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처음 사랑이 원문에 ‘아가펜 프로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가펜’은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 사랑을 의미합니다. ‘프로텐’의 원형은 ‘프로토스’입니다. 이것은 ‘처음’, ‘먼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시간, 장소, 순서, 중요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최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처음 사랑이 아니라 최상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콘텍스트에 더 맞게 번역을 하면 궁극의 사랑입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이 그 궁극의 사랑을 얻음으로, 그 궁극의 사랑을 힘입어서 2절, 3절에 언급되어 있는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 p.24, 「1. 새로운 삶에 대해」 중에서
하나님, 우리의 머리 위에 계셔야 합니다. 사람, 우리 앞에 있어야 합니다. 대등해야 합니다. 물질, 내 발 밑에 있어야 합니다. 물질, 이것은 수단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어떻습니까? 물질이 머리 위에 있습니다. 사람, 발밑에 있습니다. 사람이 물질을 위한 도구입니다.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위한 도구가 발밑에 있어야 되는데 돈이 머리 위에 주인이 되고, 그 돈을 지키고 늘리기 위한 도구로 사람들이 발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가끔은 내 앞에 계시다가 더 자주는 내 밑에 계십니다.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 보십시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 데리고 와서, 이집트에는 매장지가 없느뇨?’ 여러분, 하나님을 내 머리에 모시고, 사람을 대등하게 내 앞에 두고, 물질을 내 발밑에 둘 때 하나님의 그 인격이 나를 타고 내려서 물질로 내려갑니다. 그때 생명이 없는 그 물질이 나의 인격을 대변하는 인격의 통로가 되어서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됩니다.
--- p.90, 「2. 성숙한 삶에 대해」 중에서
이처럼 바울의 일평생은 그 이후 참수형을 당해서 죽을 때까지 매일의 일상이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소명의 삶이었습니다. 바울이 무슨 큰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향해서 간 것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자마자 로마 복음화의 꿈을 안고 로마 복음화를 목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거짓말입니다. 바울은 매일 일상을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살다가 에베소에 가서 ‘아, 내 생을 던질 곳이 로마구나’를 인생 말년에 알았습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서 보는 그 바울의 모든 행적, 바울의 일상의 소명의 삶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일상의 소명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눈 떠 있는 한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p.155, 「3. 소명의 삶에 대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