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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레 뮌터

가브리엘레 뮌터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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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1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508g | 135*200*20mm
ISBN13 9791189346355
ISBN10 1189346354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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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3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그녀는 더 이상 프로이센 왕국의 경직된 사회 규범에서 벗어나 혼자 힘으로 사회적 신분 상승을 이루어 낸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선구자 세대에 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내적이고 예술적인 쇄신을 추구하는 세대의 주역이 된다. 가족은 그녀의 잠재력을 알아볼 만한 감수성을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사물과 사람을 그림으로 포착하는 재능은 그녀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 p.23~24

가브리엘레 뮌터는 사진 탐구와 여러 가지 소재를 습득하는 일을 병행하면서, 구도의 문제뿐 아니라 명백하게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심했다. 그녀의 후기 인쇄 그래픽에 반향을 일으킬 흑백사진의 명암 대비는 어려서부터 그녀 고유의 직관적인 표현수단이었던 윤곽이나 선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카메라를 사용하면서 꼼꼼한 연필 소묘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든 반면, 나중에 화가로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선택할 색에 대한 언급이 처음으로 스케치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글로만 쓴 것이긴 하지만, 색채가 또 다른 표현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 p.33~35

색채가 등장하면서 비로소 가브리엘레 뮌터도 자신의 작품을 예술적인 것으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색채가 빠져 있는 동안 그녀는 연필과 카메라 둘 모두를, 무엇보다 자신이 본 것을 처리하거나, 사람의 인상이나 문화적 특성을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기록 매체로 여겼다. 그렇다고 그녀가 사진을 터득하자마자 사진을 스케치하는 일, 즉 서로 다른 매체와 그 특징들을 비교 검토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 p.35

에른스트 굴은 1858년에 출간한 『미술에서의 여성』이라는 권위 있는 저서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성이 미술을 할 자격이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이 질문에 너무 쉽게 답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예술적 자질은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다. “여성은 위대한 생각을 대담하게 포착하기보다, 섬세하게 작업하고 꼼꼼하게 숙달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쉽고 편안한 기법을 사용하는 예술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미술의 각 분야에서 여성이 활동하는 비율로부터 이미 위계질서가 생겨난다. 건축에는 사실상 여성이 없고, 조각에는 그 수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적은 수의 여성 집단이 있는 반면, 회화와 소묘에서는 압도적 다수의 여성들을 찾아볼 수 있다. 회화에서는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처럼 ‘자연을 사랑스럽게 재현하는’ 분야에서 여성들이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만, 역사화처럼 ‘창조적인 미술’이 지배하는 영역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순전히 굴의 논리에 따라 한 마디 덧붙이자면, 애초에 모방을 하도록 미리 결정돼 있는 것처럼 보이고,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는 사진 분야에서 특히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p.45~46

이 책에는 창조적인 여성을 바라보는 전통적 시선이 다각적으로 요약되어 있으나, 그런 시선이 향후 50년 안에 눈에 띄게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정반대다. 카를 쉐플러가 반세기 후에 『여성과 미술』을 출간했을 때, 미술의 여러 분야에 존재하는 차별은 오히려 더 심해졌다. 굴의 저서에서 볼 수 있었던 호의적이지만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는 아예 공공연한 경멸로 바뀌었다. 여성에게는 상상력도 예술 충동도 없다고 부정하고, 여성을 “모방 그 자체”로 낙인찍었다. 여성은 “선천적인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생산적인 미술가”의 역할을 할 수 없고, 여성이 거둔 주목할 만한 미술적 성취는 필연적으로 여성성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미숙하거나 병약하거나 과도한 성감수성, 혹은 성도착이나 생식 불능”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런 불능 상태는 단순히 재생산을 하는 여성에게는 제한적으로 나타나지만, 실제로 예술 작품을 생산하는 여성에게서는 이런 도착적 상태가 심각할 정도로 강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p.46

