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가 성 담론의 역사가 역사적 연구가 가능한 영역임을 증명한 후, 스스로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성적 행동을 금지하는 사상 체계에 의해 어떻게 제약받는지 보여주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푸코와 푸코주의자들은 진리의 역사란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는데, 푸코는 성과학이라는 학문 자체의 발전을 연구함으로써 이 점을 설명했다. 구체적으로, 푸코는 1870년대 무렵부터 성적 도착의 특성을 밝혀내는 데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여 의학적 초점에 변화가 일어나 소도미를 범죄 행위에서 심리적 유형의 하나로 보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텍스트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이러한 구성이 텍스트가 놓인 맥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강조하지 않은 채 성과학의 발전을 다루어왔다. 그러는 대신, 푸코의 표현을 바꿔 말하자면, 많은 섹슈얼리티 역사가들은 담론의 구성을 가능케 한 ‘고고학적’ 요소(법률, 관행, 이해관계 등의 사료)를 깊이 탐구하지 않고 담론의 표면만을 읽었다.
---「편집자 서문」중에서
사례 3. 스코틀랜드 저지대 혈통이다. 부모 양가는 모두 건강하고 뇌 질환이나 신경증 같은 가족력이 없다. 동성애적 욕망은 사춘기에 시작됐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자위를 시작해 22살 즈음까지 적당한 정도로 이를 지속했다. 그가 꾸었던 에로틱한 꿈은 전적으로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과 아주 가깝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는 상대 쪽에서 성적인 애정 표현을 보내는 즉시 불쾌감을 느낀다. (…) “저는 동성 간의 애정이 성적 열정과 탐닉을 포함할지라도 인간 본성이 성취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어요. 한마디로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랑과 완전히 같다고 생각합니다.”
---「3장 남성의 성 역전」중에서(186~187)
사례 30. 미스 B., 26세. 형제자매 중 한 명은 신경증적 기질이 있고, 다른 한 명은 역전자이다. 그녀 자신은 지극히 건강하다. 그녀는 남성에 대한 혐오감이 전혀 없고, 그 결합이 영속적이지 않다면 결혼도 해보고 싶었지만, 한 번의 예외를 제외하면 남성에게 성적 끌림을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예외적 사례에서 그녀는 곧 자신이 이성애 관계에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파혼했다.
---「4장 여성의 성 역전」중에서(245~246)
도리스인은 전사이자 해적의 무리로서 배를 이용해 바다를 건너기 위해, 그리고 남부 그리스의 언덕과 평야를 가로질러 길을 개척하기 위해 전진했다. 이들은 검으로 정복한 영토들을 군인처럼 점령했다. 막사는 그들의 나라가 되었고, 이들은 오랫동안 말 그대로 야영지에서 살았다. 사회적 삶의 다양함으로 인해 복잡한 도시국가 대신, 이들은 협소한 경계와 방랑하는 무리의 단순한 조건들에 이르렀다. 여자가 충분하지 않고, 정착된 가정생활의 신성함 없이 아킬레우스에 관한 기억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들의 조상인 헤라클레스를 존경한 도리스의 전사들에게는 우애를 열광의 반열로 끌어올릴 특별한 기회가 있었다. 멀리 떨어진 나라를 향해 이주할 때 있었던 사건들?바다 때문에 겪은 위험한 일, 강과 산을 지나가는 길, 요새와 도시의 공격, 적대적인 해안에 상륙하는 일, 타오르는 봉화 옆에서 서던 불침번,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 지켜보는 적을 마주한 소초 경비?에는 로맨스의 광채를 우정 위로 비출 수 있는 모험이 있었다.
이러한 환경은 약자에 대한 동정, 아름다운 이를 향한 다정함, 어린 이에 대한 보호라는 덕성과 더불어 고마움, 자기 헌신, 존경 어린 애착에 상응하는 기질들을 작동시킴으로써 남자들 간의 결합을 결혼만큼이나 견고하게 다졌을지 모른다. 현명한 대장이라면 부대에 힘을 북돋아주고 진취성과 대담함의 불꽃을 살려두기 위해 이러한 관계에 의존했을 것이다. 함께 싸우고 음식을 찾아 돌아다니며, 길가에 있는 판자와 잡초가 흩뿌려진 침대를 공유하며, 습격할 때 동료의 목소리에 맞춰 집결하고 쓰러졌을 때 동료의 방패에 몸을 맡기던 이 남자들은 ‘사랑하는 이’와 ‘동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배웠다. 사랑받는 일은 영예로웠다. 자신을 위해 누군가가 죽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은 영광스러웠다. 필요할 때 자기를 희생하겠다고 연인에게 맹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파이데라스티아적 열정은 남자다운 덕과 육욕을 결합했을 것이며, 근엄한 남자가 여자를 위해 가슴에 품는 것과 같은 낭만적 감성을 그에 더했다. 테오크리토스가 썼다고 전해지는 아이올리스의 시에서 이 초기 도리스식 연인에게 맞는 좌우명을 고를 수 있다. “그리고 무쇠로 된 남자였던 나를 부드럽게 만들었네.”
---「부록 A: 그리스 윤리의 한 가지 문제」중에서(340~341)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성의 역전sexual inversion이다. 이는 동성애를 일컫는 엘리스 당대의 표현으로서 동성애라는 현상을 성과학이라는 틀 속에서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용법으로 제안되었다. (…) 엘리스는 세상에는 선천적으로 동성애적 기질 혹은 성향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으며, 이러한 자들은 다른 이들과 달리 자연스럽게 혹은 어떤 계기를 통해 비규범적인 젠더와 섹슈얼리티 실천에 빠져든다고 보았다. 성 역전의 이러한 선천성은 동성애를 법적으로 처벌하면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옮긴이 후기」중에서
한반도에 성과학이 처음 유입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로 ‘성욕학’이라는 이름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성욕학 담론에 힘입어 이전까지 성적 기행을 가리켰던 ‘변태성욕’이라는 단어는 동성연애자나 여장남자 등 이성애 규범을 벗어난 이들에 대한 낙인으로 작동하게 된다. 해방 이후 정신의학자들은 동성애를 서구의 영향으로 발생한 현상이라고 보면서, 한국은 고유한 가족 문화로 인해 ‘성도착증’이 적게 발생하며 동성애가 드물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성 간 성행위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거꾸로 해석하면,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가 철저히 비가시화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옮긴이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