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80쪽 \| 544g \| 15222517mm
ISBN13	9791187695080
ISBN10	1187695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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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인연을 이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모두가 잠들어 있는 새벽 미명에 습관처럼 서재 책상에 앉아 뭔가를 끼적거리다 지우기를 벌써 1시간째다. ‘가족’, ‘인연’, ‘어머니’, ‘친구’, ‘비전’ ‘행복’ 등등. 어떤 말로 첫 글자를 삼으려 해도 도무지 이거다 하고 딱 짚어지는 내 인생의 한 단어가 없다. 그 많은 아름답고 고상한 단어 몇 개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내 인생의 순간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어김없이 그 순간들마다 ‘아낌없이 간절하게’ 세상과 부딪쳐왔다는 생각에 ‘유인권, 너 참 열심히 살았다’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짓는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가지 않는 길’에서 말했던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시처럼 나도 남들이 가지 않은 나만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요즘은 가끔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만 내가 걸어온 그 어떤 길도 열심히 정진했기에 다른 길에 대한 미련은 없다.

어느새 머리에 하얀 서리가 얹은 나이가 돼서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니 ‘나를 만든 건 8할이 고마운 인연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인생이 뭔지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영이별하고 낯선 객지생활을 하며 힘든 인생길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데는 어려서부터 예수님 믿으면서 ‘거짓말하면 안 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님 말씀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난 어머님의 가르침대로 정직하게 열심히 살고자 했다. 그래도 내가 이만큼이나마 사회에서 내 몫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던 데는 해병대에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불굴의 의지와 열정, 자신감을 몸으로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어린 나이에 부모님과 생이별한 아픔을 다독여주며 나를 챙겨준 고향 교회 누나들과 동네 어르신들, 그리고 몸 하나밖에 없는 나의 순수한 마음만 믿고 여기까지 와준 집사람이 있었기에 오늘의 비전로지스틱스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지나고 나면 좋은 때였다며 아름다운 추억을 말하곤 하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살이를 홀로 견뎌내야 했던 그 순간들을 몇 마디 말로 위로하기엔 너무 절실하고 힘들었던 시간들이었다. 빨간 명찰을 가슴에 붙이며 세상과 제대로 맞장 뜰 용기를 얻었던 해병대 군생활부터 나 하나만 믿고 따라와 준 아내와의 서주우유 대리점 운영, 치열하게 열정을 불태웠던 화물차 운송과 택배 수송, 그림 판매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없었지만 다 그만큼의 사연과 진한 애환이 묻어나 나름대로 재미있는 경험을 한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평택항이 바라보이는 비전 건물에서 항만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떠오르는 추억과 성취의 공간들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나만의 아름다운 공간으로 기억된다, 어릴 적 논산 육군훈련소 옆 순댓국집과 젊은 날의 열정을 불살라 마련한 인천 작전동의 우리 집, 다 헤진 전투복 새로 스며들던 포항훈련소의 거친 모래톱, 어려울 때마다 쉬어 갔던 미래축구회 회원들과 공 차던 운동장, 푸른 잔디 위를 시원스레 내달리는 18홀 골프 필드, 세계 경제의 흐름과 국내외 경기를 배우던 전경련 최고경영자과정 강의실….