이런 풍토에서 화랑주가 여성 화가의 개인전을 열어 진가를 인정하거나, 창조적인 여성을 다룬 논문이 출간되는 것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아우구스트 마케나 프란츠 마르크 같은 아방가르드 미술가조차도,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창조성을 포기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화가 마리안네 폰 베레프킨은 남자 친구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를 지원하기 위해 잠시 회화 작업을 포기했다. 그럼에도, 심지어 1900년 이후 몇 년간 이렇게 적대적으로 그려진 여성 화가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례는 현실에서 점점 더 찾기 힘들어졌다. 베레프킨, 뮌터, 율리 볼프토른, 케테 콜비츠, 야코바 반 헴스케르크, 파울라 모더존 베커 같은 여성 미술가들이 독일 현대 미술에서 핵심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 p.48

칸딘스키는 1903년 여름 내내 목판화 기법을 익히려고 노력했지만, 공식적으로 칸딘스키의 제자였던 그녀가 소묘, 사진, 판화에서는 분명히 그보다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었다. 뮌터는 칸딘스키의 장식적이고 상징적인 판화를 평가할 때도 선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며 칸딘스키가 선을 잘못 구사하고 있다고 대놓고 비판했다. 뮌터는 자신이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익혀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데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소묘 능력을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 p.65

사진과 목판화가 가브리엘레 뮌터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대변한다면, 회화에서 칸딘스키의 인상주의적 영향은 그녀의 예술적 발전을 일시적으로 후퇴시킨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녀가 그의 이론적 성찰과 씨름함으로써, 자신의 주제를 응축시키고 단순화하는 과정을 어떻게 밀고 나갈지 좀 더 명확한 생각을 얻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1899년에 칸딘스키는 “자연을 명확하고 미세하게 복제하는 것”과 분명하게 거리를 두었다. 또한 “한 알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찾고 “자연에 완전히 종속된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 다양한 자연현상을 추출해서 응축시키는 것을 옹호했다. 1900년경의 예술 사진과 특히 뮌터가 좋아했던 검 프린트 기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알아차린 그는 이렇게 물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사진처럼 분명히 기계적인 매체로 ‘자신만의’ 시선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칸딘스키는 개별 사진가들의 노력으로 이제 사진이 개인적인 표현매체로 적합할 뿐 아니라 미술전시회에서 당당히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되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빛 입자의 혁명을 통해 사진은 예술의 경지로 올라섰다.”
--- p.67

고대 유적이나 자수보다 뮌터의 마음을 더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아랍 문화의 정수, 거리의 삶 그리고 프랑스 보호령이었던 그 나라의 수도 곳곳에 있는 골목길이었으리라. 그녀는 안전한 골목길에서는 그곳의 분위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미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방식에 딱 들어맞는 낯선 것들을 향해 주의 깊게 카메라 초점을 맞췄다. 그 하얀 정육면체의 집들은 그녀의 작품에서 점점 더 부각되어 나타나는 축소된 대상성에 대한 그녀의 관점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을 뿐 아니라, 빛과 색채도 그녀의 마음에 꼭 들었다. 작은 크기의 유화와 템페라 그림, 스케치, 사진에는 습작의 특징이 남아 있었고, 나중에 좀 더 크게 제작할 생각이었다. 칸딘스키와 마찬가지로 뮌터도 그 후 몇 해 동안 반복해서 동양적인 주제로 돌아가곤 했다.
--- p.77

가브리엘레 뮌터는 자신이 사진과 그래픽에서 대상을 축약하는 시선을 가다듬기 이전에, 이미 나비파라는 유명한 선구적 존재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축약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내는 것, 감정, 사물의 본질, 좀 더 깊은 관계들을 보여 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것들을 보여 줄 수단은 분명해 보였다. 이를 테면 단순화, 원근법적 효과의 포기, 검은 띠로 서로 분리된 채 빛나는 색채 등이 있다. 교회의 창이나, 각각의 면이 미세한 금속선으로 나뉘는 법랑 세공품처럼 말이다. 그런 다음 축약해서 요약하는 대신 해체해 버리는 인상주의와 점묘주의에서 탈피하기, 핵심적인 질문에 집중하기 같은 방법도 있다. 그것은 분산이 아니라 통합(통합주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 p.87

