환빠라고 멸시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들의 끊임없는 노력 덕분에 점차 잃어버린 우리의 역사를 되찾아가고 있다. 언젠가 우리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잃어버린 역사를 바로 세울 것이라 믿는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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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총재와의 인연은 대략 90년대 중반쯤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그 당시에는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로서 한국검도를 수련하고 도장도 운영했다. 나는 (주)상보를 경영하는 사업가로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한국 전통검의 맥을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 공헌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2011년 어느 날, 머리도 길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른 임총재가 본국검예의 초고를 가지고 왔다. 그때 잘 몰랐던 한국무예계 전반의 역사에 대해 듣게 되었고, 왜 임총재가 잘해오던 사업을 접고, 무예도보통지의 연구에 매달렸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임총재가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닌데,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며 걱정을 했었다. 두툼한 원고를 보고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복원하기 위해 그간 많은 시간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노력의 성과가 담겨있음을 알았다.

여려 출판사를 찾아다녔으나 이런 책은 경제성이 없어 출판을 거절당했는데, 행복 출판사 권선복 사장께서 원고의 내용을 보고 손실을 감내하더라도 출판을 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본국검예 1.2.』의 출판에 보탬이 되도록 후원에 동참했다.

그리고 2021년 2월 2일에 이번에는 『본국무예』의 원고를 들고 찾아왔다.
알고 보니, 2019년에 『본국검예 3』을 또 출판하였고, 이번 『본국무예』는 4권 째라 한다. 임총재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고 집필한 세월이 20년 가까이 흘렀으리라 생각된다.

임총재는 이제 나이도 있고 여러 사정상 더 이상 무예를 연구하기 어렵다. 이것이 마지막 무예서라는 말을 듣고 난, 첫 출판의 후원을 내가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냐며 그간의 노고에 다소나마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긴 세월은 주마등처럼 흘렀지만 임총재는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걸어 한국무예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잃어버린 전통무예의 혼을 찾겠다는 사명감으로 고집스럽게 묵묵히 외길을 걸어 온 임총재의 모습을 오랜 기간 옆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숭고한 사명의 길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무예계의 현실을 들어보면, 정부의 지원도 없고, 학계에서도 전통무예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현실에서 이러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 연구할 부분이 많지만 경제적 여건과 노후를 생각하면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이번 『본국무예』가 잃어버린 한국무예의 역사와 정체성을 밝히는 큰 등불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무예의 맥을 이어가는 모든 분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시기를 희망해봅니다.

그간 임성묵 총재의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묵묵하게 지켜주신 가족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김상근 (상보 대표이사 회장)
임성묵 본국무예총재가 필생의 역자 『본국무예』를 펴낸다고 하니 괜히 내가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10여 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국문화의 독립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무예 쪽에서 그 일을 맡은 인물이 나타났으면 하는 기대감 속에서 세계일보 ‘박정진의 무맥’ 연재를 마쳤다(2009년 2월 10일 ‘영원히 사라질 뻔한 무경’을 시작으로, 2010년 11월 29일 ‘무예인류학으로 본 무예’를 끝으로 43회 연재했다).

아마 무맥 연재를 마치고 1년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드디어 임성묵이라는 무예인이 인편을 통해 나에게 나타났다. 그와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무예동작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와 대화상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스승이란 무엇일까. 스승이란 인생에서 길을 함께 가는 도반(道伴)이며, 제자가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 이 순간부터 그에게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과오이다.

나는 그에게서 종종 나를 발견한다. 나는 최근 신(神)의 문제를 인생의 마지막 숙제로 안고 있다. 신은 신을 위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왔다는 사실에 도달했다. 인간은 신을 설정해놓고, 스스로를 도모하고 다스려가는 존재이다. 신과 인간과 자연은 결국 천지인으로 삼위일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무예인에게 혼(魂)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무예이다. 신불도(神佛道)는 하나이다.

필자가 처음 무맥 시리즈를 기획하고 세계일보에 연재하면서 내심 기대한 것은 기존의 각종 무예와 그 무예의 전통과 맥, 계보(系譜)를 탐색해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이러한 무예문화복원 운동을 통해 『무예도보통지』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복원해 낼 수 있는, ‘어느 눈 밝은 인물’을 만날 인연을 기대했다. 그가 바로 임성묵이다.

임성묵 총재는 그동안 『본국검예』(1.조선세법, 2.본국검법)를 비롯하여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 그리고 이번에 『본국무예』까지 총 4권의 무예서를 출판했다. 전통무예복원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수도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통무예를 복원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같은 책을 보고도 각기 다른 동작으로 복원되는 이유는, 기존에 배운 무예의 선입관의 영향과 한자와 그림에 대한 깊은 이해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개가 평면의 2차원적 사고에 머물렀다면 임 총재는 입체적 3차원적 사고로 접근했다.

