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오 대령의 일기를 접하게 된 나는 사회적 반향과 관심에 책임을 느끼고 그의 일기를 본격적으로 조명해보기로 했다. 유족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모두 다섯 권의 일기가 모였다. 나는 일기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오 대령의 생애를 조사했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는 안타까울 정도로 가진 게 없었던 군인이었다. 43세로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누구보다도 가난하고 힘겨웠던 것이 그의 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전투조종사로 키워준 조국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 하늘을 지키는 참군인이 되기 위해 애썼던 파일럿이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일기장」 중에서
젊은 날의 욕망조차 자제하며 주말과 휴일에도 공사에 홀로 남아 책과 씨름했던 당시의 심적 고통을 그는 “끝없이 밀려오는 고독 때문에 온몸이 마비되는 슬픔이 계속되었다”는 말로 표현했다. 그는 힘겨운 일상이 되풀이될 때마다 “상수리나무의 단단한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은 주인이 주는 거름이 아니라 사납고 맹렬한 바람이다”라며 마음을 다지곤 했다. 역풍을 가르는 새가 더 높이 날듯이 수동적인 삶보다는 거친 환경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루어가는 능동적인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것은 자신이 소중히 지키고자 했던 자존감 때문이었다.
---「악바리 정신으로 수석졸업생이 되다」 중에서
돈에 집착하지 않는 그의 태도는 비행대장(소령)으로 근무할 때, 또 다시 드러났다. 일부 가족과 친척들이 그에게 민항사로의 이직을 적극 권유했다. 어려운 집안에 경제적인 도움을 주면서 좀 더 편히 살라는 취지에서였다. 그는 그들의 제안을 일축했다. 전투조종사의 민항사 이직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만 보고 하는 게 아니다. 전투조종사들은 자신의 의무복무기간이 끝나면 장군으로의 진급 가능성, 연봉, 개인의 직업관, 자녀교육 문제, 근무환경, 정년 나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한다. 그러나 그는 이유가 어떻든 국가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한, 약 60억 원에 가까운 혈세를 투입해서 자신을 정예 전투조종사로 만들어준 공군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결코 돈이란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 중에서
남편은 신혼 초부터 집에 파리가 들어와서 날아다녀도 잡거나 죽이지 않았다. 하루는 소영 씨가 “파리를 왜 잡아 죽이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날아다니는 것은 모두 다 신성한 존재다”라고 대답했다. 그는 창문을 열어놓고 파리를 그쪽으로 유인한 후 창밖으로 내쫓았다. 처음에는 아내도 “참 재미있는 남자네”라고 웃어넘기다가 나중에 는 자신도 날아다니는 곤충을 죽이지 않게 되었다. 항상 대범해 보이는 남편의 깊은 마음속에도 자신과 같은 불안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투조종사의 아내로 산다는 것」 중에서
아내 소영 씨가 전투조종사 남편과 살면서 늘 관심을 두고 지켜본 것은 날씨였다. 신혼 초부터 함께 썼던 그들 부부의 일기장에는 날씨가 습관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그와 결혼한 이후 신문을 보거나 TV를 시청할 때, 날씨부터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날씨를 비롯한 기상변화가 전투기 사고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직업병 증후군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하늘부터 바라보았다. 오늘 자신의 남편이 비행훈련을 나갈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1992년 10월 26일, 날씨 맑음」 중에서
어느 날 소영 씨는 일기장을 뒤적이다가 남편이 쓴 일기를 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남편에게 “아니, 뭐 이런 걸 일기장에다 써요. 이거 완전 유서잖아”라며 화를 냈다. 고 김범동 중위의 영결식을 다녀온 뒤 쓴 일기를 읽고 아내가 깜짝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 그는 평소 소영 씨에게 “조종사는 늘 죽음을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조종사를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 또한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중에서
그는 비행훈련에 나서기 전에 자기관리부터 철저히 했다. 비행 12시간 전에는 절대로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비행 전날에는 반드시 8시간 이상의 숙면을 취했다. 또 감기나 배탈이 났을 때에도 비행군의관의 처방을 받은 약물만 복용했다. 그것은 공군이 전투조종사들에게 요구하는 최소한의 준수사항이었다. 전투조종사들의 심리상태도 관리대상이었다. 비행대대장실에는 ‘사랑의 전화’가 개설되어 있었다. 이는 전투조종사의 가족이 악몽을 꾸었거나 부부싸움을 심하게 했을 경우, 그 아내가 비행대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남편의 비행을 취소해달라고 공식요청할 수 있는 제도였다.