하지만 대부분의 동료들과는 달리 가브리엘레 뮌터는 순수하게 미학적 자극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대상물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녀는 사물들과 함께 살았고, 사물들도 그녀와 함께 살았다. 동시에 풍경, 산, 호수, 소도시 무르나우와 밀접하게 결합된 관계를 발전시켰다. 미술계가 근본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것처럼, 산도 남성의 영역이었다. 영웅적인 것, 위험, 모험, 고독, 정상 정복, 이 모든 것이 남성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알프스 산악협회에 여성 회원이라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는 위험한 자극을 찾아 산을 정복하는 해방된 여성 산악인은 아니었지만, 산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산이 가진 야성, 아름다움, 강력함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산악 풍경은 미술계가 여성에게 자비롭게 허용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르였다.
--- p.111

가브리엘레 뮌터는 삶의 동반자가 추구하는 종합 예술 이념에 참여했다. 그것에 마음을 열고 관심을 기울이기는 했으나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훗날, 칸딘스키의 마음을 뒤흔든 음악을 작곡한 하르트만이나 쇤베르크 같은 작곡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음악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을 후회 했다. 그것과 별개로 비구상을 향해 가는 칸딘스키를 따라가지 않고 추상적인 실험을 시도했음에도, 땅과의 접촉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절실한 욕구가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 p.117

뮌헨의 집과 무르나우의 저택은 뮌터에게 새로운 경험을 의미했다. 드디어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공간을 꾸밀 수 있고, 원하는 만큼 오래 머물 수 있는 집이 두 채나 생긴 것이다. 그녀가 수집한 세속적이거나 종교적인 민속품, 독일 바이에른 주나 러시아에서 제작된 수집품이 곧 장식장과 책상에 가득 진열되었다. 공간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그곳이 자기 소유임을 보여 주는 일종의 의식적 행위였다.
--- p.124

한 가지 주제를 연작으로 시도하는 것이 그녀가 추구한 예술의 본질적 특징이었다. 즉 최종적인 작품을 완성하려고 분투하는 게 아니라, 동일한 가치를 특수하게 변형시킨 여러 관점이나 색채의 선택이 병존하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은 양식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녀는 양식을 의도적으로 변형시켰다. 때로는 선으로 윤곽을 그리거나 색채의 평면을 통합했고, 때로는 신비롭고 혼란스럽게 때로는 서민적인 소박함으로, 때로는 그녀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키치처럼” 때로는 “좀 더 엄격하게”, 때로는 “피카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백하게” 드러날 정도로 변형시켰다.
--- p.159

다소 일반화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성별에 따른 특수한 ‘상수’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 시대의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동료들보다 미술 시장의 주목을 덜 받았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실험을 위해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이런 상황을 자주 이용했다. 남성 미술가들은 화랑주나 수집가가 자신의 작품을 알아보고 작품이 좀 더 잘 팔릴 수 있도록 자신의 고유한 특징에 분명 더 많은 가치를 두었다. 반면 여성의 작품은 훨씬 폭넓은 양식적 다양성을 보여 주는 일이 많았다. 가브리엘레 뮌터의 작품은 이런 경향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나만큼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언젠가 그녀는 칸딘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이렇게 물었다. 그녀는 약간 우려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궁극적으로 무언가에 고정되는 것을 피했고, 예술적 자유를 최대한 펼치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이런 결정은 그녀의 자아상과 자신감을 대변해 준다. 그녀에게 예술은 스스로를 시험하는 것을 의미했다.
--- p.159~160

1911년부터 1913년까지 그녀 개인과 작품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인식은 양가적이었다. 그녀는 1913년 1월부터 헤르바르트 발덴이 운영하는 베를린 슈투름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80점 이상의 작품을 전시하고, 두 달 후 뮌헨의 막스 디첼이 운영하는 ‘데어 노이에 쿤스트살롱’ 전시회에 출품하면서 독자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변 동료들의 적대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녀는 프란츠 마르크와 아우구스트 마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편을 위해 예술적 야망을 포기한 부인들이 성공한 여성 화가를 질투 어린 눈으로 보았다. 뮌터는 카리스마 넘치는 칸딘스키 곁에 있으면서도 그가 내세우는 추상적 신비주의에 크게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 p.160

