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 봄, 저는 신사임당 일가의 가정교육을 택해 저의 교육관을 펼쳐 보자는 소망을 품었습니다. 그것은 뜨거운 사명감이었습니다. 한 달포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출근하여 온갖 자료를 찾아 복사하고, 마침내 강릉을 들락거리며 더 많은 자료를 구해왔지요. […]
글을 쓰는 동안, 시공을 초월해 강릉 북평촌과 제 고향 광양군 진월면 수렛골을 들락거리면서, 또 사임당의 외조부와 서도를 즐기시던 제 조부님을 동일시하면서 사임당의 어린 시절을 그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또 하나, 신사임당 시대에 온 나라가 신봉했던 유교의 ‘하늘공경’ 사상과 저의 종교 ‘하느님 흠숭’ 사상이 일치되었기에 보편 진리를 전함에 있어 더욱 신명이 났습니다.
이 글은 결코 혼자 쓰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고, 2005년 1월부터 귀한 지면에 연재를 권유하신 월간 「참 소중한 당신」 주간 차동엽 신부님의 은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또 연재하는 동안 계속해서 자료를 챙겨 주신 강릉시립 박물관 정항교 관장님, 제 질문에 성실히 답해 주시며 도움말을 주신 율곡 교육원 정문교 원장님께도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가장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노산 이은상 선생님이십니다. 그분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끊임없이 연구하고 보완하며 『신사임당의 생애와 예술』을 6판까지 거듭 내신 분입니다. 그 귀한 저서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분들의 도움을 받으며, 막힐 때마다 기도하고 묵상하며 『그 영원한 달빛, 신사임당』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2007년 봄 초판 발행 후, 저는 참으로 바쁘게 살았습니다.
이 소설을 읽은 분들이 신사임당의 눈물겨운 효성, 본으로 보여준 자녀교육, 자아성취의 열정 등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여기저기서 강연을 요청해 왔기 때문입니다.
전국을 돌며 신사임당의 생애를 홍보하던 중, 고액권 화폐의 주인공을 놓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성대표로서 신사임당이 거론되자, 너무나도 뜻밖에 일부 여성 단체에서 반발했습니다. 가부장적 제도 아래서 현모양처로 살다간 인물은 여성대표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신사임당을 제대로 모르는 그들이 너무나 안타까워 더욱 소리 높여 그분의 삶을 홍보했습니다. […]
또 율곡 선생이 이미 화폐에 나와서 곤란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러기에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일찍이 모자가 각각 화폐에 등장한 경우는 없었으니 세계만방에 자랑할 일이요 국민적 자부심을 심어주는 일이지요. 우리에게는 이토록 훌륭한 겨레의 어머니가 계시다고.
마침내 2009년, 신사임당이 오만 원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자 많은 분들이 환호하며, 저에게도 국민 여론 조성에 한 몫 했다고 박수를 보내 주셨습니다. […]
아무쪼록 국민 모두가 겨레의 어머니 신사임당을 정확히 알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히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그분을 역할 모델 삼아 자녀들의 일상 교육에 힘쓰고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서문 중에서
▶ “당호라고? 좋은 생각이오. 우리 인선이 그렇게 훌륭한 분을 마음에 모시고 있었다니 대견하구나. 사람은 항상 앞서 간 성현들 중에 자신이 마음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싶은 사람 한 분을 모시는 게 중요하지. 그래야 인생의 목표가 서는 것이거든. 사람마다 제게 알맞은 성현들이 있기 마련이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천양지차가 된다. 그래서 청년기에 접어들면 제일 먼저 할 일이 입지란다. 자기 뜻을 세워 놓으면 자연히 거기 맞추어 노력을 하게 마련이지. 그러다 보면 설령 그분과 똑같이는 못 되어도 그 비슷한 사람은 되지 않겠느냐. 너는 아주 네게 딱 맞는 분을 마음에 모셨구나. 태임을 본받는다, 정말 좋구나. 사임당. 신사임당. 듣기도 좋아. 네가 스무 살이나 되면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3 생명의 소중함에 눈 뜨며’ 중에서
▶ 여름이 왔다. 봄비에 모종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텃밭에는 오이며 가지들이 조랑조랑 열렸다. 사임당은 점심 반찬을 만들려 오이를 따려다가 잠깐 숨을 멈췄다. 아야, 가시가 그네의 손바닥을 찔렀던 것이다. 갑자기 그 가시 달린 오이를 그리고 싶었다. 텃밭에는 보랏빛 가지도 조랑조랑 열려 있고 아직 매지 못한 강아지풀도 함께 있어 그 여러 가지 것들을 함께 따 가지고 들어갔다. 가지는 빛깔도 아름다웠지만 그 탄력 있는 부드러움을 어디에다 견주랴. 그런 가지가 있는가 하면 온몸에 실낱같은 가시를 달고 있는 오이도 있다니 우스웠다. 강아지풀 또한 부드럽고 보송보송했다. 볼에 부비면 간지럽기까지 한 풀이었다. 어떤 풀은 살을 베일 듯이 날카롭고 어떤 풀은 솜털처럼 부드럽다.