---「1.5평 속의 완벽」 중에서
그는 자신이 꿈꿨던 비행대대장의 리더십을 일기에 적었다. “나는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할 것이며, 또한 나의 군대는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그것을 억지하고 예방할 때, 국가에 더욱 봉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나는 물리력을 사용함에 있어 최대한도로 절제할 것이며, 나의 임무를 수행함에 필요한 만큼만 사용할 것이다. 나는 모든 정당한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정당한 명령에만 복종할 것이다.) 나는 나의 하급자들이 존중돼야 할 윤리적 존재들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할 것이며, 또 나는 절대로 그들에게 비윤리적인 것을 명령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명령하는 것과 내 명령이 수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다. 나는 나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 자신이 감내하고자 하지 않은 것들을 명령하지 않겠다.” (1993년 4월 26일 일기 중에서)
---「부하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한 리더」 중에서
“혼자 있을 때면 그동안 못했던 생각들을 정리하곤 해본다. 항상 전쟁을 생각하고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고는, 그때의 행동과 결단들을 생각되는 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생각해본다. 한때 불면의 밤을 새우며 조국에 대한 사랑과 야망을 꿈꾸었던 그 시절을 그리며 지금의 모습을 반성하고, 미래를 준비한다. 한겨울을 나는 국화의 향기는 더욱 짙음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 (1994년 1월 7일 일기 중에서)
---「부끄럽지 않은 조종사가 되기 위해」 중에서
2010년 3월 2일, 그날 아침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그는 아내 소영 씨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했다. 건강을 위해 홍삼 진액도 챙겨 먹은 뒤, 오전 6시가 조금 지나서 집을 나섰다. 소영 씨는 현관문 앞에서 “잘 다녀와요”라며 가벼운 인사를 나눴다. 관사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가던 발길을 멈추고는 소영 씨를 바라보고 씩 웃었다.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마지막 인사」 중에서
아버지는 장례기간 내내 침묵했다.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생전에 쓴 일기에서 담담하고 절제된 자세를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유족들 사이에서 작은 실랑이라도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런 아버지가 장례식 전날엔 갑자기 105전투비행대대를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 그저 죄송한 마음으로 비행대대장의 아버지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전투조종사들에게 아버지는 위로의 말을 건넸다. “내 아들이 조국에 충성하고 죽었으니 이제 슬퍼하지 않겠습니다. 부디 안전비행을 하면서 나라에 충성하는 훌륭한 전투조종사가 되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아버지는 고인이 된 아들을 대신해서 그들의 사기저하를 걱정했던 것이다.
---「눈물 없던 영결식」 중에서
염습은 보통의 염습과 전혀 달랐다. 그가 생전에 입었던 공군 정복 속에다 종이와 스펀지를 가득 채워 사람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머리 부분이 없어서 매우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다음에 추락현장에서 수습한 3~4킬로그램의 살점을 세 개의 봉투에 나누어 정복의 가슴, 배, 다리 부분에 차례차례 넣었다. 정복 아래에는 공군 장교들이 신는 단화를 넣었다. 그때 소영 씨가 남편의 육신이 담겨 있는 봉투 하나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다. 냉동실에서 갓 나온 남편의 육신은 얼음덩어리처럼 차가웠다. 염습을 주관하던 분이 봉투 위에다가 눈물을 떨어트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남편의 육신을 꼭 끌어안지도 못하고 양팔로 받들어 안은 채,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유족들은 시신 없이 치러지는 그의 염습을 지켜보며 전투조종사의 길이 얼마나 극적이고 험난했던 것인지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눈물 없던 영결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