하지만 마케는 자신이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훨씬 더 좋아했다. 그럼에도 뮌터에게 열광한 젊은 화가 마케가 뮌터의 예술적 독자성을 의심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적 독자성을 높이 평가하고 또 그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했기에 마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틀림없이 그런 점을 강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뮌터가 무척 마음에 들었어. 나는 칸딘스키가 그녀의 작품에 정신적 자극을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녀가 전적으로 혼자 작업한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네. 프랑스 회화의 큰 영향을 받지 않은 나 자신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 p.163

그 경고에 대한 응답으로 마리아 프랑크는 이런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다. 돈독했던 그들의 우애가 확연히 식었다고, 칸딘스키가 그녀의 남편을 비난했다는 것이었다. “완전 피해망상이죠!” 무슨 다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도 범인은 그 ‘좀나방’이었다. “그 유일한 해답은 아마도 뮌터일 거예요.” 실질적으로 청기사를 만든 계기가 되었던 칸딘스키와 마르크의 정신적 결합을 뮌터가 망가트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프란츠도 더 이상 청기사에 머물러 있지 않을 거라고 봐요. 그에게는 청기사보다 칸딘스키와의 개인적 교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는 그 교류를 훨씬 더 좋아했어요.”
--- p.167

아우구스트 마케는 이 일로 기분이 상했지만, 가브리엘레 뮌터는 차분하게 받아들였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전시회 사진은 뮌터가 찍은 것이다. 그녀는 청기사와 뮌헨 신미술가 협회에 참여한 것을 어쨌든 우연에 가까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녀는 적절한 시기와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사람들 틈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1909년에 별로 한 일도 없이 뮌헨 신미술가 협회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뮌헨 신미술가 협회는 북부 독일의 다리파 다음으로 우리 시대의 미술을 시작한 혁명의 아방가르드를 형성했다. 1912년 청기사 그룹이 결성되었을 때 나는 처음부터 함께했다. 화상들이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과 함께 내 작품을 대변했고, 독일 전역과 그곳을 넘어 모스크바부터 시카고까지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는 아무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
--- p.171

그사이 서른여덟 살이 된 매력적인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이 시간은 자아인식뿐 아니라 사회라는 거울의 측면에서도 칸딘스키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였다. 스웨덴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녀는 갑자기 이미 전설이 된 청기사의 뛰어난 공동 창설자 대우를 받았다. 또한 이미 10년 전 파리에 살았던 외국인이자, 뮌헨, 라인란트, 베를린 예술계의 전문가이며, 명료하고 분명하게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이전에 뮌헨에서 마리 안네 베레프킨이 맡았던 역할을 그녀가 이곳에서 어느 정도 하게 되었다. 훨씬 규모가 소박하긴 했지만 자신의 살롱에 사람들을 초대해 예술을 논했고, 주로 스웨덴의 젊은 미술가 세대들을 불러모았다.
--- p.199

실험과 새로운 영향에 열린 태도를 유지했던 뮌터는 1916년부터 동판화에 이어 석판화까지 여러 새로운 기법을 시험했다. 동시에 여성 초상화, 사교계의 주문 초상화, 여자 친구들의 그림도 그렸다. 그 모든 것이 세련되고 자신감에 찬 아름다운 여성들을 보여 준다. 그녀의 감수성과 공감 능력은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존중 없이 진정한 초상화는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유사성을 무시한다면 단순히 효과적인 그림만을 그리게 될 것이다. 외적이고 관상학적인 유사성만을 과장하면 그 결과는 캐리커처처럼 왜곡된 그림으로 끝날 뿐이다. 두 방식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 대신 공감과 진심이 요구된다. “사람을 묘사하는 임무는 너무나 중요해서 나는 그것을 넘어서, 인간의 외형을 해체하여 독특한 구성으로 기록하거나, 그 외형을 완전히 버리고 비구상으로 대체하고픈 유혹을 느낀 적이 결코 없었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정신적인 것 자체를 파악하고 인간의 아우라를 어느 정도 표현할 수 있으며 비유와 상징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지만, 인간의 육체적 외모, 특히 얼굴은 이미 상징이다.” 육체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의 자연스러운 상징처럼 보인다.
--- p.206

가브리엘레 뮌터가 지방 소도시인 바이마르와 데사우에 있는 칸딘스키 곁으로 갔다면 그녀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율리아 파이닝거, 아니 알버스, 게르트루트 아른트, 릴리 클레 등 바우하우스 교수의 부인들은 예술적 야망을 지닌 촉망받는 예술가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희미하게나마 남편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가정주부나 어머니로 살았다. 이런 점에서 칸딘스키의 새 부인 니나는 가브리엘레 뮌터보다 그런 모습에 훨씬 잘 어울렸다. 그녀는 전형적인 인물이었고 부인 역할에 만족했다.

