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총재와의 인연은 대략 90년대 중반쯤으로 어렴풋이 기억된다.
그 당시에는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로서 한국검도를 수련하고 도장도 운영했다. 나는 (주)상보를 경영하는 사업가로서, 일제에 의해 말살된 한국 전통검의 맥을 살려야 한다는 사회적 공헌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2011년 어느 날, 머리도 길고 수염도 덥수룩하게 기른 임총재가 본국검예의 초고를 가지고 왔다. 그때 잘 몰랐던 한국무예계 전반의 역사에 대해 듣게 되었고, 왜 임총재가 잘해오던 사업을 접고, 무예도보통지의 연구에 매달렸는지 이해하게 됐다. 그러면서도 임총재가 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닌데, 어쩌나! 하는 염려를 하며 걱정을 했었다. 두툼한 원고를 보고 조선세법과 본국검을 복원하기 위해 그간 많은 시간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노력의 성과가 담겨있음을 알았다.
여려 출판사를 찾아다녔으나 이런 책은 경제성이 없어 출판을 거절당했는데, 행복 출판사 권선복 사장께서 원고의 내용을 보고 손실을 감내하더라도 출판을 해주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본국검예 1.2.』의 출판에 보탬이 되도록 후원에 동참했다.
그리고 2021년 2월 2일에 이번에는 『본국무예』의 원고를 들고 찾아왔다.
알고 보니, 2019년에 『본국검예 3』을 또 출판하였고, 이번 『본국무예』는 4권 째라 한다. 임총재가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고 집필한 세월이 20년 가까이 흘렀으리라 생각된다.
임총재는 이제 나이도 있고 여러 사정상 더 이상 무예를 연구하기 어렵다. 이것이 마지막 무예서라는 말을 듣고 난, 첫 출판의 후원을 내가 시작했으니, 마지막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냐며 그간의 노고에 다소나마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긴 세월은 주마등처럼 흘렀지만 임총재는 흔들림 없이 외길을 걸어 한국무예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잃어버린 전통무예의 혼을 찾겠다는 사명감으로 고집스럽게 묵묵히 외길을 걸어 온 임총재의 모습을 오랜 기간 옆에서 지켜본 나로서는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숭고한 사명의 길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한국무예계의 현실을 들어보면, 정부의 지원도 없고, 학계에서도 전통무예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현실에서 이러한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 연구할 부분이 많지만 경제적 여건과 노후를 생각하면 이쯤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복잡한 심정이 들었다.
이번 『본국무예』가 잃어버린 한국무예의 역사와 정체성을 밝히는 큰 등불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무예의 맥을 이어가는 모든 분들에게도 큰 힘이 되어주시기를 희망해봅니다.
그간 임성묵 총재의 노고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묵묵하게 지켜주신 가족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김상근 (상보 대표이사 회장)
임성묵 본국무예총재가 필생의 역자 『본국무예』를 펴낸다고 하니 괜히 내가 가슴이 설렌다. 그리고 10여 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국문화의 독립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무예 쪽에서 그 일을 맡은 인물이 나타났으면 하는 기대감 속에서 세계일보 ‘박정진의 무맥’ 연재를 마쳤다(2009년 2월 10일 ‘영원히 사라질 뻔한 무경’을 시작으로, 2010년 11월 29일 ‘무예인류학으로 본 무예’를 끝으로 43회 연재했다).
아마 무맥 연재를 마치고 1년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드디어 임성묵이라는 무예인이 인편을 통해 나에게 나타났다. 그와의 인연은 그때부터였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무예동작을 가르친 적이 없다. 그와 대화상대가 되었을 뿐이다. 그는 그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스승이란 무엇일까. 스승이란 인생에서 길을 함께 가는 도반(道伴)이며, 제자가 스스로의 길을 가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오늘 이 순간부터 그에게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나의 과오이다.