이 모든 순간이 순수한 내 마음만 믿고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나날들이었다. 그래서 오늘따라 더 진하게 내 가슴에 아로새겨진다. 고향 교회 누나들과 동네 어르신들, 해병대 전우들, 화물차 함께한 동료, 미래축구회 회원들, 고려대·전경련 최고경영자과정 선후배까지 자신만의 경험과 언어로 함께해 준 그들이 있어 나는 ‘인생은 한 번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오늘 이 책을 엮으면서 감사드려야 할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지만 특별히 내 인생을 책으로 엮어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기회와 용기를 주신 이음솔 출판사 강인묵 회장님과 편집부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세상에 그리 내세울 것도 없는 변변찮은 제 이야기를 이렇게 훌륭한 책으로 아름답고 정성스럽게 다듬어주신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이 소중한 인연들을 잊지 않고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2022년 초여름이 다가서는 새벽의 서재에서
유 인 권

---「머리말」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1. 아름답던 날들의 기억 내 어릴 적 아스라한 추억의 기억 속에는 누이네 군복 수선집에서 해쭉거리며 환하게 웃는 박박 머리 깎은 형과 내 모습이 보인다. 저만치서 코바늘로 막내의 스웨터를 뜨고 계신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도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눈 뜨면 곁에 있었고, 눈 감아도 맘속 가득했던 연무읍 소룡리의 꿈같은 시절이 가끔은 몹시도 그리워지곤 한다. 부르면 눈물부터 나오는 어머니, 아버지 어느새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는 이순(耳順)에 다다른 나이가 되었지만, 요즘은 부쩍 흙먼지 휘날리는 어릴 적 논산 고향 언덕과 검은 무쇠솥 위로 순댓국 끓는 하얀 연기 자욱한 고향 집이 그리워진다. 내 어릴 적 아스라한 추억의 기억 속에는 누이네 군복 수선집에서 뭐가 그리 좋은지 해쭉거리며 환하게 웃는 박박 머리 깎은 형과 내 모습이 보이고, 저만치서 코바늘로 막내의 스웨터를 뜨고 계신 어머니의 자애로운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다가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논산군 연무읍 소룡리 581번지. 마을에서도 알아주는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세상의 빛을 본 나는 아버지 어머니가 늦둥이로 본 자식답게 이미 부모님 연세는 마흔이 넘으신, 그야말로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자식임이 틀림없었다. 교회 다니는 육군훈련소 옆 순댓국집 가족들 내 인생에서 군대와의 인연은 육군훈련소가 있는 연무읍 소룡리에서 시작되었으니, 어찌 보면 내 유별난 해병대 사랑의 기운은 그때부터 이미 싹튼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인연이란 게 참 묘해서 우리 집은 육군훈련소와 통일문 사이에 있는 두 번째 집에서 순댓국집을 했다. 당시 첫 번째 집은 군인들의 명찰이나 기념품을 파는 마크사였고, 두 번째 집에서 어머님이 순댓국집을 하셨다. 아무래도 동네가 군인들을 상대로 생업을 하는 집들이 많아서 제법 돈벌이가 됐던지 50여 가구가 넘게 사는 꽤 큰 동네였다. 당시 동네는 활기로 넘쳐났고, 우리 집은 ㄷ자 집으로, 동네에서는 꽤 큰 순댓국집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근처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군복 수선집을 했다. 어머니는 군인들 상대로 순댓국도 팔고 면회객에게 식사나 잠자리도 제공하는,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식당 겸 여관 같은 집이었다. 동네에서는 제법 밥술 깨나 뜨는 집이라 당시 베이비붐 세대가 많이 굶는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 세끼 꼬박 챙겨먹고, 누나와 형들의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란 아이였다. 누나는 내가 어릴 때 군복 수선집에서 수선 일을 하다가 스무 살에 시집을 갔다. 어릴 적 우리 집의 분위기는 교회 다니는 가정으로, 동네에서도 꽤 소문난 집이었다. 그때는 웬만한 시골집들이 농사짓고 힘들게 생활하는 분위기였는데 우리 집은 힘든 농사일보다는 식당을 하며 좀 여유 있게 지냈고, 주일날이면 일 안 하고 가족이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했으니 동네에서 별나다면 별날 수도 있는 집이었다. 어머니와는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한문 꽤나 하시는, 좀 배우신 버들 유씨 양반집 독자였다. 동네에선 흠흠 하며 한문도 좀 하시는 유식한 유학자 정도라고나 할까. 