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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가 몰려오는 시간

해마가 몰려오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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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140*205*20mm
ISBN13 9791197864322
ISBN10 119786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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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갈기를 세우고 일어선다. 땅에 주저앉아 우시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나는 작은어머니의 죽음을 기억한다.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든다는 생각, 끝없이 이어지는 울음 속에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회색으로 드리운 유년의 어느 풍경에서 기억하는 것은 상여가 나가는 날, 눈이 따갑도록 내리쬐던 햇살과 상여꾼들 사이에서 상여를 매던 아버지의 검고 굳은 얼굴과 한갓진 곳에서 태워진 옷가지에서 올라오던 연기와 그 연기를 바라보던 사촌 동생의 슬픈 눈빛과 타버린 잿더미 위를 유영하던, 알 수 없는 막막함 같은, 무게를 저울질할 수 없는 우울함이었다.

다시 한 떼의 기억이 갈기를 하얗게 세우고 밀려든다. 유년의 어느 여름날, 개장수에게 팔려 간 강아지 ‘쫑’이 나를 찾아와 낑낑대고 있다. 나는 ‘쫑’을 곳간에 숨겨두었으나 낑낑거리는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다시 개장수를 불렀다. 개장수의 손에 ‘쫑’을 넘길 때 나는 멀찍이 서서 “안 팔면 안 돼요?”라고 말했으나 이미돈을 받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어른들의 말에서 나는 되돌릴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배워버린 것이다. ‘판다’는 말에는 비정과 낭패와 체념이 함께 들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것들이 팔리는 순간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굴욕감과 상처를 드리우는 것 같다. ‘쫑’이 팔려 간 그날은 내 마음에 비가 내려 빗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사실, 이런 기억은 생각하기 따라서는 아무 일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들이 갈기를 세우고 돌출하는 이유는 그 순간이 내겐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못처럼 박혀 뺄 수 없는,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 그런 시간이 나를 찾아올 때면 나는 저기압으로 들어가 비를 맞고 돌아온다. 그렇다고 매번 슬픈 기억들만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들은 금이 간 벽 사이를 비집고 올라오는 민들레처럼 입을 함빡 벌리게 한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열었던 생일 파티의 기억, 친구들과 포도 농장에 놀러 갔던 기억, 처음으로 여학생과 손을 잡았던 기억, 아내의 배 속에서 아기가 들려주던 심장 박동 소리 등등은 비 온 뒤의 하늘처럼 맑고도 화창하게 올라온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갈기를 세우고 푸른 초원을 달려온다. 끝없는 슬픔도 없고, 영원한 기쁨도 없다. 점점 부풀어 오르는 기억으로 시간이 지나간다. 태초부터 기억들은 이 해안으로 밀려왔을 것이다. 까마득히 떨어진 아득한 거리에서 이곳으로 몰려든 하나의 거대하고 고고한 생명의 기억들이 햇빛에 하얀 비늘을 반짝이며 달려오는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커피를 들고 등대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연인의 대화 한 토막이 들려온다. 나는 자기만 있으면 돼. 어떤 말들은 밀어내고 싶어도 더 가까이 다가와 나를 사로잡는다. ‘자기’라고 부르는 가장 소중한 이가 있으면 다른 것은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자기’란 말처럼 말랑말랑한 말이 있을까.
---「해마가 몰려오는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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