나는 그에게서 종종 나를 발견한다. 나는 최근 신(神)의 문제를 인생의 마지막 숙제로 안고 있다. 신은 신을 위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존재해왔다는 사실에 도달했다. 인간은 신을 설정해놓고, 스스로를 도모하고 다스려가는 존재이다. 신과 인간과 자연은 결국 천지인으로 삼위일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무예인에게 혼(魂)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무예이다. 신불도(神佛道)는 하나이다.
필자가 처음 무맥 시리즈를 기획하고 세계일보에 연재하면서 내심 기대한 것은 기존의 각종 무예와 그 무예의 전통과 맥, 계보(系譜)를 탐색해보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이러한 무예문화복원 운동을 통해 『무예도보통지』를 완벽하게 해석하고 복원해 낼 수 있는, ‘어느 눈 밝은 인물’을 만날 인연을 기대했다. 그가 바로 임성묵이다.
임성묵 총재는 그동안 『본국검예』(1.조선세법, 2.본국검법)를 비롯하여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 그리고 이번에 『본국무예』까지 총 4권의 무예서를 출판했다. 전통무예복원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수도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전통무예를 복원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같은 책을 보고도 각기 다른 동작으로 복원되는 이유는, 기존에 배운 무예의 선입관의 영향과 한자와 그림에 대한 깊은 이해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대개가 평면의 2차원적 사고에 머물렀다면 임 총재는 입체적 3차원적 사고로 접근했다.
임성묵 총재는 집요할 만큼 한·중·일 무예서를 탐독하여 수련하면서, 모든 무예 종목 간의 연결고리를 찾아냈다.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무예 종목들이 실제는 하나로 연결된 무예 체계로 구성됐다는 것을 찾아낸 것은 무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다. 『본국무예』는 20여 년간 한·중·일 무예서를 연구해 오면서 완숙의 경지에서 쓴 역작 중의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임총재의 『본국무예』는 옛 무예서가 단순한 술기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당시 신화와 의례를 비롯해서 세계관이 압축된 문화복합이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인(文人)이 자연과 인간의 보편적인 법칙을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기록한다면, 무인(武人)은 기운생동을 몸으로 깨닫고 기록한다. 그러므로 무예를 복원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한자에서 동사를 중심으로 동작을 찾는 일이다. 최초의 무예서는 갑골문과 금문으로 죽간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옛 무예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는 갑골문과 금문 중심으로 연구해야 한다. 잃어버린 상고시대의 정신문화를 찾기 위해서는 임 총재와 같은 새로운 접근방식의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고대는 천문과 신화의 상징체계의 세계였다. 조선세법은 66세로 이름이 천부검(天符劍)이었고, 본국검은 33세로 본(?) 자 형태로 구성됐다. 본국검의 ? 자에서 십(十) 자는 북두칠성을, 대(大) 자는 천부경에 기록된 본심본태양(?心?太陽)의 태양으로 천부검과 본국검은 한민족이 경전인 천부경을 검(劍)을 통해 몸으로 구현한 것이다. 천부검과 본국검은 한민족의 신화와 철학 종교 천문을 담은 것으로 무예서의 가치를 인문학적 가치로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은 잃어버린 문화적 정체성을 찾아낸 것으로써 무예의 술기 그 자체보다도 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이런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무예의 최고봉에 올라서야 할 뿐만 아니라, 무예서에 감춰진 문화적 의미와 역사를 통섭하지 못하면 절대 찾아낼 수 없다.