아버지는 필적이 좋으셔서 동네 사람들이 어려운 한문 서식이 필요하면 버선발로 아버지를 찾아오셨던 기억이 난다. 외아들에 3대 독자였던 아버지가 전라북도 화산에서 충청남도 연무대로 생활터전을 옮기시게 된 건 나름의 속 시끄러운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 고향은 전라북도 화산으로, 아버지는 한학을 배우시고 농사를 지으셨는데, 그때 씀씀이가 좀 크시고 어른들 모시고 유람하시는 걸 무척 즐기셨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사람이 워낙 통도 크고 동네 어르신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좋아하셔서 동네 어르신들을 버스에 태우고 유람을 자주 다니셨단다. 그러다가 한해 두해 지나 씀씀이가 너무 헤프고 이런저런 마을 일에 너무 열중하다보니 그 많던 재산이 다 어디로 갔는지 빈털터리가 되었단다. 그래서 어느 날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판단에 정든 마을을 등지고 어머니와 새 터전에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게 우리 집 아버지의 내력. 물론 형들과 누나들은 다 화산에서 태어났고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 된 나만 딱 논산에서 태어났으니 별나면 별난 인생의 서막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 인생의 교사였던 어머니, 다가가기 쉬운 친구 같던 아버지 내 어릴 적 연무대에서의 기억은 어머니로부터 시작해서 어머니로 끝난다. 그만큼 소룡리 순댓국집 키다리 아줌마인 오순례 집사님은 동네에서는 인심 좋은 식당 아주머니로, 나에게는 못하는 게 없는 만능 손재주꾼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늘 뜨개질로 스웨터며 장갑을 뜨시거나 뽀얀 연기 나는 무쇠솥에서 순댓국을 담던 일하는 여인의 억척스런 모습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의 스웨터며 장갑, 목도리 정도는 힘도 안 들이고 뜨개실로 만들어 주셨고, 베개 옆 동그란 문양에 손수 자수를 뜨셔서 신비의 원 문양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던 만능 수선쟁이였다. 무엇보다 나는 어머니 손잡고 교회를 다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60년대엔 동네 할머니들이 대부분 절에를 다녀서 오다가다 우리 집을 향해 ‘서양귀신 믿는다’며 손가락질을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게 남는 집 행사는 농번기가 되면 뜨끈하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해서는 집집마다 일일이 돌렸던 일이다. 그때는 어떻게 하면 엄마 떡 심부름을 안 할까 머리를 굴리면서 왜 이렇게 성가신 일을 때 되면 꼭 하려고 하시나 하고 서운하고 짜증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귀찮은 떡 돌리기가 바로 베푸는 습관을 몸소 가르쳐주셨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어머니는 꼭 뭐가 있어서 남에게 베푼다기보다는 그렇게 수시로 떡 돌리고 뭐라도 하나 사람들에게 챙겨주는 것이 버릇이었다. 자식들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면서 큰다고 하는데 나는 어릴 적 어머니와 아버지의 어른 공경하고 배고픈 사람에게 뭐라도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자랐다.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는 게 남에게 베푸는 것인지를 눈과 손, 몸으로 배웠다. 이렇게 몸이 기억하는 나눔의 마음은 지금도 어려운 사람들을 보거나 좀 안돼 보이는 소년소녀 가장들, 홀로 사시는 노인분들을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뭐든 조그만 것이라도 보탬이 되길 바라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는 것 같다. 나에게 어머니가 인생의 교사였다면 아버지는 다가가기 쉬운 친구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가 늘 “교회 다니니까 친구들하고 욕하지 말고 바르게 행동하라”고 강조했다면 아버지는 나에게 속살거리며 어른만의 세계를 보여주셨다. 그때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셨는데, 어머니가 담배만 피우면 하도 뭐라고 하니까 막내보고 망보라 하고는 몰래 몰래 집 담벼락에서 담배를 피우시곤 했다. 그때의 개구쟁이 꼬마는 사진 속에 도리구찌 모자를 쓰고 가운데가 터진 줄 간 내복을 입고 뭐가 그리 싫은지 잔뜩 찌푸린 얼굴을 한 4살배기 꼬마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때는 여름이면 거의 벗고 마루며 방안을 천둥벌거숭이처럼 뛰어다녔다. 집안에서는 제일 꼬마가리로 막내로서 할 일이 딱 정해져 있었다. 이불 개고 설거지 하고 요강 비우고…. 시냇가에 가면 아이들이 요강을 들고 쭉 나와 있는데, 난 요강을 비우러 시냇가에 가는 게 너무 창피했다. 