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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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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1

[ EPUB ]
신해영 | 가하 | 2013년 09월 2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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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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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년 0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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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5.04M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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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신해영
처서에 태어난 수줍은 성격의 소유자.

▣ 출간작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중매결혼-연애 유전자 제로의 커플이 결혼하는 법』
『시에스타』
『에테시아, 그 바람이』
『나라를 구했다!』
『열일곱 번째 계절』
『서머타임』(공저)
『절반의 연애』
『스완 레이크』
『일식』
『개도 사랑을 한다』
『이모네 집에 갔는데 이모는 없고』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차에 올라탄 태주가 안전벨트를 매는 사이 용철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타라고 한 적도 없건만 자기 차라도 되는 양 편한 자세를 잡은 용철이 두리번거렸다.
“어라? 차 바꿨냐?”
“아니야. 바꾼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데 네 차는 어떻게 이렇게 항상 번쩍번쩍 새 거냐?”
“난 늘 차를 쓰레기장으로 만드는 네가 더 신기해.”
퉁명스럽게 쏜 태주가 스마트키의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길이 잘 든 차가 부드럽게 주차장을 돌아 지상으로 올라 도로로 들어섰다.
그러는 중에도 용철의 입은 쉬지 않았다.
“차만 해도 그래. 솔직히 대한민국에서 차 하면 강은 모터스 아니냐? 그런데 넌 2위도 한참 격차가 벌어진 2위인 도바의 차를 샀지.”
“내 눈치를 본다던 김용철 사무관, 29세 5급 씨께서는 강은 모터스의 최고급 세단을 사셨고 말이야.”
“야!”
용철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인간적으로 난 도바 차는 못 타겠어. 외교관인 게 죄라고 외제차는 못 타겠으니 강은 차라도 타야지. 그리고 말이다……. 솔직히 어지간한 외제차보다는 강은 모터스가 나아. 특히 내 애마(愛馬)는 최고라고.”
“비싸.”
“그만큼 가치가 있다니까? 넌 그 차 엑셀을 한번 밟아봐야 해. 자유로를 쭉 뻗어나가는 그 느낌을 느껴봐야, 아, 내가 그때 김용철 말을 듣고 강은 모터스의 차를 살 걸 그랬구나, 이건 차가 아니라 날개로구나, 한단 말이야. 그리고 말이야…….”
용철이 히죽 웃었다.
“네가 도바를 산 게 어디 비싸서냐? 강은이 싫어서 그렇지.”
“오해십니다.”
“오해는 무슨.”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태주의 말을 잘라버린 용철이 시트에 기대 두 손을 펼쳤다.
“내가 대한민국 역사교육에 아쉬운 점은 딱 하나야. 대한민국 재계의 강씨 집안과 정계의 한씨 집안사(史), 아니 전쟁사(史)를 빼고 대한민국 근대사를 논한다는 건 어불성설(語不成說)인데 그 부분이 쏙 빠져 있단 말이야. 물론…….”
유감 천만한 표정으로, 그러나 한편으로는 친구를 놀리는 즐거움에 가득 차서 용철이 태주를 바라보았다.
“그 원한의 역사가 현재도 이어지고 있으니 역사책에 올리긴 어렵겠지만 말이야.”
“과장이야.”
딱 잘랐지만 태주도 알고 있었다. 과장은커녕 직접 겪지 못한 용철은 그 원한의 깊이를 터무니없이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히죽대며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리라.
일제강점기가 끝날 무렵 지주와 소작쟁의 지도자로 시작한 강씨 집안과 한씨 집안의 악연은 전후(戰後), 미군정 때 한 번 더 부딪치고 4.19 민주화 혁명 때 또 한 번,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에서 제 3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경제발전시기에 다시……. 그렇게 대한민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하며 이어져왔다. 한 번만 서로의 길을 방해해도 원수가 되는 게 사람이다. 두 집안 중 하나가 망했다면 차라리 원한관계가 해소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마치 시소게임처럼 한 번 승(勝)하면 한 번 패(敗), 둘 중 하나가 완전히 명맥이 끊어지는 법도 없었고 둘 중 하나가 완전히 승기를 잡는 법도 없었다. 정계의 거물 한씨 일가는 강은을 잡기 위해 재계에 자리를 잡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으나 기세를 잡지 못했고, 재계의 거물 강씨는 정치권에 줄을 대기 위해 가리는 것이 없었으나 명목상의 버팀목 이상의 힘을 얻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더더욱 서로가 눈엣가시 같았다. 길에서 마주친 아이들은 끊임없이 투덕거렸고, 어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의 일을 방해하고 제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애썼다. 수십 번을 부딪치고도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에 서로 치를 떠는 증오만 깊어졌다.
증오란 공기 속에 스며든 치명적인 독(毒)과 같아서 직접 강씨 일가와 마주친 적이 없는 한씨 일가도 강씨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으며, 강씨 일가의 성(城)인 강은 그룹을 보이콧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한씨인 태주 역시 그랬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유 따위는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소한 시비를 제외하고 그는 강씨 집안과 직접적으로 마주친 적도 없었고, 그들로 인해 피해라고 부를 만한 피해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한승구 박사가 설립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한씨 집안의 사람들로 채워진 사립이었다. 법상으로는 거주요건에 의한 진학이었지만 대한민국에 법대로 돌아가는 일이 어디 흔하던가? 혹여 어쩌다 강씨 집안 계열의 학생이 진학했다가도 못 견뎌 전학 가는 일이 당연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구석 강씨에 대한 거부감은 자리 잡고 있었다. 계속해서 집안끼리 얽혀들었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친과 모친으로부터 ‘강씨는 피도 눈물도 없는 독한 인종들’ 이라는 욕을 들어오다 보니 ‘강씨와 얽혀서 좋은 일이 없다.’는 말이 부지불식간에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
“정략결혼이라…….”
태주가 중얼거렸다.
“왜?”
“정략결혼 같은 걸 할 여자로는 안 보이는데…….”
용철이 별소리를 다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뭘 봐서? 관상을 봐서? 그렇게 따지면 네 관상도 정략결혼 할 관상은 아니야.”
“나?”
태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무슨 정략결혼을 해?”
“쯔쯔……. 이게 이렇게 또 단순해요. 춘부장 어르신께서 너 외교부 들어온다고 했을 때 뭐라 하시던? 인맥 잘 만들어두라지 않으시던?”
