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유토피아나, 위대한 사회를 살기에 걸맞도록 사람을 지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끝없이 투쟁하도록 지은 것일 것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사람을 그렇게 설계하기 위해, 신은 뭘 끙끙대고 고심했어야 할 필요도 없었음이 분명한게, 그가 사람의 코에다 '숨'을, 또는 그의 '뜻'을 불어넣고 있었을 때, 그 '뜻'을 '욕망'의 모양으로 슬쩍 바꿔놓기만 했으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밑에 구멍 뚫린, 저 '욕망'의 주머니를 뽑아내보라, 그러면 유토피아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알게 될 것을,....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인세의 종말이기도 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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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빙충맞은 소리를 했던(그것이 빙충맞을 소리가 아니면 뭣이겠는가. 인용된(번역된) 대로 따진다면, '생각'하기나 '존재'하기에 '앞서' '나'가 있었으며,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고 고쳐 말한다면, 생략된 주어 때문에, '누가'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인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까닭에 주어를 세우기로 하면, 처음 말하던 그 모순 당착에 다시 떨어지고 마는 비극이 있다. 언어란 개좆같이 빙충맞은 것이구나, 오줌을 누려고 한 다리를 쳐들기로 하면, 태어날 때 세 다리의 개는 없으니, 의젓해서 신사 같으나 개는 아니며, 다리를 쳐들지 않으면 개 같아도 오줌이 다리를 적신다), 어떤 선노의 이 늙은 사미는, 생각이 이만쯤에 이르렀을 때, 이를 간다고 부드득부드득 갈았는데, 이빨이 없는 잇몸들끼리 부딪치는 데서는 얄궂은 소리가 나고, 거품이 일었다. 하여튼지 간에 생각하고 있는 이상 늙은네는 살아 있다. 그리고 살기는 빙충맞게라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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