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를 읽는데 왜 호메로스가 먼저 나올까. 그 까닭은 호메로스가 ‘서양문화의 원류源流’와 관련이 있다는 데 있다. 서양문화 원류의 하나는 그리스·로마 혹은 그리스·라틴 고전문화에 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이다. 그런데 단테는 그리스·로마 고전문화의 전통과 그리스도교 전통 양쪽을 통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테 연구를 통해 그리스·로마 고전문화와 그리스도교 문화 두 가지를 겸해서 공부하는 셈이다. 이 말은 또한 각각에 관한 일정 수준의 기본 지식이 없으면 단테를 공부하기 어렵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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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강의에서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공부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단테는 서양 서사시 중흥의 선조이므로 근본적인 서사시의 전통을 어느 정도 알아 둬야 한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다. 그리고 또다른 이유는 단테의 『신곡』에서는 오늘 공부할 베르길리우스라는 고대 로마시인이 단테의 시적 상상 속에서 최초의 길잡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특별한 인물이 자신의 선구자로서 그리스의 호메로스를 매우 존경했으며 그를 모방해 서사시를 창조했다.
--- p.49
스즈키 : 위대한 시인들에게 공통적인 위대함은 무엇일까요. 이마미치 : 저는 전부터 세 가지 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 다시 말하면 휴머니티의 빛과 그림자, 인생의 행복과 적막 양면을 두루 살피고 인간에 관한 사상을 형성하는 시각이 위대한 시인에게는 반드시 있다고 봅니다. 둘째로, 전통과의 대결이 엿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때까지의 전통을 내부에 지니고 있긴 하지만, 전통을 받아들여 이어 갈 것인가 아니면 뒤엎을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기도 하겠으나, 거대한 전통과 대결하는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호메로스의 경우 전통과의 대결은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그리스 신화의 전통을 딛고, 그때까지 그리스 신화에 없었던 것들을 만들어 갑니다. 본래 신화에서는 오로지 강하기만 했던 아킬레우스가 기품까지 갖춘 인간으로 변한 것입니다. 셋째로, 시는 언어예술이기는 하나 어떤 시인은 음악과 상당히 관련 깊은 음악성이 있고 어떤 시인은 이미지가 풍부해서 회화·조각적이며 어떤 시인은 연극성이 있듯이, 물론 한 사람이 모든 예술 요소를 다 가진 것은 아니지만, 시가 언어예술이라고 해서 언어에만 한정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예술적 요소를 다분히 포함 시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상 세 가지 요소가 고전적이라 일컬어지는 거장 시인들의 공통되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요소들의 종합적인 결과가 만인이 즐길 수 있는 대단한 사상을 형성하는 게 아닐까요. 그중 하나만 꼽아야 한다면 맨 처음 말씀드린, 인간의 고귀함과 나약함을 두루 겸비한 인간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약함을 보면서 공감하고, 고귀함을 통해서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 p.70~71
저는 늘 별이나 반딧불 같은 빛에 관해 생각합니다. 세계문학 속에서 별은 이상의 상징입니다. 시인철학자 니체도 “결국은 별이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오리라, 그러면 이상도 잃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으며, “이상이란 무엇이냐며 사람들은 빙그레 웃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오늘날은 정말로 도쿄 하늘뿐 아니라, 많은 도시의 밤하늘에서 별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맑은 이상도 사라져 갑니다. 단테의 『신곡』에서도 별은 중대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늘의 별, 대지의 강과 숲은 인간이 살아오며 오랜 세월 소중히 여겨 왔으니 인간은 자연적인 본능의 힘으로 어느 정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리란 희망은 있지만, 지나치게 개발을 우선시하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을까 늘 걱정스럽습니다. 달마저 보이지 않는 세상이 온다면 인간은 대체 어떻게 될까요. 자연 문제와 고전 이해에 관한 것은 다시금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 p.158
그러므로 만약 이 세상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절망한다면 그것이 바로 생지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하로 떨어지지 않아도 관계없다. 단테 생각으로는 모든 희망을 남겨 두고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다. 그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가 희망을 모조리 잃어버린 기분에 휩싸인다면 그것은 살아 있다 해도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처럼 『신곡』을 통해 지옥의 소재를 알게 된다. 그렇다면 지옥은 도처에 있는 게 아닐까.