물론 아버지의 말이 무슨 뜻인지 태주도 모르지 않았다.
공화당 당수 한필호 의원의 평생의 꿈은 대권이었으나 강은의 뒷공작으로 매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철천지원수! 물론 한 의원 역시 국정감사든 세무조사든 그가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해 강은을 괴롭혔으므로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러나 본디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은 모르고 당한 일만 기억하는 법, 한 의원의 원한은 깊었고 꿈에 대한 열망은 짙어졌다. 그 꿈에 대한 열망은 물론 자식, 정확히 말하자면 한태주에게로 이어졌다. 언젠가 아들은 자신이 못 얻은 대권을 얻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모든 부모의 희망이 그렇듯 희망일 뿐.
“난 생각 없어. 생각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겠지만 생각도 없다고.”
“맞아. 생각 있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지만 생각 없다고 해서 되지 않는 일도 아니지. 두고 봐라. 어디 그게 네 맘대로 되나. 넌 누가 봐도 그럴 만하다 싶은 여자랑 결혼할걸? 그리고 어느 날엔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대권후보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거다.”
“허튼소리.”
“누구 말이 옳나 두고 보자고.”
정말 자신 있다는 듯이 용철이 가슴을 툭 쳤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건 태주도 알았다. 뿌리 깊은 정치인 집안에서 자랐으니 태주 역시 정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등 떠밀려 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었다. 무얼 하든 그 자신이 원할 때, 그 자신이 필요하다고 할 때만 움직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용철이 쓰윽 웃었다. 그 폼이 심히 수상해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태주의 눈썹이 휘었다.
“본론?”
“그래. 본론!”
용철이 아직까지도 들고 있던 신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본론은 뭐가 어찌 되었든 이 여자의 행보는 너에게 의미가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 여자를 보러 가야 한다는 거야.”
저도 모르게 태주가 용철을 흘깃 바라보았다. 용철은 신문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러 간다고?”
용철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강서인 귀국환영회에 가자. 재즈 바를 통째로 빌려서 한다더라.”

오랜만에 돌아온 집은 변함이 없었다. 강은의 성채, 강 회장이 풍수의 대가들을 동원해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는 대지면적 2434㎡의 지상 3층 지하 2층의 주택은 시간이 고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집이었다. 절대로 함락시킬 수 없는 철옹성 같은 위풍당당함 속에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제 떠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당연함이 있었다. 나면서부터 서인이 속한 곳이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집에 돌아오니 좋니?”
통유리창을 꽉 채우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데 오빠 서혁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말없이 미소 지으며 서인이 뱅글 몸을 돌렸다. 아직 이른 봄바람이 나는 스커트가 팔랑 하고 날아올랐다가 내려앉았다.
“늦은 시간에야 환영회가 시작할 테니 그전에는 좀 쉬는 게 나을 게다.”
점잖은 서혁의 충고에 서인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어색하고 불편할 때의 그녀의 버릇이었다.
“귀국환영회라니…….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거 같잖아요.”
주목을 받는 것은 익숙했다. 어렸을 때부터 서인은 공주였다.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어린 시절을 찍어낸 사진에서조차 그녀는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크게는 일간지에, 작게는 가십지에 오르내렸다.
그게 당연했던 시절에는 몰랐다. 그 시선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를.
옥스퍼드에서의 시간은 좋았다. 그곳에서 서인은 강은의 강서인이 아니라 그냥 강서인일 수 있었다. 그곳에서조차 ‘강은’ 이라는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친구가 없지 않았지만 한국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에서 서인은 자신을 온전한 강서인으로 보아주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친구들, 동료들……. 하다못해 가족에게조차 서인은 강은의 프린세스 강서인이었다.
“대단한 사람이지. 너는 강은의 딸이다. 강은의 딸이 대단하지 않으면 그 누가 대단하겠어?”
단단한 목소리로 서인의 말을 자르며 다가오는 강 회장의 얼굴에는 뿌듯함이 넘치고 흘렀다. 보기만 해도 이렇게 좋은 딸을 어찌 4년이나 외국에 내보냈냐며 타박하는 황 여사의 말이 헛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지만 오빠도 있는데 매일 저만 주목 받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
“나야 항상 여기 있는 사람인데 신경 쓸 필요 없어.”
서혁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서인이 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런 서혁을 보며 서인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쉬고 싶고요.”
“옥스퍼드에서 네 멋대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여기서도 그런 것이 아니야. 자유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니?”
“제 의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로군요.”
서인이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앙다물었다.
“슬슬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고……. 한가(家) 놈들이 네 귀국으로 술렁이고 있다니 본때를 보여줘야지.”
핏, 하고 서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내가 뭐라고 술렁인다는 말이에요? 여튼 알았어요. 하지만 나한테 피아노를 치라거나, 노래를 하라고 하지는 말아요.”
“그건 공주님 맘대로.”
서혁의 눈이 비로소 호선을 그렸다.
“아, 그리고…….”
막 돌아서려던 서인이 빙글 몸을 돌렸다.
“재단문제는 저 하고 싶은 대로 맡겨두시겠다는 약속, 잊지 않으셨죠?”
허락의 뜻으로 서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꽃처럼 웃은 서인이 통통 튀는 것 같은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갔다.
“정 의원 쪽은 뭐라더냐?”
서인의 신영이 2층 난간 너머로 완전히 사라진 후에도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서혁이 강 회장의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감지덕지죠. 아마 지금쯤 그 노인네, 아들 때 빼고 광내느라 애 좀 쓰고 있을 겁니다.”
서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빛냈다.
“정민형……, 네가 보기엔 괜찮은 놈이고?”
“아버지가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랬다. 자민당의 정 의원이야 눈에 띌 것도 거스를 것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자라 생각하는 강 회장이었지만 그 아들은 달랐다. 고양이 아래에서도 호랑이는 나는 법인지 제법 기품이 있고 사내다웠으며 능력도 그만그만……. 적어도 제 밥그릇을 챙길 줄 아는 놈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사내에게 있어서 그보다 더 필요한 자질이 어디 있으리. 그뿐인가? 서인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림이 썩 괜찮았다. 하루 이틀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지중지했던 딸의 일이라 그런지 마음이 뭔가 마뜩찮았다. 그런 심사를 내비치자 황 여사는 딸 둔 아비의 노파심이라며 그를 놀려대었다. 그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서인이 보통 딸이던가? 영영 없으리라 여겼던 유일한 제 핏줄이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애가 달아 차마 자주 쳐다보기도 어려웠다. 비판적이기로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인데도 딸의 단점이 도무지 눈에 띄지 않았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덜컥 옥스퍼드의 어드미션을 들고 왔을 때도, 바람처럼 홀홀히 집을 떠나 이국의 땅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사진을 보내왔을 때도 서인은 완벽했다.