무예동작의 의미는 검결(劍訣)에 담겨있다. 그 이름과 동작은 그 당시의 문화와 정체성을 담는다. 상고시대는 문무가 분리된 시대가 아니었다. 임총재는 갑골문으로 된 능은본(農隱?)의 천부경天符經)을 무예를 연구했던 방식으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었다. 또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가림토(加臨土)와 창힐(倉?, BC 4666~4596년)문자를 해독하여 창힐문자의 내용이 견우와 직녀의 신화로서 은하수와 북두칠성의 운행한 것을 기록한 것임을 밝혀낸 것은 문자학적(文字學的)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가림토와 갑골문이 북두칠성의 운행을 보고 만들었다는 문자의 제자원리를 발견한 것은, 그간 북두칠성과 샤머니즘 문화의 복원을 주력해 온 나로서도 매우 놀라운 성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무예를 연구하면서 크게 의문을 품은 점은 ‘권법과 무예의 상관관계’이다. 또 인류역사상 세계최대의 대제국인 몽골과 싸운 “삼별초는 어디로 갔는가.”라는 점이었다. 그는 이 두 가지를 해결해주었다. 권법은 무기를 들지 않은 수련동작으로서 무예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별초는 오키나와(琉球)로 들어갔으며, 소위 오늘날 당수도, 공수도라는 이름으로 일제 때 들어온 무예는 그 옛날 오키나와로 들어간 삼별초의 맨손무술의 역전수라는 사실이다.
사실 1560년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는 기존 무예서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임 총재는 『무예제보번역속집』에서 『새보전서(賽寶全書)』라는 문헌 속에 「권세(拳勢)」가 기록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 문헌을 찾기 위해 국내외를 탐색하는 과정 에서 마침내 중국에서 『만용정종(萬用正宗)』 속에 기록된 『무비문(武備門)』이 『새보 전서』와 관련된 문서임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책 『萬寶全書(만보전서)』에서도 「무 비문」과 동일한 기록을 찾았다.
『무비문』은 상나라(BC,1600?~1046?) 2대 소명(昭明) 왕(王)이 제작한 것으로 동이족에게 전래되었지만, 역사의 질곡으로 잃어버렸던 것을 『만용정종(萬用正宗)』 에 기록한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고조선 이래 잃어버린 한민족의 무예서를 찾는 쾌거를 이뤘다. 그 속에서 설인귀가 탈취한 고구려의 마가창법이 「소림곤법」과 연결된 것과 「창법」과 「곤법」이 동시대에 만들어진 하나로 연결된 문서임을 증명함으로써,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되지 않은 우리의 「곤법」을 되찾았고, 「사예(射藝)」의 역사도 새롭게 연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무비문』 속에 기록된 「비전해법(秘 傳?法)」이 대동류합기유술의 「비전목록(秘傳目錄)」과 연결된 것임을 문헌적으로 밝힘으로써 한국합기도가 일본의 아류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료적 전기를 만들었다. 또한 오키나와(琉球國)의 『유구무비지(琉球武備志)』가 삼별초의 무예서와 깊은 관련이 있고 『무비문』과도 연결되어 있음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임 총 재는 『무예도보통지』의 「권법」 실기를 복원해냈을 뿐만 아니라, 송덕희 옹의 태껸이 「권법」과 『유구무비지』와 열결된 고리를 찾아냄으로써 잃어버린 맨손 무예의 역사적 근거를 찾는 쾌거를 이뤘다.
이것은 한·중·일의 동양무예사를 새로 쓸 만큼, 한국무예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간 학계의 많은 학자가 해내지 못한 엄청난 일을 척박한 환경에서 혼자 해냈다.
이처럼 『본국무예』는 단순한 무예서가 아니다. 『본국무예』는 그동안 중국무술과 일본무도에 의해 숨통 막혀왔던 한국무예를 해방시키고 오히려 중국과 일본무도의 숨통을 잡는 쾌거를 남긴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참으로 쉽지 않은 그긴 세월을, 학자들도 가기 힘든 일을 임 총재는 묵묵히 걸어왔다. 그간의 노고를 치하해 마지않는다. 끝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된 작업을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았을 부인 노영희 여사님께도 공의 반을 치하하고 싶다.