신기하기도 하지. 이렇듯 각양각색의 생명이 어떻게 다 생겨났을까. 식물뿐 아니라 땅에 기는 벌레도 각기 다른 제 모습을 지니고 꿈틀꿈틀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임당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도 허투루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충은 언제나 다정한 그의 그림 소재가 되어 주었다. 그네는 그 모든 것들을 화폭에 담았다.
옛 선비들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대개 먹만으로 간결하게 그리고 있었지만 사임당은 주변의 사물들을 꼼꼼하게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 그네가 변형을 주었다면 단 하나, 식물들의 줄기를 항상 곡선으로 그렸다. 왠지 반듯한 줄기보다는 약간 굽은 곡선이 더 부드럽게 보여 좋았다. 꼭 이름 있는 사람들의 그림을 흉내 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네는 수묵화 대신에 알맞은 빛깔을 칠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밖으로 나타난 빛깔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눈에 보이는 빛깔로도 그려 보았다. 꽃을 파랗게도 칠해 보고 가지를 하얗게도 칠해 보았다. 가지야말로 쪼개 보면 속은 하얗지 않던가. 그래서 보랏빛 껍질을 벗기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심정으로 흰빛을 칠해 보았다. 파란 꽃, 하얀 가지, 그네는 자기만의 독창적 화법을 살리며 알 수 없는 희열을 느끼기도 하였다.---‘8 남편에게 학업을 권하다’ 중에서
▶ 매창이 어머니의 체취가 담긴 병풍 수를 정겹게 지긋이 들여다보다가 말한다.
“저는 왠지 달빛만 보면 어머니를 뵌 듯 반가워져요. 초승달도, 그믐달도 어느 달에서나 어머니를 느끼지만 보름달에서 제일 많이 느껴요. 그래서 보름만 되면 으레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지요. 어두운 밤, 허공중에 둥두렷이 떠 있는 보름달은 꼭 어머니 얼굴 같아요. 하늘에 달이야 하나지만 우리 사는 곳곳, 동네마다 골목마다 고루 비춰 주듯, 어머니도 한 분이지만 우리 일곱 남매 사는 곳곳마다 찾아다니며 빛을 선사하시는 것만 같거든요. 그리고 언제나 보름달 바짝 옆에는 별이 하나 따라다니지요. 그게 우리 각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 자기 사는 곳에서 어머닐 바라보며 바짝 옆을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여요. 또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북두칠성이 오순도순 사이좋게 모여서 반짝이고 있지요. 그건 꼭 우리 칠 남매가 모인 자리 같아요. 어머니는 형제간 우애를 끔찍이도 강조하셨거든요.”---‘14 에필로그’ 중에서
▶ 새신랑 율곡도 한마디.
“다 같은 사람이라도 잘 살다 간 사람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육신만 없어지지 그와 함께 나누었던 정, 말씀, 모두 남은 가족들의 마음 안에 남아 있기 마련입니다. 산 자가 죽지 않는 한, 죽은 자도 살아 있는 자의 가슴에 영원히 남게 되지요. 당사자를 보지 못한 후손들에게도 그분 덕담을 들려주면 그 빛과 향기가 대대로 전해질 것 아닙니까? 결국 어머니처럼 잘 살다 간 사람은 이 세상에 생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지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이승을 떠나면 저승에서 얼굴을 맞대고 만날 날이 있겠지요.”
---‘14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