“그래, 괜찮은 놈이지.”
강 회장은 불안을 씻어내기라도 하려는 듯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민형이라면 약간만 밀어줘도 저 원수 한가(家) 놈을 물 먹이고 대권을 쥘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한가(家) 놈의 자식에게 밀리지는 않았다. 잘만 키우면 이번에야말로 저 원수 한가 놈들을 깔끔히 몰아내고 강씨 천하로 대한민국을 뒤덮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조바심이 일었다.
“환영회는 환영회고, 그냥 따로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무에 귀찮게 일을 이리 복잡하게 만들어? 만나면 인연이지 그게 우연이든 필연이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나 서혁의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
“아이고, 아버지. 서인이 성격 아시면서요. 은근 반골기질에 일단 발동 걸리면 그 고집을 누가 꺾어요? 어른들 뜻 섞였다는 걸 알면 없는 시비도 만들어서 걸 텐데요.”
“그 아이가 내 뜻을 거스른 적은 없다.”
“행여나 고집부릴 일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럴까, 하고 강 회장은 고개를 기울였다. 젊은 것들의 일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할 뿐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여나 삐꺽거릴 수도 있는 일은 아예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었던 그로서는 굳이 우연을 빙자해서 인연을 맺을 필요성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너만 믿는다.”
“걱정 마셔요.”
서혁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강 회장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혼자 남겨진 서혁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서재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후우!”
서재 문을 닫은 서혁은 답답하게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늦췄다. 새벽나절부터 긴장을 해서 그런지 온몸이 다 뻐근했다.
긴장할 필요 없었잖아, 서인은 여전해.
키가 낮은 검은 소파에 몸을 던진 서혁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렸다. 목을 뒤로 기대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금방이라도 노곤하니 잠에 빠져들 것 같았다. 지금 잠이 들면, 어떤 꿈을 꿀지 서혁은 알고 있었다. 24년 전, 서인이 태어나던 그날의 꿈이다. 그의 악몽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던 그날. 6살, 처음 서인을 보았을 때의 감각은 무척이나 선연한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는 2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그날 그 순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 딸이어야 해. 아들이면 네가 설 자리가 없어. 절대 안 돼. 필요하다고 데려가놓고, 그렇게는 안 되지.
생각해보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을 뿐이었다. 그 아이가 무얼 안다고 어른들은 그렇게 잔인한 소리를 해댔던 걸까?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눈에도 처음 만난 강 회장과 황 여사는 엄청난 사람이었다. 나름 콧대 높았던 친부와 친모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강씨 가문의 직계와 방계 차이라며 친모는 그의 귀에 대고 어린 그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속삭였다. 알 수 있었던 것은 강 회장의 눈에 들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아들이 없는 강 회장의 아들이 되어야 했다.
황 여사의 배가 불러오던 그날부터, 서혁은 두려움에 떨었다. 뭘 안다고 그렇게 목 죄이도록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이 무얼 가졌는지도 몰랐던 어린아이는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인이 태어났던 날, 여동생이라는 황 여사의 말에 그가 울음을 터트린 이유를 황 여사는 몰랐다. 그 누구도 몰랐다.
이제 괜찮아. 이제 다 내 거야.
다 좋았다. 무뚝뚝한 듯 정 없어 보였던 강 회장이 노골적으로 서인을 아끼는 것도, 자애롭던 황 여사의 관심을 갓난아기에게 빼앗기는 것도, 다 좋았다. 자라면서 그래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스포트라이트가 서인에게 쏠리는 것도 괜찮았다. 풀잎보다 가벼운 호사가들의 입놀림에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그가 강은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서인은 그를 보고 해맑게 웃었고, 말 잘 듣는 그의 착한 여동생이었다. 그녀가 팔랑거리며 웃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강은을 지키고 그 안에서 서인이 행복한 것, 그것이 바로 서혁에게 있어서 힘의 과시방법이었다. 불안에 떨던 것은 다 지난 일이었다. 지금 서인은 그에게 있어 자랑스러운 동생이자 그와 강은이 가진 가장 화려한 재산이다.

같은 시간 서인은 책상에 앉아 예전 일기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고등학교 시절……, 거꾸로 시간을 올라가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꽤나 조숙했고 진지한 성격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꼭꼭 눌러쓴 연필의 글씨체가 나라정치를, 경제를, 사회전반을 고민하고 있었다. 어린 그녀가 쓴 글을 보는 서인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한참을 책장을 넘기던 서인은 가볍게 한숨을 쉬며 일기장을 덮었다.
어렸을 때가 좋았다. 그때는 모든 것이 좀 더 단순하고 명확했다. 점점 뒤로 갈수록, 일기장은 읽기가 어려워졌다. 처음 강은의 비리문제를 알았을 때, 감세를 빙자한 탈세와 정계와의 야합, 노사관계와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고통을 알았을 때, 늘 자랑스러웠던 아버지와 강은의 비정의(非正義)성과 부정직(不正直)의 증거들을 확인하며 어린 서인은 괴로워했다. 그렇게 옥스퍼드로 떠났다. 해답을 찾기 위해서.
그리고 4년 만에, 결론을 찾지 못한 채 돌아왔다.
4년 동안 자유를 만끽했지만 그뿐, 해답은 찾을 수 없었다. 경영학을 아무리 공부해도, ‘정직한 기업’의 존재가능성에 대한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것을 원한다고 말하는 대중조차 그런 기업이 존재하면 외면한다는 것이 학술적인 분석이었다.
어쩌면 원래 해답 같은 건 애당초 없었는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감내하고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녹몽(綠夢)에 대한 꿈을 꾼 것은 돌아오기 직전이었다. 전체 시스템을 모두 바꾸는 것은 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부분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진정한 사회공헌이 가능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것이 지금 서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환경재단은 사회공헌도가 높아 세금감면과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서 모두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강 회장과 서혁은 별다른 반대 없이 허락해주었다. 이 정도는 두 사람의 허용범위 안쪽의 일이라는 것은 서인도 미리 계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서인에게 원하는 것은 매스컴의 집중포화를 받는 화려한 인형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어쨌든 사랑하는 아버지고 오빠였다. 비록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서인은 그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서인아.”
