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40년 전, 이 땅에도 “기쁨과 희망”의 여정에 동참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암담한 현실 앞에 서 있던 그들은 “인류의 빛(Lumen Gentium)”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고, 그 빛을 따라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게 형성된 공동체가 한국 천주교회(이하 한국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에는 “슬픔과 고뇌”가 함께 했습니다.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의 백여 년간 박해를 받아야 했고, 불안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쁨과 희망”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 속 빛이 되어 혼란스러웠던 한국 사회를 밝게 비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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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교회의 시선을 통해 한국 교회를 바라보니, 납득할 수 없었던 모습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차츰 두 시선을 교차하여 한국 교회를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교회에 대한 극단적인 태도, 즉 무조건적인 비판과 호교론적인 태도를 지양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 p.17
황사영은 교회의 입장에 충실했던 신앙인이자, 순교자였습니다. 또한 자신과 동료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신앙의 자유를 찾고자 노력했던 인권운동가였습니다. 반면 나라를 중요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황사영은 개인의 이익을 나라보다 우선시한 배신자일 수 있습니다. 황사영이라는 다면적인 인물을 한쪽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사영의 공과(功過)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가 처했던 상황과 고뇌, 그리고 당시 교회와 한국 사회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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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한국 교회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어둠의 시간만을 끄집어내 교회를 비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었던 순간들을 바라보면서,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어야 합니다. 반면 잘못한 점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그것이 한국 교회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프고 불편하지만, 그것을 통해 한국 교회가 더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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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들어 소득 양극화가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자, 베네딕토 16세 교황(PP. Benedictus XVI, 재위 2005~2013)은 2009년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을 반포하고 세계적인 부의 불평등 및 빈곤문제를 해소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2014년경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를 반포하면서 인간을 도구로 삼는 자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2015년에는 인류가 직면한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신음하는 인류에게 형제애와 사회적 우애를 강조하기 위해 회칙 『모든 형제들』을 반포했습니다.
--- p.60
한국 교회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과정을 거쳐 탄생했습니다. 다른 지역은 외부에서 들어온 선교사들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국인들이 먼저, 그것도 스스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 p.67
강완숙과 정하상으로 대표되는 평신도들은 자발적으로, 국가의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 교회의 기틀을 세워나갔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알려준 하느님 나라의 “기쁨과 희망”, 즉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가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성장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흘린 피와 땀 덕분이었습니다.
--- p.76
19세기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조선 사람들의 민족성과 도덕성, 생활 습관, 식습관, 사고방식 등 다수의 분야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고 있었습니다. 문명화 사명과 이교도 개종이라는 이중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게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93
선교사들이 선교활동을 펼치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양반 신자들은 선교사들의 결점을 보완해주기에 적합한 협조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박해로 파괴된 교회를 재건할 수 있는 사회적 권위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양반 신자들이 공소 회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한국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양반들이 많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 p.96
신축교안 직후 제주에 남아 있던 선교사들은 군인 없이는 선교 활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상금 지급 지연으로 발생한 이자를 제주도민들에게 돌려주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도민을 적으로 보지 않고, 사랑을 실천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배상금과 그 이자의 지불 의무를 도민들에게 떠넘긴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계기로 선교사들과 천주교회는 도민들에게 인심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육 사업에 진력하여, 비신자까지 자기 자녀를 천주교 학교에 보내고자 할 정도로 신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 p.133
뒤늦게 제주에 파견된 타케 신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역시 제주도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해 나갔습니다. 그는 특히 제주도에서만 자라는 자생 식물을 수집하여 학계에 알리는데 공을 들였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왕벚꽃 나무 자생지가 제주도라고 인정받게 된 것 은 모두 타케 신부 덕분입니다.
--- p.135
교회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는 법을 깨우쳐나가게 됩니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주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 지역의 특성은 무엇인지 탐구하고 이해해 나가면서, 천주교회는 점차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 p.142
이승만 정권은 자신에게 반발하는 한국 교회를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혔습니다.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대구대목구가 운영하던 대구매일신문사를 피습하는가 하면(1955), 노기남 대주교를 탄핵하고자 교황청에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1958~1959). 또한 서울대목구가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습니다(1959). 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공무원 신자들에게 인사 상 차별을 주었는데, 예를 들어 1958년 9월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조교수로 내정되었던 박양운 바오로 신부(1923~2002)를 교수직에 임명하지 않았습니다.
--- p.192~193
당시 가톨릭노동청년회 총재는 마산교구장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당시 주교, 1969년 추기경 서임, 1922~2009)이었습니다. 그는 강화도 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노동자들을 위로했습니다. 사태를 파악한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주교들을 설득하여, 1968년 2월 9일 “사회 정의와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주교단 명의로 발표하였습니다.
--- p.212
한국 교회 차원의 엄호 속에서 지학순 주교는 사회 정의와 관련된 활동을 연이어 펼쳐나갔습니다. 그는 1971년 성탄대축일에 맞춰 발표한 『성탄교서』에서 “우리 가톨릭의 기본정신은 정의이다. 사회정의와 공동선을 구현하는 것은 가톨릭의 기본 목표이다”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평협 및 정의평화위원회 총재주교(1972), 국제 앰네스티 한국위원회 명예 회장(1972) 및 제2대 이사장(1973), 한국 노동교육협의회 회장(1973) 등을 역임하며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 p.215
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에서 시민단체와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입니다. 만약 교회가 사회운동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된다면, 짠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내버려져(마태 5,13 참조) 존재 가치를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 속 문제에 개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 그리고 만약 개입하기 시작했다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제자들의 공동체라는 점을 자각하고 드러낼 필요가 있습니다.
--- p.234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을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교회가 세상 속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었기에, 그 정신을 받아들인 한국 교회는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데 자기 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을 넘어 한국 사회를 품으로 껴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교회가 자신들의 고통에 눈감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교회는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의 위로처요,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식처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 p.248
천주교회는 과거사를 되돌아보면서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구체적으로 반성했습니다. 그 결과물로 발표된 문헌이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2000.03.06.)이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3월 12일에는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참회의 날’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집전한 이 미사에서, 천주교회는 자신이 잘못한 일들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습니다. 대표적인 잘못으로는 십자군 전쟁, 종교재판, 나치 학살에 침묵했던 점들이 있었습니다.
--- p.282
제주교구가 보여준 일련의 모습은 아직까지 화해하지 못한 과거사들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주교구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교회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주교구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면서 인정할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러한 결단이 화해의 물꼬를 트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실천으로 이어진 화해의 노력은 교회와 제주 사회 사이에 굳게 닫혀있던 화해의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제주교구의 사례는 역지사지의 마음, 소통하려는 자세, 말보다는 행동, 바로 이것들이 한국 교회가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p.289~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