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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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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142쪽 | 202g | 127*205mm
ISBN13 9791192079288
ISBN10 1192079280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두꺼운 가죽 지갑을
가볍게 통과하고
얄팍한 지폐와 구겨진 영수증
접고 또 접은 빈혈처방전을
순식간에 지나서
찰나에 접선하는
교통카드와 단말기의
눈먼 치정과도 같은 만남을
무심코 주선하는
물신物神의 시간

계단을 내려가서 전철을 타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서
마을버스를 탄다
어제의 발자국과 겹쳐지는
오늘의 지루한 발자국들
잘 생각나지 않는 간밤의 꿈
습관적인 걸음새로 지워버리며
잔뜩 찌푸린 날씨
21세기의 아침을 간다.
---「출근」중에서

불면증 치료 효과가 있다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었다

새벽녘까지
오래 이어지는 피아노 솔로

구르고 어르고 간절히 두드려도
생각 한 자락 끊어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쓰라리고 달콤한 기억의 문신文身

연주가 끝날 무렵 불을 켜고
스틸녹스 반 알을 먹는다

몽롱해지는 눈꺼풀 위로
어룽대는 회한의 아라베스크

당신의
속 깊은 선물이었는데...

오늘도 참패한
요한 세바스찬 바흐

나의 탓이다.
---「바흐와 스틸녹스」중에서

황야를 떠도는 늑대 한 마리
무리에서 쫓겨났을 고독한 우두머리

사투를 다해 잡은 어린 사슴을
독수리, 까마귀에게 빼앗기고
비실비실 절면서 간다

멀어져가는 왕국
무심한 평화가 섬뜩한 대평원

채널을 돌리려는 순간
흘낏 돌아보는 찰나의 섬광

마주치도록 클로즈업되는
늑대의 시퍼런 눈초리에
오히려 안도한다.
---「어떤 위로慰勞」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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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온의 시는 시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가 가지는 간결성과 리듬의 음악성, 그리고 맑게 퍼지는 은유가 시 안에 모두 존재해 있다. 과도한 난해성도 과중한 지식의 나열도 없다. 무엇보다 그의 시들은 살아있는 생명체같이 체온을 간직하고 있어서 비애나 상실감마저도 부드러운 향기를 지닌다. 나는/ 꽃이 피었을 때만/ 당신이/ 바라보던 나무// 이제/ 꽃잎 시나브로/ 떨어져/ 간 곳 없으니// 잎새 무성한/ 검푸른 초록의/ 그늘 아래로/ 불어오는 소슬한/ 바람 한 줄기// 지키지 못한 약속/ 저리 푸르다. 「우울한 초록」

관념에 도취해 자신의 자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시가 아니고 미국 현대시의 대부로 불리는 W.C.윌리엄스의 말처럼 ‘관념이 아닌 사물이나 인물 그 자체’로 시를 이루는 객관주의의 시, 사변적이거나 과장된 상징을 배제하고 일상의 생활을 형상화하거나 사물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연대감으로 고통을 이겨내는 언어,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는 따뜻한 감정 이입의 시가 서경온 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마종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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