똑똑 하고 노크소리와 겹쳐져 방문이 열렸다. 성급한 성격의 황 여사가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문을 연 것이다.
“어머니.”
서인이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팔을 벌려 황 여사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유, 미안해. 하필 아침부터 봉사활동을 잡아놔가지고……. 내가 빠지면 당장 손 하나가 비어서 사람들 고생할 생각을 하니까 빠지기가 좀 그래가지고.”
“뭘요……. 괜찮아요. 오빠가 저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무슨 체포하듯 에워싸고 끌고 들어왔어요. 선글라스를 쓴 경호원들이 어찌나 많던지 누가 봤으면 나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을 거예요.”
“서혁이가 너 온다고 얼마나 신경 썼는지 몰라. 정원사 아저씨한테도 너 좋아하는 꽃 심으라고 어찌나 닦달을 하던지, 내가 딱해서 그만하라고 했어. 그 사람도 자기 하던 일이 있는데 그놈의 자식 성격이 자기 입에서 말 떨어지면 당장 해야 하니…….”
“안 그래도 봤어요. 화단이 엄청 예쁘던데요. 집에 왔구나, 싶어졌어요.”
“얘, 당분간 식단 기대해도 돼. 서혁이 볶아치는 바람에 아줌마가 잔뜩 힘준 모양이더라.”
아직 찬바람이 부는 날씨라 밖에서 막 들어온 황 여사의 손이 찼다. 그 손을 잡아끌어 서인이 함께 침대 위에 앉았다. 마주보는 모녀의 눈빛이 정다웠다. 황 여사의 천진난만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서인은 비로소 귀국한 것이 실감이 났다.
“서혁이 놈, 성질 급해서……. 너 피곤하지 않아? 귀국환영회 한다고 난리던데.”
“괜찮아요.”
서인이 생긋 웃었다. 집에 돌아온 것이다.

실내에는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에 어울리는 검은 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검은 밤 위로 푸른 조명이 흐르고 있었다.
회원제 고급바인 로트바르트에서 열린 서인의 귀국환영회는 막 정점을 지난 다음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샴페인이 터트려지고, 귀를 울리는 크리스털 잔이 부딪치는 소리, 저마다 다른 높낮이의 웃음소리가 음악에 섞여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몇 명이 왔다 간 건지, 누가 인사를 하고 누구 손을 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조명 속에서 사람들은 마치 그림자처럼 보였다. 음악도, 반짝이는 샹들리에와 낯선 색감의 벽도.
시야에 안개가 차오른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서인은 눈을 감았다 떴다.
“피곤한가 보군요.”
민형이 자연스럽게 서인이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정민형. 자민당의 정 의원 자제라고 소개받은 남자는 오늘 내내 서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꽤 많은 남자들이 서인의 기사를 자청했었다. 그것이 실질적인 이해관계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서인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였다. 이 남자는 무얼 원하는 걸까, 잠시 생각해보던 서인은 곧 머릿속을 털어내었다. 공화당이 강은과 척을 진 것이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보니 자금줄은 모두 자민당과 연결되어 있다. 새삼 생각하고 뭣하고 할 일도 아닌 것이다.
“조금 자고 나왔는데도 확실히 아직 시차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았나 봐요.”
“댁에 모셔다드릴까요?”
서인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호스트야 오빠라 해도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죠.”
“서인아!”
한 무리의 여자들이 큰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고등학교 동문회의 간사들이었다. 해외에 있는 서인에게도 부지런히 정보를 물어다주고 부단히도 연락을 취했던 가까운 사람들이다.
“언니.”
“오랜만이다. 더 예뻐졌어!”
부산을 떠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서인의 얼굴 위로 한 걸음 물러선 민형의 시선이 내려앉았다.
처음 정 의원이 강은과의 혼사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욕심 많은 영감이 늘그막에 노망이라도 난 게 아닌가 싶었다. 강은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민형의 집안 또한 사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차고 넘칠 정도였다. 정 의원이 축재한 부(富) 외에도 그의 외가 또한 알아주는 재력가였다. 두 노인네뿐 아니라 자자손손, 10대까지는 몰라도 그의 아들의 아들까지는 사치스럽게 생을 살 수 있는 그런 정도. 그런데 정략결혼이라니, 더 욕심을 부리다니 지나치다 생각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러나.
서인과 떠드는 여자들을 바라보며 샴페인 잔을 살짝 흔들자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왔다. 블랑 드 블랑이다. 사법연수원 졸업 때 거액의 연봉을 약속받고 로펌으로 간 동기와 함께 마신 적이 있는, 병당 50만 원을 호가하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그러나 오늘 여기에서는 무척이나 흔한 술이었다. 크리스탈 역시 대수롭지 않게 마실 수 있었다.
부(富)의 기준이 달랐다. 당연함의 기준이 달랐다.
그리고 강서인 또한 달랐다.
민형이 아는 여자들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돈을 좋아했다. 아니,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좋아했다. 가방이나 보석을 사달라며 제 육체의 매력을 이용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제법 가졌다는 여자들도 그랬다. 정계, 재계……. 더 욕심 부릴 필요 없을 것 같은 상류층들도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보여주면 누구나 눈이 벌게졌다.
그러나 강서인은 다르다.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강서인처럼 되는 걸까? 단아하고 조용하게,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서인은 소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볍게 웃는 얼굴이나 자연스럽게 보이는 자신감, 그리고 잘 교육받은 예의범절까지……. 덜컥 욕심이 고개를 내밀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단아한 분위기였다. 미모는 세월이 가면 시들고, 몸매는 무너지려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분위기, 특히 단아한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건이 좋다고 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자 연습해서 생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코나 눈매를 뜯어고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타고난 빛이었다. 그리고 강서인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단정하게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는 하얀 손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은 옷차림이었지만 함께 있는 여자들 중 단연 시선을 끌었다. 담담하지만 함께 있는 여자들 중 가장 영향력이 있어 보였다. 적당히 무심하면서도 예의바른 태도가 상대를 안달 나게 한다.