임성묵 총재는 집요할 만큼 한·중·일 무예서를 탐독하여 수련하면서, 모든 무예 종목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무예 종목들이 실제는 하나로 연결된 무예 체계로 구성됐다는 것을 찾아낸 것은 무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다. 『본국무예』는 20여 년간 한·중·일 무예서를 연구해 오면서 완숙의 경지에서 쓴 역작 중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임총재의 『본국무예』는 옛 무예서가 단순한 술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당시 신화와 의례를 비롯해서 세계관이 압축된 문화복합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인(文人)이 자연과 인간의 보편적인 법칙을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다면, 무인(武人)은 기운생동을 몸으로 깨닫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무예를 복원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자에서 동사를 중심으로 동작을 찾는 일이다. 최초의 무예서는 갑골문과 금문으로 죽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옛 무예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갑골문과 금문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 잃어버린 상고시대의 정신문화를 찾기 위해서는 임 총재와 같은 새로운 접근방식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고대는 천문과 신화의 상징체계의 세계였다. 조선세법은 66세로 이름이 천부검(天符劍)이었고, 본국검은 33세로 본(?) 자 형태로 구성됐다. 본국검의 ? 자에서 십(十) 자는 북두칠성을, 대(大) 자는 천부경에 기록된 본심본태양(?心?太陽)의 태양으로 천부검과 본국검은 한민족이 경전인 천부경을 검(劍)을 통해 몸으로 구현한 것이다. 천부검과 본국검은 한민족의 신화와 철학 종교 천문을 담은 것으로 무예서의 가치를 인문학적 가치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잃어버린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낸 것으로써 무예의 술기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이런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예의 최고봉에 올라서야 할 뿐만 아니라, 무예서에 감춰진 문화적 의미와 역사를 통섭하지 못하면 절대 찾아낼 수 없다.

무예동작의 의미는 검결(劍訣)에 담겨있다. 그 이름과 동작은 그 당시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는다. 상고시대는 문무가 분리된 시대가 아니었다. 임총재는 갑골문으로 된 능은본(農隱?)의 천부경天符經)을 무예를 연구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또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가림토(加臨土)와 창힐(倉?, BC 4666~4596년)문자를 해독하여 창힐문자의 내용이 견우와 직녀의 신화로서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운행한 것을 기록한 것임을 밝혀낸 것은 문자학적(文字學的)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가림토와 갑골문이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고 만들었다는 문자의 제자원리를 발견한 것은, 그간 북두칠성과 샤머니즘 문화의 복원을 주력해 온 나로서도 매우 놀라운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무예를 연구하면서 크게 의문을 품은 점은 ‘권법과 무예의 상관관계’이다. 또 인류역사상 세계최대의 대제국인 몽골과 싸운 “삼별초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해결해주었다. 권법은 무기를 들지 않은 수련동작으로서 무예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별초는 오키나와(琉球)로 들어갔으며, 소위 오늘날 당수도, 공수도라는 이름으로 일제 때 들어온 무예는 그 옛날 오키나와로 들어간 삼별초의 맨손무술의 역전수라는 사실이다.

사실 1560년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는 기존 무예서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임 총재는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새보전서(賽寶全書)』라는 문헌 속에 「권세(拳勢)」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 문헌을 찾기 위해 국내외를 탐색하는 과정 에서 마침내 중국에서 『만용정종(萬用正宗)』 속에 기록된 『무비문(武備門)』이 『새보 전서』와 관련된 문서임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책 『萬寶全書(만보전서)』에서도 「무 비문」과 동일한 기록을 찾았다.

『무비문』은 상나라(BC,1600?~1046?) 2대 소명(昭明) 왕(王)이 제작한 것으로 동이족에게 전래되었지만, 역사의 질곡으로 잃어버렸던 것을 『만용정종(萬用正宗)』 에 기록한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고조선 이래 잃어버린 한민족의 무예서를 찾는 쾌거를 이뤘다. 그 속에서 설인귀가 탈취한 고구려의 마가창법이 「소림곤법」과 연결된 것과 「창법」과 「곤법」이 동시대에 만들어진 하나로 연결된 문서임을 증명함으로써,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되지 않은 우리의 「곤법」을 되찾았고, 「사예(射藝)」의 역사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무비문』 속에 기록된 「비전해법(秘 傳?法)」이 대동류합기유술의 「비전목록(秘傳目錄)」과 연결된 것임을 문헌적으로 밝힘으로써 한국합기도가 일본의 아류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료적 전기를 만들었다. 또한 오키나와(琉球國)의 『유구무비지(琉球武備志)』가 삼별초의 무예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무비문』과도 연결되어 있음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임 총 재는 『무예도보통지』의 「권법」 실기를 복원해냈을 뿐만 아니라, 송덕희 옹의 태껸이 「권법」과 『유구무비지』와 열결된 고리를 찾아냄으로써 잃어버린 맨손 무예의 역사적 근거를 찾는 쾌거를 이뤘다.