베를린의 작가이자 사회개혁 활동가인 루 메르텐은 이미 1914년에 이렇게 단정했다. “일하는 남자, 특히 정신적이거나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남자는 젊어서부터 이미 자신에게 맞춰 줄 것을 강조하고 요구한다. 이를테면 자기가 작업하는 선택된 영역을 방해와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고, 그의 작품, 일, 특별한 재능에 모든 것을 …… 바치거나 완전히 희생하면 사회적 책임에서 전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면죄부를 받는다.” 여성에게는 반대 상황이 적용된다. 결혼이라는 결합이 남성의 짐을 덜어 준다면, 여성에게 결혼은 짐이다. 창작 공간을 쟁취하는 것도 성별에 따라 사회적으로 전혀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창조적인 남성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자아를 실현하지만, 창조적 여성은 의무를 등한시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바우하우스는 스스로에게 현대적인 외관을 부여했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이곳에서도 감지되었다. 여성과 미술? 여성들에게는 가능하면 직물 분야를 적합한 작업 영역으로 권했다. 여성이 미혼으로 살아가려면 생계비를 벌기 위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19세기에 공식화되었는데, 이 생각은 여기서도 어떤 역할을 했다. 반면 예술적 발전은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포기할 수도 있는 일종의 사치로 간주되었다.
--- p.217

스웨덴에 있는 동안에는 풍경과 정물화가 중심을 차지했다면, 다시금 인간이 그녀의 미술에서 중심 주제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주변 상황에서 기인한 일이었다. 칸딘스키와 지낼 때는 사회에서 떨어져 지내는 경향이 있었고, 살아 있는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물과 자연 현상을 지향했던 것이다. 이제는 아틀리에가 없어졌지만, 대신 호텔 슐로스 엘마우와 베를린에서는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면서 어릴 적부터 습관으로 자리 잡은 관찰 능력과 이웃에 대한 호기심이 되살아났다. 이제 확실한 몇 개의 선만으로도 핵심을 강조해 표현할 수 있었다. 이때 그녀는 스케치의 선을 모델의 특성에 맞춰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펄럭이듯 구사했다.
--- p.223

얼마 동안 그녀도 이 새로운 방향을 자신의 미술에 빌려와 표현주의적 색감과 결합시키려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즉흥적인 스케치에서 고향과도 같은 표현주의 미술의 폭발적 역동성을 끝까지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즉물주의가 갖고 있는 미세한 조정과 해부하는 듯한 차가움은 근본적으로 그녀에게는 끝까지 낯선 것으로 남았다.
--- p.227

하지만 스케치 같은 특성은 그녀를 계속 따라다녔다. “가브리 엘레 뮌터는 격렬한 출발의 시기에 그녀와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정적인 요소를 선택해서 그렸다. 그녀의 본질이 지닌 완성된 어떤 것은 훗날 청기사 그룹이 해체되고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다”고 하르트라우프는 회고했다. “소묘가로서의 G. 뮌터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단순하거나,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분명 청기사 집단에서 그녀의 다른 가능성들이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더 극심한 고립의 기간에 비로소 그녀는 이런 좀 더 비밀스럽고 보다 개인적인 창작의 충동에 걸맞은 독자적인 길을 개척할 수 있었다.” 평면성과 색채의 강렬함에도, 뮌터에게는 언제나 선적인 것이 그림의 일부였다. “내 그림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소묘 화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227~228