민형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떠올랐다. 그랬다. 타고나기를 많이 가지고 태어난 것도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가 결핍이 없으니 타인에게서 채우려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원하는 인간들은 분명 어딘가 왜곡되기 마련이었다. 신분상승을 꿈꾸며 그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많이 봐온 그의 결론이었다.
꼭 정략결혼이라고 백안시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유학시절부터 넋 나간 인간들은 많이 보았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집안을 믿고 흥청대는 놈들도 많았고 도덕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들도 흔했다. 그런 인간에 비하면 강서인은 몹시도 훌륭했다.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온 것이 황송할 정도다.
민형의 시선 속에서 서인이 가볍게 이마를 짚었다. 아니라고 했지만 피곤한 것이 분명했다. 술기운에 약간 상기되어 있는 얼굴에는 희미하게 피로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갖다 줘야겠다, 생각하면서 민형은 몸을 돌렸다.

맘에 안 들어.
태주는 들고 있던 크리스털 잔을 단숨에 비우고 테이블 위에 빈 잔을 올려놓았다.
용철의 수선에 끌려온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호기심도 있었다. 신문의 사진은 사진이니 그렇다 치고 실물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었다. 흔히 강한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눌려 있는 여자들이 그렇듯이 힘 하나 없는 타입이거나, 아니면 아마조네스처럼 화려하고 거만한 느낌이거나……. 그러니까 신문이나 TV, 혹은 공식적인 석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강서인이 아닌 자기의 베이스필드에서의 강서인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의 강서인은 사진보다 훨씬 연약하고 조그마했다. 가녀린 허리는 부러지지 않을까 아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힘이 없어 보이는 것과는 달랐다. 어딘지 다부지고 야무졌다. 탄력이 좋은 고무공처럼 통통 튕기는 느낌이 있었다. 은은하게 풍기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 뭐가 못마땅한지는 애매했지만 내내 태주는 속이 다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야, 이거 가면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야? 무서워, 무서워.”
아까부터 신나서 놀고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너스레를 섞은 엄살을 피우는 용철을 밀어내며 태주는 인상을 썼다.
“왜 이래? 누가 날 알아본다고? 슈퍼스타 강서인과 달리 나는 유명인이 아니라고.”
“아니긴……. 강서인이 양지의 꽃이라면 넌 음지의……, 음지의……. 음, 그래. 음지의 넝쿨 정도 되잖아? 아는 사람은 다 네 얼굴을 알걸? 게다가 강씨(氏)라면 두말할 필요 없고.”
확실히 그렇긴 하다. 태주가 고집스레 오픈되는 것을 거절하고 있지만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한씨(氏) 집안의 장자(長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야, 이리 와, 이리 와!”
용철이 태주를 끌어당겼다. 뭔가 싶어 보니 강서혁이 이동하고 있었다. 용철은 아까부터 강서혁이 움직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태주를 끌어당겼다. 집안싸움에는 유난히도 지랄 맞은 강서혁을 경계하는 것이리라.
“뭘, 걸리면 한판 붙지.”
“야! 여기는 한씨 집안 판이야, 그런데 한판 붙는다고? 17대 1도 아니고 50대 1 정도 되겠다. 이게 몰래 숨어든 주제에 왜 이렇게 당당해?”
“난 숨어든 적 없어. 당당히 걸어 들어왔지.”
뻗대는 태주를 보고 용철이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래, 그래. 내가 숨겨 들어왔어. 내가 그랬으니까, 사정 좀 봐줘. 강서혁은 무섭다고……. 난 미친개 싫어. 저 놈은 네 사진 붙여놓고 칼질하는 사이코 짓도 할 것 같아. 전에 종혁이 두들겨 패서 병신 만든 것도 저놈이라는 게 정설이지.”
용철이 얼른 태주의 팔을 잡아끌어 파티션 역할을 하고 있는 3미터가 넘는 어항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닌 게 아니라 아까부터 서혁과 그의 똘마니들의 시선이 자꾸 이쪽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아 눈치를 챈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러니까 뭐하러 오자고 해서는…….
태주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가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못해 따라오는 척했지만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고, 막상 와서 강서인을 보았을 때는…….
“으앗! 이쪽으로 온다! 이쪽으로 와! 야, 튀자! 강서인 실물도 봤고, 공짜로 놀 만큼 놀았으니 이제 그만 안녕안녕 하자고. 너는 저쪽 문으로 빠져나가서 주차장으로 와. 내가 정문으로 나가서 차 빼놓을 테니까……. 알겠지?”
“뭐?”
태주가 인상을 찡그리는데 용철은 벌써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우아하게 발만 빠르게 놀려 멀어지는 용철을 기가 차서 보고 있던 태주가 다가오는 서혁 패거리를 보고는 몸을 돌렸다. 한가하게 있다가 괜스레 마주쳐서 일을 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태주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빠른 속도로 홀을 벗어나 후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던 태주는 잠시 자리에 멈춰 서야만 했다. 로트바르트 자체가 강은 계열이라 처음 와본 탓에 건물 구조가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막혀 있다.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막혀 있는 계단 대신 위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옥상 문이 열려 있으면 옥상을 가로질러 건너편 계단으로 내려가면 될 것이다.