요강을 화장실에 비우고 나면 그걸 들고 냇가에 가서 바닥에 있는 돼지풀에 싹 한번 행궈 가지고 시냇물에 씻어서 가져오는 일이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창피하다는 마음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철없이 놀고 누나 형들한테 응석부리며 지내다가 국민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다. 나는 늦둥이라 몸도 약했고 생일이 음력으로 8월 6일생이니까 9월에 태어나서 다음 해에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를 남들보다 빠른 일곱 살에 갔는데 호적으로는 여섯 살에 학교 간 셈이 되었다. 그때는 시골서 일하느라 바쁘다 보면 보통 1년 늦게 출생신고를 하는 게 예사였다. 그래서 원래는 62년생인데 호적엔 63년생으로 돼 있다. 그래서 내 친구들도 보통 호적상으로 한두 살은 다 많다. 그렇게 학교를 너무 일찍 들어가다 보니 정말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머니가 1학년 때는 집에 와서 연필을 깎아주고 학용품을 챙겨주던 기억이 난다. 시골이라 초등학교는 한 2킬로를 걸어서 갔던 것 같고 중학교는 무려 4킬로를 고개 넘어 걸어서 다녔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기억 속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식당에서 장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아버지는 작은 땅뙈기나마 일구느라 늘 집을 비우셨다. 형은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빈 방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부리나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골목길로 달음박질을 쳤다. 오십 걸음쯤 달려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놀이터가 있었다. 멀리 지평선도 보였다. 벌써 동무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뒷동산으로 향하는 자드락길은 좁고 구불거렸으나 먼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야트막한 언덕은 이유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었다. 눈 뜨면 곁에 있었고, 눈 감아도 맘속 가득했던 연무읍 소룡리의 꿈같은 시절이 가끔은 몹시도 그리워지곤 한다. 개구진 순댓국집 막내아들 말뚝박기, 고무줄, 오징어가이상, 가위생, 신발던지기, 자치기…. 군부대가 들어선 연무대 들녘이며 동네 골목길에선 하루해가 저물도록 놀 것이 무궁무진했다. 동네 앞 큰마당으로, 군인들이 오르던 동네 능선으로, 흙먼지 휘날리던 뒷동산으로 뛰어다니며 놀았다. 피부가 화상을 입어 빨갛게 수포가 생기면서 껍질이 벗겨지고 낫기를 몇 번 반복하다 마침내 까마귀처럼 새까맣게 변하면 한해가 갔다. 겨울이면 빙판에서 팽이를 쳤고, 얼음을 지쳤다. 공부보다는 노는 일에 극성일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때 나는 한창 축구에 넋을 빼앗겼다. 지금도 조기축구회에선 누구보다 공차는 데 선수이다. 둥근 것이면 무엇이든 차고 싶었다. 돼지보로 만든 공이건, 볏짚으로 만든 공이건 둥근 것이라면 재료가 무엇이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로 찰 수 있으면 즐거웠다. 발탄 강아지처럼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느라 바빴던 나는 집안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 섞이면 나는 그만그만한 시골마을의 키 작고 까무잡잡한 개구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친구들과의 우정은 의외로 깊어서 부천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계속해서 서신 왕래를 하였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던 잔칫집 같던 우리 집 풍경 키다리 집사님 집 막내아들은 동네에선 인사 잘하는 꼬맹이로, 친구들끼리는 승부욕 강한 개구쟁이로 하루해가 저물도록 신나게 놀러 다니느라 제법 까만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매의 건강한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가끔은 승부욕이 지나쳐 또래 녀석과 썰매 시합을 하다가 꼬챙이에 얼굴이 찢기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지만 자상한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여간해선 싸움 같은 건 안 하는 귀여운 개구쟁이였다. 동네서 소문난 교회 다니는 집 꼬마답게 교회 다니면서 성탄절이면 연극을 하고 새벽송도 돌면서 저만의 특별한 추억도 쌓아갔다. 어머니는 크리스마스 때 친구들이 새벽송을 오면 떡이랑 식혜, 사탕 같은 걸 내놓으며 추위에 얼은 몸을 데워가도록 해 아이들이 우리 집에 많이 와서 쉬었다 가곤 했다. 