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이자 유목민인 튀르크인들은 기후 변화, 인구 증가, 식량 부족, 지정학적 권력 경쟁 등으로 기원전 1700년대부터 최초의 거주지를 떠나 알타이산맥과 톈산산맥이 연결되는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3,500년 동안 튀르크인들은 유라시아에 걸쳐 있는 초원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에, 튀르크인들의 문화는 초원 유목문화가 바탕이 되었다
--- p.22
오스만 가지는 1299년 쇠위트에서 독립국가를 선언했다. 작은 변경 마을 ‘쇠위트’는 오스만 제국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 되었고, 이후 오스만 가지는 비잔티움 영토에 대한 정복사업을 수행했다
--- p.54
바예지드 군대는 1396년 9월 25일 불가리아의 ‘니코폴리스’에서 10만 명이 넘는 유럽 연합 세력 군대와 맞붙게 되었다. 중세의 마지막에 일어난 십자군 전쟁인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바예지드 1세는 대규모 유럽 연합 세력에 맞서 승리하였다. 이 전투 승리로 불가리아는 완전히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집트에 있는 이슬람 세계 종교 지도자인 칼리프는 바예지드 1세에게 ‘룸 세계의 술탄’(유럽 세계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 p.64~65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에 도시 이름은 이스탄불로 개명되었다.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전략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정복하기만 하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두 개 대륙의 지배자이며, 두 개 해양의 지배자’라고 칭했다. 두 개 대륙은 유럽과 아시아를 말하고, 두 개 해양은 흑해와 지중해를 말하는 것이었다. 메흐메드는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된 이슬람교도 전사이자 군주였다.
--- p.91
쉴레이만이 남긴 불멸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해 역사가들은 16세기를 ‘터키인의 시대’, 또는 ‘쉴레이만의 시대’라고 부른다. 서양 세계는 그에게 ‘장엄한 술탄 쉴레이만The Magnificent Suleyman’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이슬람 세계는 ‘카누니 술탄 쉴레이만Kanuni Sultan Suleyman’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 p.144~145
셀림 1세는 1514년 찰드란 원정 때 타브리즈에서 책 제본가, 서예가, 금박공예가, 화가 등을 이스탄불로 데려왔다. 맘루크 원정 때인 1516~17년에는 1백여 명이 넘는 장인과 그 가족들이 이스탄불로 이주했다. 셀림 1세가 페르시아의 예술가들을 궁전에 데려온 것은 오스만 제국의 예술 발전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 p.163
유럽의 엄청난 변화 속에 오스만 제국은 세계 경제체제에 통합되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해양기술 발달로 대항해 시대를 맞아 유럽인들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무역을 하게 되었는데, 오스만 제국에는 이것이 불운이자 재앙이었다. 16세기 이전만 해도 오스만 제국은 향신료 판매 거점이었다. 아시아산 향신료가 지중해를 지나 이집트나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오스만 제국에 들어왔고, 중국과 연결된 실크로드도 오스만 제국과 연결되는 향신료 판매로였다. 사실상 세계무역을 독점했던 오스만 제국은 그 자리를 유럽인들에게 내주어야 했다.
--- p.182
이브라힘 술탄의 8년 재위는 국정 운영 면에서 한마디로 참사 그 자체였다. 바로 이전인 무라드 4세의 철권통치가 사라지면서 국정은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이브라힘 술탄은 심각한 신경쇠약 증상에 의한 이상 행동으로 ‘미친(델리)’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카페스에서 나와 술탄이 되었으나 괴이한 행동으로 ‘미친 술탄’이라는 별명을 얻은 무스타파 1세(15대)와 비슷했다.
--- p.206
오스만 제국의 빈 원정 실패 이후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은 정리되었지만, 중부 유럽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패권은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카를로비츠 조약은 오스만 제국이 상대국과 유럽식 외교방식인 협상을 통해 조약문을 작성하고 체결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 p.223
18세기 유럽은 봉건 영주들의 힘이 약해지고 국왕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중앙집권의 절대왕정 시대가 되었다. 세기 내내 유럽 국가들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자국의 이익에 따라 동맹을 구성하고 허물며 세력 균형의 전략적 선택만을 추구하였다. 오스트리아·러시아·영국·프로이센·프랑스 등 유럽의 5대 열강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다한다는 마키아벨리적 정치철학을 가지고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외교를 전개했다.
--- p.233
1718년부터 1730년까지 12년간 지속한 평화의 시기, 즉 ‘튤립 시대Tulip Age’가 열렸다. 튤립 시대는 정치와 경제가 이전과 비교하여 안정된 시기로 서양의 기술, 소비문화, 사회생활 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오스만 제국 수도를 세련미의 절정에 달하게 하였다. 아흐메드 3세는 카누니 술탄 쉴레이만 이후 150여 년 만에 나타난 견문이 넓고 교양이 넘치는 군주였다.
--- p.240
서유럽에서 오스만튀르크 문화에 관한 관심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이국적인 터키 문화와 풍물을 소비하고 모방하려는 열풍은 18세기에 프랑스 상류층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경향미술에서 발현된 터키풍(튀르크리)은 서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서유럽에서 동양에 대한 환상으로 터키 문화가 유행한 경향을 ‘튀르크리Turquerie’(터키풍)라고 불렀다.
--- p.278~279
1860년대 중반부터 몽테스키외, 루소 같은 계몽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신지식인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지식인 중에는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프랑스 문화와 언어를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특히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워 선교사들과 접촉한 터키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새롭게 등장한 지식인들은 구체제의 변화를 모색하려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들로 주로 문학가, 관료, 학자, 군인 등 청년 터키인Young Turks들이었다.
--- p.321
새롭게 탄생하는 터키 공화국은 과거에 비교해 영토가 대폭 축소되었지만, 유럽의 열강으로부터 행정, 재정, 정치적인 통제를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국가로 태어났다.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