1927년 스위스 여행 중에 그녀는 루가노 근교 카데마리오의 수영장에서 소녀 두 명을 사진에 담았다. 그중 한 명이 ‘자바 여인’으로, 여러 그림에 등장한다. 고갱에 대한 오마주로 여겨지는 이 여인은 뮌터에게 일종의 고향 같은 알프스 풍경에 이국적인 남태평양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무엇이 이 미술가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통합’하도록 움직였을까? 소녀는 웅크린 채 낯선 환경에서 벌거벗은 채 앉아 있고, 얼굴을 옆으로 돌렸지만 시야에서 관찰자를 놓치지 않는다. 왜 그녀는 무방비 상태로 낯선 곳에 앉아 있을까? 그녀는 고향에서 추방된 사람이고, 뿌리 뽑힌 사람의 이미지일까? 아니면 그녀 자신이 이국적인 것을 찾아 알프스로 왔을까? 언뜻 사랑스러워 보이는 이 그림은 당혹스러운 면이 있지만, 뮌터 회화에서 이어져 온 질문들을 제기한다. 다양한 대상들의 결합, 상이한 문화의 결합,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의 결합은 일종의 상수다. 산속의 자바 여인은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 p.228~230

가브리엘레 뮌터가 그런 정치적 상황을 목도하고도 전에 없이 그렇게 많은 꽃 그림을 그린 것을 굴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첫 번째 그림에는 오로지 꽃만 있다. 다른 그림이 첩첩이 쌓여 가는 동안에도 꽃 그림들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래서 이 그림들을 제작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카롤리네 힐레가 이해한 것처럼, 네덜란드 전통을 따르면서 「밤의 꽃」과 같은 의미심장한 제목에서 표현된 “그녀의 실존적 상태를 이야기해 주는 아주 독자적이고, 수준 높은 복합적인 작품”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 p.252

독일의 악령을 몰아내기 위해 1947년에 인상주의부터 현재까지 프랑스 회화를 전시했고, 다음 해에는 ‘뮌헨과 20세기 미술’이라는 부제로 ‘청기사’ 전시회가 열렸다. 1949년 뮌헨에서 세기의 미술 전시회를 열어, 1933년 이후의 시간을 완전히 감추려 하는 것은 기억 속에서 과거를 몰아내려는 대단히 강박적인 행위다. 동시에 전시회 내부적으로 참가한 미술가들의 등급을 새롭게 매겼는데, 그 등급은 이후 오랫동안 영향을 끼칠 것이었다. 가브리엘레 뮌터는 베레프킨처럼 예술적으로 “단순하고 자연적일” 뿐, 미술에 “아무런 문제”도 제기한 적 없는, 단지 주변적인 인물로 결정되었다. 그녀의 접근 방식을 완전히 오해한 상태에서 그녀가 “원칙과 구성과 드로잉에 무관심했다”고 판단했다. 이것은 19세기식 역할 분담으로 들린다. 혹은 빌헬름 뤼브케가 1862년에 미술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밝힌 생각을 순화시킨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사물의 본성에 따라 여성에게는 회화의 가치가 덜한 분야가 할당되고, 여성은 정신으로 가득한 내용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사물의 자연스러운 묘사가 중시되는 영역으로 활동이 제한되었다.”
--- p.255~257

뮌터와 베레프킨 위에 놓인 이 덮개는 여성에게 지적인 성찰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철학자 요하네스 아이히너는 그녀에게 순진함이라는 외투를 둘러침으로써 나치의 박해로부터 그녀를 보호했지만, 다른 한편 그녀의 작품이 지닌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진짜 통로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일그러지지 않은 본모습, 그녀의 순수함과 삶에 대한 긍정을 실제로 믿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한 평가에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책 『칸딘스키와 뮌터. 현대 미술의 기원에 관하여』의 서론에서 이미 그는 “기질, 발전, 업적, 영향, 가치에 따라” 판단했을 때 너무나 다른 두 미술가를 동시에 언급하는 자신의 무모함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그는 뮌터 미술의 독자적인 원천이 “본질적인 독창성”에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스스로 살아가고 활동하며, 전통적인 편견이나 관습, 학습된 가치와는 거리가 먼, 인간의 기본적 특징인 단순함을 향한 것”이라고 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렇지 않기도 하며, 가치를 인정한 것이면서 동시에 단순화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가 새로운 영향에 얼마나 개방적인지, 그녀가 아주 분명하지만 정중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지, 그녀가 형상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내면에 타고난 재능 이상의 것이 감추어져 있음을 즉각 알아차릴 수 있었다. 비록 그녀가 1948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도 그렇다. “나는 항상 붓이 요구하는 능력에 적합하게 그림을 그렸다.”
--- p.257~258