이것은 한·중·일의 동양무예사를 새로 쓸 만큼, 한국무예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간 학계의 많은 학자가 해내지 못한 엄청난 일을 척박한 환경에서 혼자 해냈다.

이처럼 『본국무예』는 단순한 무예서가 아니다. 『본국무예』는 그동안 중국무술과 일본무도에 의해 숨통 막혀왔던 한국무예를 해방시키고 오히려 중국과 일본무도의 숨통을 잡는 쾌거를 남긴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쉽지 않은 그긴 세월을, 학자들도 가기 힘든 일을 임 총재는 묵묵히 걸어왔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해 마지않는다. 끝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된 작업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았을 부인 노영희 여사님께도 공의 반을 치하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완성된 인간을 말할 때 문무겸전(文武兼全)을 말한다. 문(文)과 무(武)가 합쳐져야 빛난다고 하여 ‘빈(斌)’ 자가 만들어졌다. 문화는 언제나 문무균형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민족은 무(武)를 천시하고, 무를 문화의 적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조 선비들의 문약(文弱)과 위선(僞善)이 가장 한몫했다. 반대로 오늘날 무인들은 문(文)을 멀리하고 있다. 문무겸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한국이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박정진 (통일동산 寓居에서 心中)
『본국무예』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통무예는 반만년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화이다. “문화를 잃은 것은 민족의 혼을 잃은 것이요, 민족의 혼을 잃은 것은 나라를 잃은 것과 같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전통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전통무예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전통무예를 전통문화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다. 전통무예는 국난(國難)의 현장에서 외침을 받을 때마다 나라를 수호하고 민족을 결속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전통무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란(戰亂)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예 관련 자료들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전통무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나마 1790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무인 백동수가 군사훈련을 위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가 남아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2008년부터 전통무예진흥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우리의 전통무예는 중국무술과 일본무도, 서양스포츠에 가려져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무예』 발간은 후대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학계는 물론 무예계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전통무예를 연구하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학자들도 못 하는 일을 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싶다. 아울러 정부 역시 우리 역사와 전통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야 한다.

『본국무예』를 편찬한 임성묵 총재는 『무예도보통지』 외에도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들어있는 『새보전서』를 연구하여 마침내 중국에서 『무비문』을 찾아내어 대동류의 신라 삼랑원의광설에 대해 사료를 통해 입증했고, 오키나와의 『유구무비지』가 삼별초가 전래시킨 권법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동안 임 총재는 한·중·일 무예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많은 역사서를 연구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통무예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마음이 짠했다.

무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라진 전통무예를 복원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어 둠을 밝힐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에 있겠나 싶다. 임 총재가 찾아낸 『무비문』에는 창, 곤, 파, 권, 사, 기사 등 여러 종류의 무예는 물론 대동유술의 기법을 기록한 「비전해법」과 태견의 동작까지 있다. 그 속에 그려있는 무인은 상투를 한 조선 사람으로 한국 무예사에 소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고서들은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기법을 시로 표현하여 일반인이 연구하기란 매우 힘든 부문이다.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찾아냈다는 것만 보아도 임 총재의 무예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임성묵 총재는 그동안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기 위해 『기효신서』, 『무비지』 비교 분석하여 『본국검예 1, 조선세법』과 『본국검예 2, 본국검법』 그리고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 등의 무예서를 편찬해왔다. 이번에 출간한 4번째 무예서 『본국무예』는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권법을 중심으로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기법들을 총정리한 것이어서 그 가치가 더욱더 소중하다. 무려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 직접 시연하면서 집필했으니 말이다.

특히 『본국무예』가 발간된 것도 큰 성과이지만, 선조들이 물려준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여, 후대에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별히 이번에 출간한 『본국무예』는 훗날 무예문화 창달은 물론 무예의 역사서로서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문무합빈(文武合斌)으로 무예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게 할 것이 분명하다. 임성묵 총재의 이번 출판에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 최종표 (무예신문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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