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원초적인 세계의 어두운 먼 곳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거나 현기증을 느끼면서 심연의 심연 속으로, 혼백들의 나라의 멀고 먼 끝에까지 그를 따라 내려갔을 때의 그 신적인 시간에는 말일세. (...) 그런 순간마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에게 빛을 비춰주는 감미로운 불길의 불꽃을 내가 실제로 살고 있으며 엮어가고 있는 나의 작은 작품, 나의 휘페리온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네.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들의 기쁨을 위해서 때때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할 것 같다네.
--- pp.60~61
철학적 서신을 통해서 나는 우리가 사고하고 존재하고 있는 분리가 나에게 설명해 주는, 그러나 주체와 대상 간의 대립, 우리 자신과 세계 사이의 대립, 나아가 이성과 계시 사이의 대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원리를 찾아보려고 하오. -이론적으로, 지적 직관을 통해서, 우리의 실천적 이성의 도움을 꼭 필요로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리 말이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미적 감각을 필요로 하오. 그리고 나는 나의 철학적 서신을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새로운 편지》로 부르게 될 것이오. 나는 또한 그 안에서 철학으로부터 문학과 종교로 넘어가게 될 것이오.
--- pp.190~191
우리의 고요한 행복감이 언어로 옮겨져야만 한다면 그것은 고요한 행복감에게 언제나 죽음이기도 하다네. 나는 차라리 즐겁고 아름다운 평화 가운데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를 헤아리지 않은 채 어린아이처럼 그저 유랑한다네. 왜냐하면 내가 지니고 있는 것을 어떤 사념도 완전히 붙들지 못하기 때문이지.
--- p.238
순수한 것은 순수하지 않은 것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네. 자네가 고귀한 것을 비천한 것 없이 나타내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부자연스럽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가장 부조리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네. 고귀한 것 자체는 그것이 표현에 이르는 한 그것이 생성되었던 운명의 색깔을 띄우기 마련이고, 아름다움은 그것이 현실 가운데 표현되는 한, 그것이 생성된 환경으로부터 자신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은 어떤 형식을 필연적으로 취하기 때문이네. 그리고 이 부자연스러운 형식은 그 형식을 필연적으로 부여했던 상황을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자연스러운 형식이 되는 것이네. (...) 그러므로 비천함 없이는 고상한 것이 표현될 수 없다네. 비천한 것이 이 세상에서 나에게 부딪쳐 올 때면,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하려 한다네. 즉, 너는 도공이 아교를 필요로 하듯이 비천함을 그처럼 필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따라서 언제나 비천함을 받아들이고 내치지 말며 꺼리지 말라고 말일세.
--- pp.287~288
너는 나의 모든 불행의 뿌리를 알고 있느냐? 나는 나의 온 마음이 매달려 있는 예술을 위해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로 오가며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자주 진정으로 삶에 지치게 된단다. (...) 시인으로 길러졌던 많은 이들은 이미 죽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시인이 살 만한 기후에 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열 그루의 초목 가운데에서 한 그루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 p.259
우리는 벌써 오래전부터 인간 활동의 모든 방황하는 흐름은 그것이 나온 것처럼 자연의 대양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길을, 인간들이 대부분 맹목적으로, 때로는 불만과 반감을 가지고, 아주 자주 천박하고 비천한 방법으로 걷는 바로 이 길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서 그들이 크게 뜬 눈으로 기쁨과 품격을 가지고 걷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 충동으로부터 탄생하는 철학, 미적 예술, 종교의 할 일이다. 철학은 그 충동을 의식화한다. 철학은 충동에 그것의 무한한 대상을 이상으로 제시하고, 이상으로 대상을 강화하고 정화한다. 미적 예술은 그 충동에 생생한 형상을 통해서, 하나의 표현된 보다 드높은 세계를 통해서 그 충동의 무한한 대상을 그려낸다. 종교는 충동이 그 드높은 세계를 찾고 있는 곳, 형성하고자 하는 바로 그곳에서, 다시 말하면 자연 가운데서, 마치 숨겨진 설계처럼, 펼쳐지기를 바라는 어떤 정신처럼 언급한 보다 높은 그 세계를 예감하고 믿도록 가르친다.
--- pp.339~340
저는 슬픔을 때때로 흡족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슬픔이 저를 가장 순수한 활동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의욕을 잃으면 역시 아무 일도 못 하며, 아무것도 진척시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가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가슴 안에 두 가지를, 슬픔과 희망을, 유쾌함과 고통을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 p.346
나는 매일 사라진 신성을 재차 소리쳐 불러야만 합니다. 내가 역사의 위대한 순간에 위대한 인물들이 사방으로 번진 성스러운 불꽃처럼 주위의 사물들을 붙들어 모든 죽은 것, 어설픈 것, 세상의 검불을 화염으로 바꾸어 그들과 함께 하늘로 불어 올라간 것을 생각할 때, 그리고 가물거리는 불빛의 작은 등잔처럼 주위를 맴돌며, 한동안이라도 더 밤을 밝히기 위해서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구걸하려는 나를 생각할 때, -보시라! 놀라운 전율이 나의 사지를 꿰뚫고 지나갑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서 섬뜩한 단어, 살아 있으나 죽은 자!라고 나지막이 외칩니다.
--- p.354
그처럼 시인은 자주 참되지 않은 어떤 것, 모순된 어떤 것을 말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덧없는 것처럼 읊어지는 전체 안에서 그것은 자연스럽게 진리와 조화로 용해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뇌우에 이어서 무지개가 아름답게 떠오르듯이 시에서도 참되고 조화로운 것은 거짓된 것으로부터, 오류와 고통으로부터 그만큼 더 아름답고 기쁨에 차 나타나는 것이랍니다.
---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