가브리엘레 뮌터는 방문객 사이에 섞인 겸손한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주연에서 증인으로, 시대의 증인으로 지위가 낮아졌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느꼈다. “내 일은 눈으로 보고 그림과 스케치를 그리는 것이지,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사람들은 내가 나와 내 작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내가 현대 미술이 생성되는 과정의 한가운데 있었던 지난 시절에 대해 말해 달라고 요구한다.”
--- p.258

1957년, 가브리엘레 뮌터는 80회 생일을 맞이하여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칸딘스키의 작품을 뮌헨 시에 기증했다. 그 전해에 칸딘스키에게 뮌헨 문화상이 수여되었다. 그사이 사람들은 뮌터가 지하실에 미술품이 든 상자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상자가 이 지하실을 “수백만 마르크의 보물이 보관된 지하실”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뮌터 역시 자신들이 아첨을 해야 할, 고인이 된 미술가의 부인 비슷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바이에른 국립 회화 수집관의 영리한 보존 책임자이자 후일 렌바흐 미술관 관장이 되는 한스 콘라트 뢰텔은 손님으로 무르나우에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그 보물들을 빛 속으로 끄집어내려고 직접 나서서 애썼다. 작품들을 미국 미술 중개상들에게 팔지 않고 기증한 그녀의 고귀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뮌터의 의미는 기증자라는 그녀의 새로운 역할 뒤로 사라져 버렸다.
--- p.260

가브리엘레 뮌터에게 1950년대는 자기 자신을 재발견한 시기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술사에서 청기사의 주변 인물 위치로 ‘강등된’ 시기이기도 했다. 부흐하임에게 뮌터는 아무 걱정 없이 용기 있게 관습을 던져 버리고 즉흥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유를 얻어 낸 대담한 미술가였다. 그런 자유는 사색적인 칸딘스키가 오랫동안 얻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이다. 그것은 대체로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그 기저에는 여성 특유의 순진함이라는 특성을 규정하는 행위가 감춰져 있다. “여성의 체계적이지 못한 특성이 그녀에게는 이득이 되었다. 그녀는 양식적 목표 설정을 하지 않고 본능에 따라 ‘거침없이’ 그렸다.” 이 짧은 문장으로 저자는 미술에서의 여성성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과 가브리엘레 뮌터의 접근 방식을 구체적이지만 잘못된 방식으로 응축해서 표현했다. 아주 남성적인 특성이 이런 여성적 특성과 짝을 이루고 있다고 부흐하임은 말한다. “거의 남성적인 결단력으로 그녀는 형상적 통일을 방해하는 모든 소재들의 작은 결합들을 억누르고 엄격한 단순화를 통해서 명확하게 구성된 풍경의 구조를 얻었다. 그렇게 결합된 구조 속에서 구름층과 물줄기는 건초 보관 창고나 숲이 있는 언덕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 p.262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외부에서 다양한 영감을 받더라도, 그림은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신념에 충실했다. 소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그림으로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1962년 5월 19일에 가브리엘레 뮌터는 무르나우에서 사망했다. 엘제 라스커 쉴러와의 전설적인 만남 이후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만남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두 예술가의 본질적 특징이 인상적으로 드러났다. 저기에는 그림도 그리는 열정적인 시인이 있다. 그녀는 삶을 일종의 오르내림으로, 무엇보다 자신을 중심 삼아 회전하는 비틀거림으로, “나선 계단의 드라마”로 느낀 시인이었다. 지속적인 “즐거운 절망” 혹은 “절망적인 즐거움”의 상태에서 요동하고, 큰 소리로 자신의 장점과 예술가의 지위를 고수하는 것을 하나의 요구로 여긴 시인이었다. 한편 여기에는 겉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예술에 대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며, 모함을 냉정하게 견디는 화가가 있었다. 그녀 역시 강했고 그녀 역시 철저한 예술가였으나, 그녀의 힘은 고요함에 있었다. 극적인 등장 따위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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