아직도 어릴 적 뛰어 놀던 골목길이 기억에 생생하다. 어머니는 고단한 삶을 하나님께 위로받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그때는 모두가 어렵던 시절이라 교회에서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많이 돌보았다. 나는 교회에서 놀러 다니고, 흙장난도 많이 하고, 교회 안에서 뛰어다니면서 구김살 없이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우리가 정신없이 교회 복도를 뛰어다니면 목사님은 웃으면서 “개구쟁이 녀석들, 그만 좀 뛰어다녀라”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어머니가 육군훈련소에서 순댓국집을 하면서 군인들이며 면회객들에게 맛있는 집으로 잘 알려져 제법 재산이 늘어 모아놓은 돈으로 하천부지를 사들였다. 얼마 안 되는 땅이었지만 아버지는 정성껏 이 땅을 개간해서 논으로 만들어놓은 게 여덟 마지기였다. 아버지가 땅을 개간해 놓으면 큰 형과 작은 형이 와서 농사일을 돕곤 했다. 아버지는 거친 땅에서 손수 자갈을 주워내 기름진 땅으로 일궜다. 내 기억에 그 땅에서 몇 해는 농사를 지었던 걸로 안다. 어머니는 전북 고산 분으로 음식솜씨가 좋으셨다. 당시 동네에서는 돼지를 꽤 많이 키웠다. 지금은 돼지를 도살장에서 잡지만 예전에는 명절 되고 동네 잔칫날이고 하면 60근, 70근 하는 돼지를 마을 사람들이 직접 잡았다. 돼지 한 마리를 잡으면 피를 받아서 선짓국 끓이고, 고기를 떼어서 걸어 놓던 게 우리 집이었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에 우리 집에 오면 고기며 음식이며 먹을 것이 풍성해서 친척들이 끊이질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곳간에서 인심 나듯이 그래도 우리 집이 밥술 깨나 뜨는 집이라 친척들이며 이웃들이 심심찮게 집에 끓곤 했다.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잔칫집 같은 집안 분위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는 뒷전이었고 그저 또래들과 어울려 딱지치기, 구슬치기하는 데나 바빴던 철부지 어린아이였다.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군인에 대한 추억 무엇보다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얻은 막내 동생을 누나들은 무척 챙기고 귀여워했다. 그때 동네엔 대중탕에 독탕이 있었는데, 누나들이 나를 독탕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켜주곤 했다. 양복 수선 하는 누나가 유독 나를 귀여워해 줬는데 자신이 수선한 와이셔츠를 입혀서 한껏 멋을 내주기도 했다. 어릴 적 집에서 놀 때는 주로 누나네 양복 수선소 앞에서 놀았다. 누나네 양복 수선소 앞에는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있었다. 누나 가게 옆에 보면 길고 넓은 마루가 있었고, 좁은 마루가 있는 방에 누나가 옷 수선하는 홀이 있었다. 그 작업홀에는 훈련병들이 손에 차는 노란 벙어리장갑이 한 무더기 있었다. 하루는 작은 형과 벙어리장갑을 끼고 복싱을 했다. 그런데 너무 열중해 서로 주먹질을 하다가 그만 형이 나를 홀에서 떨어뜨려서 마당에 박힌 돌멩이에 이마를 찧어서 이마가 찢어지고 말았다. 작은 형은 놀라서 그 자리에서 도망쳤고, 아버지가 급히 뛰어오셔서 나를 나무궤짝에 싣고 달구지에 태워 병원에 급히 갔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 잊히지 않는 개구쟁이 꼬마의 기억은 하마터면 경을 칠 뻔한 사고였다. 그것도 역시 개구진 행동 끝에 나온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당시 우리 마을 앞으로 한창 호남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고, 한 구간의 다리를 만들고 있었다. 마침 다리를 만드느라 다리 밑에 큰 토관을 깔아놓고 있었다. 그때가 장마철로 매일 비가 퍼붓던 때였는데, 그 토관에 비가 많이 오면 토관으로 물이 한꺼번에 스며들어 토관 주위에 큰 회오리가 일곤 했다. 그러면 동네 형들이 우리를 부추겨 ‘저기 들어갔다 나오면 대장 시켜주겠다’고 아이들의 호승심을 자극하곤 했다. 그때 내가 호기심이 동해 그만 그 소용돌이치는 데로 다이빙을 해 들어갔다. 그런데 다이빙을 했던 기억만 나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소용돌이치는 토관에 빨려 들어갔던 것이다. 급작스럽게 돌변한 사태에 형들은 놀라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으로 마침 근처 천울치 사격장으로 지나가던 한 훈련병이 물살에 휩쓸려가는 나를 구해냈고, 위생병이 달려와 인공호흡을 해서 겨우 살려냈다고 한다. 국민학교 3학년 때였는데, 아마도 그때부터 나는 군인아저씨에 대해서 꽤 좋은 감정을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 군인은 낯설고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고맙고 정겨운 사람으로 인식됐던 것은 우리 집이 육군훈련소 옆이었고, 어머니가 군인들을 상대로 순댓국집을 해서 가족이 먹고 살았고, 여기에 더해 내 생명의 은인이 군인이었으니 어쩌면 이 모든 일들이 내가 해병대를 자원하게 된 수많은 동기 중의 하나쯤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코흘리개 까까중 꼬마의 따사로운 기억으로 남아있는 소룡리의 추억 연무읍 소룡리의 어린 날의 기억은 코흘리개 또래 아이들하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싸돌아다녔던 즐거운 장난밖에 없다. 