우리는 흔히 완성된 인간을 말할 때 문무겸전(文武兼全)을 말한다. 문(文)과 무(武)가 합쳐져야 빛난다고 하여 ‘빈(斌)’ 자가 만들어졌다. 문화는 언제나 문무균형을 이상적인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민족은 무(武)를 천시하고, 무를 문화의 적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된 데는 무엇보다도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조 선비들의 문약(文弱)과 위선(僞善)이 가장 한몫했다. 반대로 오늘날 무인들은 문(文)을 멀리하고 있다. 문무겸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직도 한국이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이다.
- 박정진 (통일동산 寓居에서 心中)
『본국무예』 발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전통무예는 반만년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한민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문화이다. “문화를 잃은 것은 민족의 혼을 잃은 것이요, 민족의 혼을 잃은 것은 나라를 잃은 것과 같다”란 말이 있지 않은가.
전통문화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 전통무예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전통무예를 전통문화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다. 전통무예는 국난(國難)의 현장에서 외침을 받을 때마다 나라를 수호하고 민족을 결속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전통무예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전란(戰亂)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무예 관련 자료들이 소실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전통무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나마 1790년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검서관인 실학자 이덕무와 박제가 그리고 무인 백동수가 군사훈련을 위해 편찬한 『무예도보통지』가 남아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다.
2008년부터 전통무예진흥법이 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우리의 전통무예는 중국무술과 일본무도, 서양스포츠에 가려져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국무예』 발간은 후대를 위한 기록이기도 하지만, 학계는 물론 무예계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기도 하다.
전통무예를 연구하는 일을 전업으로 하는 학자들도 못 하는 일을 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부끄러울까 싶다. 아울러 정부 역시 우리 역사와 전통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하루빨리 생각을 바꿔야 한다.
『본국무예』를 편찬한 임성묵 총재는 『무예도보통지』 외에도 『무예제보번역속집』에 들어있는 『새보전서』를 연구하여 마침내 중국에서 『무비문』을 찾아내어 대동류의 신라 삼랑원의광설에 대해 사료를 통해 입증했고, 오키나와의 『유구무비지』가 삼별초가 전래시킨 권법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그동안 임 총재는 한·중·일 무예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많은 역사서를 연구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통무예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지켜본 나는 마음이 짠했다.
무예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라진 전통무예를 복원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 어 둠을 밝힐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에 있겠나 싶다. 임 총재가 찾아낸 『무비문』에는 창, 곤, 파, 권, 사, 기사 등 여러 종류의 무예는 물론 대동유술의 기법을 기록한 「비전해법」과 태견의 동작까지 있다. 그 속에 그려있는 무인은 상투를 한 조선 사람으로 한국 무예사에 소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다.
이러한 고서들은 이두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기법을 시로 표현하여 일반인이 연구하기란 매우 힘든 부문이다. 이런 것들을 연구하고, 찾아냈다는 것만 보아도 임 총재의 무예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임성묵 총재는 그동안 『무예도보통지』를 연구하기 위해 『기효신서』, 『무비지』 비교 분석하여 『본국검예 1, 조선세법』과 『본국검예 2, 본국검법』 그리고 『본국검예 3, 왜검의 시원은 조선이다』 등의 무예서를 편찬해왔다. 이번에 출간한 4번째 무예서 『본국무예』는 『무예도보통지』에 기록된 권법을 중심으로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기법들을 총정리한 것이어서 그 가치가 더욱더 소중하다. 무려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을 선조들의 흔적을 찾아 직접 시연하면서 집필했으니 말이다.
특히 『본국무예』가 발간된 것도 큰 성과이지만, 선조들이 물려준 비밀을 풀 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여, 후대에 그 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특별히 이번에 출간한 『본국무예』는 훗날 무예문화 창달은 물론 무예의 역사서로서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문무합빈(文武合斌)으로 무예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우게 할 것이 분명하다. 임성묵 총재의 이번 출판에 아낌없는 격려와 성원을 보낸다.
- 최종표 (무예신문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