옥상으로 올라온 서인은 크게 숨을 뱉어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서울에도 에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옥상정원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는 말만 들었는데 로트바르트의 옥상에도 근사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다.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야경이 별이 가득 찬 하늘 같아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직 봄이었지만, 로트바르트 내부는 냉방이 돌아가고 있어 추울 정도였다. 다른 사람은 춥지 않은 건가 서인은 의아했다. 어째서 한여름도 아닌데 그렇게 냉방을 돌려대고 있는 걸까? 마치 낭비가 부유함의 상징이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잠깐 바람을 맞고 서 있던 서인은 키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자리하고 있는 곳에 놓인 벤치로 가 앉았다.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 저녁에만 집중적으로 인사한 사람의 수를 손꼽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대부분은 기억하지 못해도 큰 지장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모임은 호스트도 호스트지만 또 다른 인맥을 만들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은 법이다. 특히 이번 귀국환영회는 강은과 관련이 있다 보니 좌로 돌면 신문의 경제면, 우로 돌면 정치면이라는 쑥덕임이 무색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익숙한 일이다. 서로의 깊숙이까지 보이지 않는 대화, 서로의 안에 닿지 않는 관계들. 그날 웃고 그날 인사하면 끝나는 관계, 그 이후는 철저한 약육강식만이 존재하는 관계는 서인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익숙한 일인데,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좀 버거웠다. 서혁의 말처럼 자유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서인이 쓰게 웃었다. 서혁의 말이 맞았다. 4년간, 그녀 멋대로 시간을 보냈다. 옥스퍼드라고 해서 천지개벽을 할 정도로 완전한 새 세상은 아니었지만 한국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웠다. 그곳에서 정말 맘껏 자유의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돌아오니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서인은 여전히 강은의 강서인이었고, 4년 전 높았던 벽은 이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높아져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 갑갑하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때 옥상 반대쪽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소리에 놀란 서인이 벌떡 일어났다. 입을 벌린 문 안에서 뛰쳐나온 것은 말끔한 슈트차림의 남자였다. 처음 남자는 서인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곧장 반대편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가 서인을 본 것은 그때였다.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순간 공기의 흐림이 기묘하게 왜곡되었다. 아직도 열려 있는 문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가 더 멀어지고, 머리 위에 이고 있던 까만 밤하늘이 무게를 바꿨다. 공기조차 밀도를 달리한 듯 폐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니면, 심장이.
서인은 이상한 감각에 인상을 찡그리며 심장 위에 손을 갖다 대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를 보고 놀란 듯이 확장되었던 남자의 눈이 크기를 되찾았다.
그때 남자가 방금 나온 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음악소리 사이로 뭔가 시끄러운 소리가 올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의아해 고개를 돌렸는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누구……?”
앗, 하는 순간 남자의 손이 서인의 팔목에 휘감겼다.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서인은 남자에게 끌려 함께 뛰고 있었다.
“이봐요. 이게 무슨…….”
“쉿, 잠깐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남자와 보조를 맞춰 달리던 서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금방 가빠진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샴페인 기운에 다시 보글보글 기포가 끓어올랐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막 발을 헛디딜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에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관성을 이기지 못해 서인이 남자의 품안에 코를 박았다. 몸이 그대로 남자의 품안으로 쓰러졌다.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남자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피식 웃은 것 같기도 한데 확실치는 않았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봤을 때는 다른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미간을 찡그린 채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며 그녀의 어깨너머를, 그리고 좌측을, 우측을 살펴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어딘지 압니까?”
“네?”
얼떨떨해져서 몸을 떼며 서인이 반문했다.
“이놈의 건물구조는 당최 감을 못 잡겠군. 나가려고 하면 어디로 나가야 하는 겁니까?”
“들어오신 그 문으로 나가거나 아니면 이쪽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하, 엘리베이터가 있었군.”
다시 남자는 서인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꾼 듯 비상계단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 계단도 외부로 연결되어 있어요?”
“아니요. 로트바르트의 프라이빗 룸하고 연결되어 있어요. 그쪽에서 홀로 나갈 수 있고, 홀에서 외부로 나가는 건 가능할지도 모르죠. 계단 자체는 2층쯤에서 막혀 있을 거예요.”
“좋군.”
서인이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남자는 지체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들었다.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고, 그녀의 등 뒤에서 닫혔다.

태주와 서인이 막 사라지고 조용해진 정원 위로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함께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서혁을 위시한 패거리들이었다. 제일 앞장서 옥상에 발을 들여놓은 서혁이 날카로운 눈동자로 사방을 훑었다.
“과민한 거 아니야?”
정엽이 다가와서 서혁의 어깨를 툭 쳤다. 뒤따라왔던 패거리들도 불만의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 잘 놀고 있는데 끌려온 것이다.
“분명히 한가(家) 놈 아들 같지 않았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고.”
“어두워서 잘 못 봤어. 하지만 그놈이 미치지 않은 담에야 여기에 오겠어? 오늘 하루 여기 전세 낸 건 삼대 일간지에 다 실렸는데…….”
“그럼 왜 도망가?”
“도망간 건지, 아니면 자기 갈 길을 간 건지는 모르지. 게다가 이쪽을 통해서 프라이빗 룸으로 갔을 수도 있어.”
“프라이빗 룸?”
“오늘 전세 내면서 그쪽은 닫아뒀어. 덕분에 밀회장소로 애용되는 모양인데…….”
정엽이 턱으로 뒤에서 잡담하던 놈을 가리켰다. 나? 하고 서혁과 정엽을 보던 남자가 머리를 긁적였다. 물이 좋은 날이니만큼 괜찮은 여자 하나를 꼬셔서 프라이빗 룸에서 재미를 본 참이었다.
“때와 장소는 좀 가려.”
서혁이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응. 미안.”
순순히 사과하기는 했으나 남들도 다 하는 짓이었다.
“그럼 그쪽만 확인해보고 홀로 돌아가지.”
“아이고!”
서혁의 말에 정엽이 질색을 하고 막아섰다.
“형, 뭐 하는 짓이야? 형도 참 병이야. 지금 저놈 말고도 재미 보자 하는 사람들은 다 그쪽에서 분위기 잡고 있을 텐데 눈치 없이. 욕먹어. 게다가 호스트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옳지 않아. 아니야! 아니라고! 날 믿고 그냥 있어봐. 내가 애들 시켜서 주변을 좀 돌아보게 할 테니까.”
못마땅한 얼굴로 정엽을 쏘아보던 서혁은 마지못해 그의 말에 수긍했다. 놀라고 불러놓고 깽판 치는 것은 점잖지 못한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 한태주인 것 같았는데…….
어두운 정원 곳곳을 쏘아보던 서혁은 찝찝한 기분을 억누르며 홀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물?”
할딱거리는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있는데 생수병이 불쑥 내밀어졌다. 그 뒤로 남자의 얼굴이 싱글거리고 있었다. 잠깐 남자를 노려보던 서인은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목 안으로 시원한 물이 흘러내려갔을 때야 그녀는 자신이 목이 말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수병을 내려놓고 돌아보았을 때도 남자는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었다.
“목이 마르셨군.”
“누구라도, 느닷없이 100미터 달리기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목이 마를 거예요.”
“운동 좀 해야겠는데……. 뛰는 속도가 영 형편없어.”
“술을 좀 마셨기 때문이에요!”
“내가 보기로는 운동능력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많이 마시진 않은 것 같지만.”