동네 아이들하고 구슬치기, 자치기, 딱지치기는 원 없이 해봤다. 아버지는 연자새 연을 만들어서 막내 손에 쥐어 주었고, 어머니는 스웨터며 모자를 떠서 막내가 엄동설한에도 마음껏 뛰어 놀도록 따뜻하게 중무장해 주었다. 겨울이면 꽁꽁 얼은 웅덩이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썰매를 탔다. 그때는 논이며 언덕에서 뛰어 노는 데도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웅덩이에서 썰매 타다 저도 모르게 양말이 젖으면 모닥불 피워놓고 양말 말리다가 양말이 빵구가 나곤 했다. 빵구 난 양말을 가져가면 어머니는 한번 오지게 야단을 치고는 바로 바느질로 기워주셨다. 그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꿰맨 양말을 신고 다음날 또 얼음 지치러 갔던 어릴 적 기억이 물컹물컹 되살아난다. 아마도 요즘 아이들은 느낄 수 없는 자연 속에서 뛰놀았던 우리 시대 어른들의 아날로그 개구쟁이 시절 추억일 것이다. 어릴 때는 원 없이 뛰어 놀았던 기억만 남고 집안일을 도왔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나는 시골아이들은 다 해봤다는 모내기 한번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아버지가 원두막을 지어주면 새나 쫓고 논밭 일 하는 형들 새참이나 나른 기억밖에 없다. 언뜻언뜻 생각나는 건 큰 형이 객지에 나갔다가 가끔씩 집에 오면 형과 함께 교회를 같이 갔던 기억 정도가 떠오른다. 당시 소룡리는 제법 규모가 큰 동네여서 국민학교도 꽤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다 보니 기억나는 선생님도 나에게 잘해 주었던 선생님만 기억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윤해중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그분은 소싯적에 씨름을 하셨던 분으로, 몸집이 건장하고 얼굴이 시커멓던 분으로 기억한다. 선생님은 내가 생긴 게 좀 까맣고 다부지게 보여서 날 좋아하셨던 걸로 기억한다. 또 한 분은 1학년 때 이화자 선생님이라고 오르간을 잘 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음악시간에 내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자꾸 아이들 앞에서 노래를 시켰던 분이다. 가정통신란에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래도 없는 재주에 노래는 좀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국민학교 때는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지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어머니의 말씀밖에 잘 기억에 남는 게 없다. 그때만 해도 어머니가 교회 가는 걸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하셔서 나는 교회를 안 가면 죄 받는 줄 알고 착실하게 교회에 다녔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어머니 말씀을 안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개구지면서도 다른 아이들 같지 않게 착하게 생활했던 코흘리개 까까중 꼬마가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철없던 시절에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했던 데는 어릴 때부터 막내에게 착한 것과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손수 보여주셨던 어머니의 영향이 나를 바로잡았던 것 같다. 어머니, 아버지와의 영이별 살면서 홀로 헤쳐나가야 했던 일들이 많았던 나는 언제부턴지 자연스럽게 외로움에 무척 익숙해지며 살았다.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외로움보다 더 마음 아픈 단어가 ‘그리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나 홀로 감당할 몫의 감정이지만, 그립다는 건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내 그리운 이름 여섯 글자, 유기원, 오순례. 내 SNS 친구 중에 스물여섯 된 여대생이 ‘그립다’는 단어를 시처럼 적어놓고는 마지막에 ‘엄마’라고 적은 것을 봤다. 내 나이 열다섯, 나는 아직 부모님과의 이별을 생각도 못할 나이에 그분들과 영영 이별을 하고 말았다. 슬픈 일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다 언제나 그렇듯 세상에는 안 좋은 일들은 어김없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다. 