--- p.190
단테가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의 생활을 정화시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죄를 피해야 했으며, 죄를 피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죄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옥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베아트리체의 이러한 계획에서 지옥은 단테를 배려한 교육의 장이었다. 지옥문에는 ‘정의는 천주를 움직이시어……지옥을 만들었다, 즉 지옥은 신의 정의를 위한 것이다’라고 쓰여 있는데, 지옥 안에서 신의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로 응보가 이루어지는가를 관찰하게 만든다. 단테 생각으로는 지옥의 구조를 이해함으로써 종교적인 죄의 종류와 그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무서운 죄인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p.256
무릇 ‘해석’은 ‘의미 부여’와는 다르다. 의미 부여는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작품에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해석’이라 칭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것은 오만한 생각이다. 단테와 같이 위대한 사람에게 자기의 의견을 부여하겠다는 태도는 모독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해석이란 ‘의미의 발견’이다. 단테가 여기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가짐으로 임하는 것이다. 단테에게 배운다는 자세 속에서 진정한 해석이 생겨난다는 것을 깊이 유념해 두어야 한다. ‘의미 부여’와 ‘의미 발견’은 그 차이를 자연과학 실험처럼 확연하게 드러낼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단테가 ‘지옥은 정의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맨 처음에 썼던 말을 마음 깊이 새겨 두면, 우리가 단테의 지옥을 통해 무엇을 발견해야 할 것인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하는 갈피를 잡을 수 있다. 단테의 지옥도는 ‘지옥을 통해 신의 정의를 깨우치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 p.281
우리는 ‘길’로써 하늘과 이어진다. 이상, 사랑, 길잡이 등을 상징하는 별은 하늘로 향하는 길을 상징한다. 별의 세계야말로 신의 세계로 향하는 길이다. 그리고 단테에게는 인간의 행위에서 ‘말’로 표현되는 ‘관념’의 철학적 신학적 사색이야말로 신의 세계에 이르는 길이라는 사상이 있다. 단테에게 학문적인 추상세계는 신앙세계와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이야말로 신에 이르는 길, 별과 같은 것이었다. 다만, 거기에 신앙이 더해지지 않고서는 길을 잘못 들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행위인 학문을 통해 사랑은 무엇이며 희망은 무엇인가 하는 관념을 깊이 파고들 수 있다. 그 위에 그러한 지성을 고양시키는 신앙의 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단테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지성 위의 빛이야말로 별빛과 같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319
레테Lethe는 예로부터 그리스에 있었던 강 이름으로 그리스어로 ‘망각’을 의미한다. 에우노에Eunoe의 eu는 ‘좋다’, noe는 ‘지식’으로 이는 ‘지혜의 강’ 즉 ‘좋은 것을 아는 강’이다. 에우노에는 단테가 창조해 낸 강이라 일컬어진다. 불로 죄를 씻어 내고, 이 두 강물의 물을 마시지 않는 한 천국에는 갈 수 없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죄를 완전히 망각할 필요가 있다. 죄에는 그 유혹에 무릎을 꿇을 만큼의 매력이 있으므로, 죄의 흔적은 기억에도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죄를 모두 잊어버린 후, 새로운 지식을 쌓아야 한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죄로 기울 수 있는 지식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 인간은 또다시 과오에 빠진다. 일단은 그것을 완전히 망각한다. 그런 연후에 좋은 지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두 개의 강은 그러한 것을 일러 준다.
--- p.409~410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최대의 선물은 분명 자유의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은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말도 훌륭하지요.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 p.499
저는 천국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담도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무척이나 안심이 됩니다. 유럽에 단테나 괴테와 같은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 있고, 일본이라는 극동에서 그 문화를 음미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게 참으로 멋진 일이라 여기며 새삼스럽게 감격했습니다.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 p.595
우리의 인생이 불안정할 때에는 손에 고전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잠시 비켜 갔을 때, 가끔 다가오는 행복한 시기에 고전을 읽어둠으로써 고난을 이겨낼 힘을 간직할 수는 있다. 고전은 고난의 삶을 살아갔던 저자들이 자신들의 고난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관조한 기록이며, 동시에 그 고난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 파토스를 보여주는 저작들이다. 우리는 고전을 읽음으로써 이러한 보편적 파토스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