서인이 멈칫했다.
“절 계속 보고 있었다는 뜻이군요.”
“오늘의 히로인이잖아.”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잠시 서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어딘지 깊고 서늘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눈빛이었다. 낯선 이를 더욱 낯설게 만드는……. 그러나 그 눈빛은 지금 로트바르트에서 만날 수 있는 성격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곳은 지금 서인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무표정도, 무심함도, ……적의만큼이나 낯선 감정이다.
그러는데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갑작스레 거리를 좁히는 남자에 당황해 서인이 주춤 뒤로 물러서는데 남자가 손을 쭉 뻗더니 그녀 바로 옆의 테이블에서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돌려 따면서 씩 웃었다.
얄미운 얼굴이었다.
……그 순간 서인은 남자의 얼굴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어디선가 마주쳤다. 선뜻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남자의 얼굴은 흐린 기억의 안개 너머 어디쯤에 새겨져 있는 얼굴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강서인 씨는 눈에 띄는 사람이라 못 보고 넘기기 쉽지 않아.”
“고마우신 말씀이지만 이렇게 갑자기 끌고 온 이유는 되지 않는군요.”
“저런.”
딱하다는 듯이 남자가 혀를 찼다.
“남자가 여자를 끌고 으슥한 곳으로 오는 이유를 모르다니, 보기보다 순진하네.”
“뭐라고요?”
기가 막혀 반문하자 남자가 껄껄 웃었다. 다소 무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의 언행이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이름이 뭐죠?”
서인이 물었다. 그러자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에게 관심이 생긴 모양인데?”
“그쪽은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 나는 그쪽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하지 않나요? 그리고 아까부터 슬쩍 말을 놓는데 그건…….”
“내가 강서인 씨보다 4살 더 많으니 말을 놓는 건 무리 없을 것 같고…….”
“나에 대해 또 뭘 알고 있죠?”
“강서인, 24살. 옥스퍼드 우등졸업생. 대학원 제의를 받았으나 가족의 등쌀에 다시 한국으로 귀국, 무척이나 아쉬워하고 있음. 몸매는…….”
남자의 눈이 쓱 서인의 몸을 훑었다.
“33―22―32?”
서인이 입술을 깨물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손을 후려치기 전에, 남자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그리고 바짝 거리를 좁혔다.
“질문에 대답한 것뿐이야.”
희미하게 머스크 향이 느껴졌다. 남자다운, 어딘지 관능적이면서도 깔끔한 향이었다. 서인이 남자의 손을 털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나도 해볼까요?”
서인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이 28살, 성별 남자. 고위급 공무원 혹은 자기 사업자. 주 수입으로만 생활하지는 않음. 부수입이 있거나 집안이 부유한 편. 평소에 사교생활을 즐기는 성격 아니고 고집은 약간 셈. 마초적인 자신감이 넘쳐흐르지만 실제 매력은 어떨지 미지수. ……어때요?”
잠깐 멍하게 있던 남자가 하하 큰 소리로 웃었다.
“굉장한데……. 나이야 내가 4살 연상이라고 고백했으니 그렇다고 치고. 공무원이나 은행원이라는 건 어떻게 나온 거지?”
“남 눈치 봐야 하는 회사원은 아닌 게 분명한 잘난 태도고, 자기 맘대로 일해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니 아랫사람 노릇은 못하겠다, 하고 공부했겠죠. 아니면 자기 사업 하는 중일 테고……. 뭘 하든 28살에 지금 걸치고 있는 걸 쉽게 사지는 못할 테니까 집이 부유하거나 부수입이 꽤 짭짤하거나…….”
남자의 얼굴은 한없이 유쾌했다.
“사교생활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내가 모르는 얼굴이라는 건 일단 사교성이 풍부해서 여기저기 얼굴 들이미는 성격은 아니라는 거죠.”
어디선가 본 적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서인은 생략했다.
“고집 부분과 마초 부분은 묻지 않는 걸로 하지.”
인사하듯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까딱여 보임으로써 남자는 서인에게 경의를 표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서인이 가슴을 펴는데 남자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하지만 사교생활 부분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반이라고 하면?”
“강서인 씨가 내 얼굴을 모르는 건 내가 사교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야.”
“제가 관심 가져야만 하는 분인가요?”
“적어도 난 관심이 많았지. 강서인 씨한테.”
남자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것만으로도 잊었던 위기감이 되살아났다. 서인은 또 한 걸음 물러섰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옆으로는 생수 몇 병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 그리고 문은 남자의 등 뒤쪽에 있다.
“다가오지 말아요.”
서인이 경고했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없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고, 더 이상 가까울 수 없는 거리가 되어 팔 안에 그녀를 가둔 후에야 멈춰 섰다. 자신의 단단한 양팔 사이에 갇힌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남자를 서인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뺨 한 대를 갈겨 올릴 것 같은 그 눈빛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이상하게 울리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은 어딘가 익숙하다. 아무렇지도 않고 태연하기만 한 눈빛 뒤로 느껴지는 허기 같은 것이, 익숙하다.
그러나.
“비.켜.요.”
서인은 목소리를 딱딱 끊어 남자에게 경고했다. 그러한 자신이 남자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그녀는 몰랐다.
마치 신기한 생물을 보는 기분으로 태주는 서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팔 안에 갇힌 작은 생물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자 더더욱 여린 몸매였다. 바를 가득 채운 어둠 때문일까? 눈동자는 유난히도 깊은 색을 띠고 있었다. 옥상의 집중조명 아래 스쳤던 그 감각은 착각이 아니었다. 다짜고짜 끌고 들어와 돌려세운 이곳에서도 여자는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으니까.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어딘지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어째서 이 여자가 자신과 같은 눈빛을 하고 있는 걸까?
“내 이름, 아직도 궁금해?”
“이제 안 궁금해졌어요. 비켜요.”
“궁금해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서인의 눈살을 찡그렸다. 남자의 태도가 지나치게 유유자적한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막고 서 있는 태주의 팔을 쳐내고 몸을 숙여 그에게서 벗어났다.
“당신 같은 남자, 재미없어요.”
불편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서인이 말했다. 그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다음 획 돌아섰다. 그런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은 대수롭지 않은 질문이었다.
“별 관심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방긋방긋 인형노릇 하는 건 재미있고?”
다시 돌아선 서인이 날카롭게 태주를 노려보았다.