육군훈련소 근처 동네라 군인들이며 면회객들을 상대해 늘 호경기만 지속될 것 같던 동네도 서서히 운이 쇠하고 있었다. 그렇게 북적이던 소룡리 50가구도 동네 운이 막히자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다. 동네 약방도 뜨고 엄마 식당도 장사가 잘 안 되면서 급격히 어머니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시름시름 앓더니 병원에 입원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간경화로 급속히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의 병으로 인해 우리 집의 가족력으로 간염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때는 B형 간염주사도 없어서 간염 보균자가 애기를 낳으면 젖을 먹이면 안 됐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누나가 가족력으로 간염이 유전돼 큰 누님도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자 우리 집도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우리 집의 경제력이랄 수 있는 식당도 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는 어머니 병원비라도 벌어 오시겠다며 서울로 올라가셨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서울 한남동에 한남낚시며 한남 기름집이 아버지의 몇 촌 친척 동생이 하시는 가게라 그 집을 고모집이라고 하면서 며칠씩 서울 갔다 오시곤 했다. 아버지는 집에 오실 때마다 택시 타고 오셔선 왕방울만한 알사탕을 한 아름 갖고 오셔서 내게 주시곤 하셨다. 중학교를 다니던 중에 집안이 급격히 기울어지면서 평화롭던 분위기가 갑자기 가시방석이 되고 말았다. 엄마는 병원을 다녀야 되지, 작은 누나는 영락신학대학을 다니지 해서 없는 살림에 돈 들어갈 곳만 많이 생겼다. 원래 어머니를 전도한 게 작은 누나여서 어머니는 작은 누나에게 주도적으로 대학 학비를 대주며 투자를 많이 했다. 당시 내 주변을 둘러보면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온 사람이 몇 없었으니 작은 누나를 대학까지 보낼 생각을 했다는 건 좀 특별한 케이스이긴 했다. 마을에서 농협에 근무하며 ‘자식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부모 몇 명 빼고는 고등교육을 잘 시키려고 하지 않는 풍토가 있었다. 그렇게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가을에 하늘나라로 가시고 말았다. 슬픈 날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다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서러운데 아버지마저 가을부터 병세가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워 눈물부터 나는 어머니, 아버지 그렇게 슬프고 고단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니 중3 수험생인 내가 제대로 공부할 마음이나 있었겠는가. 그래도 어린 마음에 실업계 고등학교라도 가서 집에 보탬이라도 돼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전기로 실업계고 기계과를 지원했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다. 그래도 진학은 포기할 수 없어서 집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당시 사정은 학교를 갈 형편도 못 될 정도로 아버지 병세가 심해져 고등학교 수업을 정상적으로 들은 날이 별로 없었다. 당시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살았었고, 외갓집 조카가 와서 밥도 해주고 집안일도 해주고 했다. 예전에는 식구끼리 그렇게 보살펴주는 게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루는 아버지께 “우리 집 형편이 너무 어려우니 돈 벌러 서울에 가면 안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휑하니 먼 곳만 응시하며 내게 아무런 말도 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그날 아버지가 휑하니 먼 데를 응시하던 공허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한참을 그렇게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니 정 돈 벌고 싶으면 서울에 가보고 아니면 다시 돌아오라고 하셨다. 다음날 서울에 먼저 가 자리 잡고 있다는 동네 아저씨가 있다는 월계동으로 갔다. 그런데 가서 보니 그분도 날 봐줄 형편은 못 되는 어려운 생활을 하셨다. 난 며칠 있다가 다시 고향으로 왔다. 엄마가 떠나고 얼마 안 됐는데 아버지마저 아프시니 그저 눈물밖에 나지 않았다. 시골에 오니 친구들은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난 집에만 틀어박혀 아버지 병간호하는 신세도 처량하고 아이들 보는 것도 민망했다. 예전에 같이 교회를 다녔던 친구들이 “아버지 많이 편찮으시냐?”고 안부를 묻는 것도 싫었고, 노는 녀석들이 밤이면 샴페인 먹고 춤추고 노는 것도 보기 싫었다. 얼마지 않아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 나는 고향 친구들과 등을 졌다기보다는 그냥 무작정 서울로 도망치듯이 상경하고 말았다. 내가 서울로 상경하자 큰 형은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막내는 고등학교는 다녀야 하지 않겠냐며 나를 찾아 왔다. 결국 형님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고등학교는 다니기로 했다. 그때는 어린 마음에도 사는 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교회 다니며 착하게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토록 모진 고난이 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막내는 태권도 보내준다고 태권도장을 찾기도 했고, 공차는 거 좋아하니까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축구공을 사주기도 했다. 어머니는 동네 대항 축구대회도 주도해서 나가는 막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고 싶었던 그런 분이었다. 어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한동안 나는 그리움 같은 단어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단어들이 있어 표현이라도 할 수 있으니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얼마 전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영일이에게 연락이 왔다. 영일이는 오산대 총무과에 재직하던 친군데 퇴직하고 고향마을에 가서 집 짓고 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인권아, 엄마가 네가 그렇게 보고 싶대.” “그래? 내가 시간 맞춰서 꼭 갈게.” 친구의 어머니는 조성업 권사님이고 옆집에는 김옥선 집사님이 사셨다. 두 분은 고향 소룡교회(현 소양교회)에서 어머니하고 진짜 믿음의 친구로 단짝이셨던 분들이셨다. 부모님 산소를 들러 어머님을 뵈니 “아이구 인권아, 너 키다리 집사님댁 막내 맞지. 그래 네가 어머니 아버지 임종을 잘 모셔서 잘될 줄 알았다.”며 연신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며 감회에 젖으셨다. 그러더니 “내가 너를 보고 죽게 돼서 다행이다. 널 못 볼 줄 알았지.” 하며 눈시울을 적시는 것이었다. 두 분 어머니는 내가 부모님한테 잘해서 잘 될 줄 알았다며 어려서도 그렇게 착하더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니 늠름하게 성공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며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당신은 그렇게 힘드셨으면서도 아들 녀석이 기죽을까봐 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으셨던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여자 혼자의 몸으로 생떼 같은 자식들을 기죽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게 하려고 그렇게 고생고생하시며 장갑이며 모자며 스웨터를 뜨시던 그 고운 손. 자식들 잠자기만을 기다려 부엌 한 구석에서 삶의 신산한 무게에 고개 숙여 눈물을 훔치시던 한 여자의 서러운 손. 그 손과 정성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이렇게 사회에 나와 사람 구실하며 살고 있다. 가끔 외로움이 사무쳐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을 때나 원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아내와 함께 훌쩍 부모님을 모신 화산의 산소를 들르곤 한다. 부모님 산소는 우리 살던 고향에서 재 하나 넘으면 있는 아버님 선산인 완주 화산에 모셨다. 살아생전 독자이셨던 아버님이 있는 재산 다 털어먹고 밤새 연무대로 야반도주하다시피 오셨지만 그래도 죽어서는 고향 선산이 더 그리우셨나보다. 추석 명절이면 나는 좋은 차를 타고 아들딸과 손자들을 데리고, 아들손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산소를 찾는다. 삼십 년 전 막내는 그렇게 타지에서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조그만 회사 사장이 돼서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다. “엄마 막내 왔어. 아버지 막내 왔어. 막내며느리도 함께 왔어. 오늘은 기분 좋아. 아빠, 나 좋은 차 타고 왔어.” 하고 부모님 들으라고 한바탕 자랑을 한다. 그러면 부모님은 내 말을 다 듣고 흐뭇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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