“지금보다 아까 홀에서가 훨씬 더 재미없어 보이던데…….”
태주가 싱긋 웃었다.
“관심법도 쓰시나 보죠?”
“그런 거 없어도 알 수 있을 정도였어. 하기야 그것도 타협안 중의 하나던가? 환경재단을 설립하는 대신 강은의 충실한 딸 노릇 하는 거?”
비로소 서인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녀가 뚫어져라 태주의 얼굴을 응시했다. 어디서 본 자더라?
“당신, 누구야.”
“이제 궁금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환경재단 쪽 일을 하려는 거, 아직 오픈되지 않은 이야기예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나는 강서인 씨한테 관심 많다고 말했잖아. 솔직히 관심이 없었어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고. ……내가 그걸 알 정도로는 사교성이 있는 성격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서인은 웃음기가 엷게 깔려 있는 그 얼굴을 당장이라도 때려주고 싶었다. 도대체, 어디서 만난 사람일까? 느낌으로 집안사람은 아니었다. 강은 쪽도 아니었다. 방계의 방계……. 아무리 훑어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그걸로 돼?”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데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물음이었다.
“무슨 의미에요?”
“울타리가 사방팔방 쳐져 있는데, 너는 여기까지만 달리는 거야……. 그 이상은 용납하지 않아……. 이렇게 사방팔방 현수막이 걸려 있는데,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고 가는 거야? 끝을 빤히 보고 뛰면 그건, 재미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알아들은 얼굴인데? 정곡이었군.”
서인의 인상이 구겨졌다.
“당신 누구야?”
“저런, 이제 다른 꼬투리를 잡고 싶은 모양이군. 내가 누군지가 중요해? 내가 한 말이 강서인 씨 아픈 데를 찔렀다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
“누구나 자기 자리에서 지켜야 할 게 있고, 약속이 있어요. 받은 만큼 갚는 건 당연한 거고, 권리만큼 의무가 발생하는 것도 당연하죠. 누구나 그렇게 살아요.”
“그런가? 그럼 나는 그 ‘누구나’에 속하지 않는 예외로군.”
태주가 간결하게 대답했다.
“아까의 추리에 절반의 진실. 나는 공무원 맞아. 내 맘대로 일하고 싶어서 공부 열심히 했다는 것도 맞아. 하지만 하나 더, 뭘 하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혼자 하고 싶었기 때문에 공부했어. 가로막는 것 없이, 제한 없이.”
“지금 자랑하는 거예요? 더 이상 듣고 있을 가치가 없군요.”
기가 막혀 쏘아붙인 서인이 프라이빗 룸의 문을 열었다. 시시각각 기분이 나빠졌다. 속이 울렁거린다. 사람은 불편하게 하는 남자다. 별 자랑 같지도 않은 자랑을 늘어놓고, 혼자서― 라니……. 하고 싶은 대로― 라니……. 지금 어째서 이 남자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자, 그럼 여기서 다시…….”
서인을 뒤따라 튀어나온 남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누구일까?”
“한.태.주.”
질문과 동시에 답이 나왔다. 태주의 입에서는 아니었다. 서인의 입에서도 물론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창이라면 벌써 피를 보고도 남았을 적의가 가득 실린 목소리였다.
서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태주도 서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강서혁이다.
태주가 조용히 혀를 찼다. 시끄러운 건 질색인데.
태주가 서인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알지?”
“한태주.”
경악한 서인이 입안으로 태주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제야 어디선가 본 듯한 그 얼굴이 머릿속에서 또릿해졌다. 서인과는 달리, 태주는 매스컴에 노출되지는 않았으나 분명 한 번쯤은 매체를 통해 접했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한태주는 한씨 집안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였으니까.
“내가 공부한 이유 하나 더. 아버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온전히, 나이고 싶었으니까.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 그 안에 갇히게 되지.”
문득 그 황태자가 탕아라는 소문이 생각났다. 나쁜 의미로서가 아니라 한 의원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의미로 그렇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착실히 제 길을 가고 있어서 한씨 일가들은 모두 단단히 기대를 걸고 있다고.
무언가가 가슴 안에서 덜컹 내려앉았다. 서인은 멍하게 태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서인의 뺨 위로 태주의 손이 슬쩍 스쳤다.
“간이 부었군. 그 손 못 떼? 여기가 어디라고 그 면상을 들이밀어?”
서혁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대한민국은 자유국가라는 걸 모르나 보지?”
태주가 서인에게서 눈을 떼고 여유롭게 빈정거렸다. 얼굴 위로 따갑게 느껴지는 서인의 시선은 잠시 무시했다. 그는 후회하는 중이었다. 답지 않게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다. 순간순간 변하는 저 조그마한 얼굴을 자극하고 싶어서 쓸데없는 데까지 이야기를 흘려버렸다. 서툰 짓이다.
“자유와 방종은 구분해야지. 제 주제 모르고 날뛰다가 죽는 건 자유국가에서라도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나 보지?”
서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눈이 호전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서인이, 이리 와.”
서혁이 서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슨 강아지 부르나?”
태주가 비웃었다. 서혁과 서인의 얼굴이 동시에 구겨졌다. 서인이 획 고개를 꺾어 태주를 노려보았다.
“그쪽 동생은 스물네 살이야. 완벽한 성인이라고. 그만 끼고도시지. 그러니까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거잖아?”
이상한 소문. 소문이 아니라는 것은 태주도 알았고 물론 서혁도 알았다. 비밀이 온전한 비밀로 남는 법이 없듯, 강은의 영향력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을 막고 있긴 해도 서혁이 입양된 아이라는 것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비밀이었다.
“이, 이 자식!”
눈이 획 돌아간 서혁이 태주에게 덤벼들었다. 태주가 서인의 어깨를 감싸 잡아당기면서 그런 서혁을 발로 차버렸다. 덤벼들던 힘의 역작용으로 서혁이 보기 싫게 나뒹굴었다.
“이봐요!”
서인이 태주의 가슴을 밀어내며 소리를 질렀다. 입술을 깨물고 그를 노려보는 서인을 보는 태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뭘까, 이 기분은. 이 상황에서조차……, 무언가 신경이 쓰인다.
“정당방위라고.”
태주가 양손을 치켜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나뒹굴었던 서혁이 태주의 발목을 호되게 걷어찬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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