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 뒤에는 소극이 온다는 패턴은 지금도 신통찮은 논리로서, 역사에는 아무리 진부한 것이라도 서사가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런 정합성은 어쩌면 환영이었을지도 모르니, 대체 소극 다음에는 무엇이 올 수 있단 말인가? 딱히 아무것도 없다. “우주의 도덕적 활은 정의를 향해 당겨져 있다”거나 “우리는 더 완벽한 국가 통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임시방편의 말로 누군가를 달래기는 더 이상 어렵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고, 모든 것이 투쟁이다. 다시 근처를 보면, 미술이 과거에 의존할 수 있는지는 이제 분명하지 않은데, 미술의 현재 또한 제도적으로 지극히 허약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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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술 관람에 널리 퍼져있는 방식은 정동적(情動的) 방식이다. 칸트가 재개한 것이 ‘이 작품은 아름다운가?’라는 고대의 질문이었고, 뒤샹이 구성한 것은 ‘이 작품은 과연 예술인가?’라는 아방가르드의 의문이었다면, 우리의 일차적 규준은 ‘이 이미지 또는 오브제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가?’인 것 같다. 한때 우리는 과거의 위대한 미술과 비교해서 판단되는 작품의 ‘특질’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다음에는 당대의 미학적 그리고/또는 정치적 논쟁들과의 관련성에 의해 평가되었던 작품의 ‘관심사’와 ‘비판성’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제 우리는 파토스를 구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객관적 시험도, 심지어는 많은 논의도 가능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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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탈진실 정치는 엄청난 문제지만, 이는 수치를 모르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당혹감을 모르는 지도자를 어떻게 흠잡을 수 있는가? 또는 부조리를 일삼는 자를 어떻게 조롱할 수 있는가? 위뷔 왕 같은 대통령의 망언을 어떻게 격파할 수 있는가? 그리고 분노를 먹고 사는 미디어 경제에 분노를 추가하는 것이 우리가 겨냥할 목표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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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뒤샹이 암시하는 것은 레디메이드가 가장하는 그 모든 평등주의에도 불구하고 미술은 이 같은 범주들이 꼭 필요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마법의 묘약?천재의 숨결, 미술가의 아우라, 또는 (바버라 크루거가 표현한 대로) 신들의 향수?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또한 미술은 어느 정도 베일에 덮여있을 때만 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내비친다. 그런데 우연찮게 자크 라캉도 팔루스에 대해 바로 이런 말을 했다. 팔루스가 노출되면 그것은 페니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미술이 노출되면 그것은 사물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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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자들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면 모두 시인이라고 상상했고, 요제프 보이스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예술가라고 믿었다. 미학적 평등주의를 신봉했던 유토피아적 시대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하고,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아마도, 모아 엮는 사람은 누구나 큐레이터라는 말일 것이다.
--- p.104
어떤 미술관이든 현대미술과 동시대 미술을 대변하는 작품들을 보여주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모든 설정을 어떻게든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하나의 건물 안에서 또는 하나의 건물군 안에서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건축적 문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건축적 문제는 어쨌거나 답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것은 미술가와 비평가뿐만 아니라 관장과 큐레이터도 관련시키는 집단적 질문으로서, 이질적일뿐더러 흔히 적대적이기도 한(더욱이 의도적으로 적대적이고자 하는) 미술작품들을 전시하는 최선의 방법에 관한 질문이다.
--- p.115
여기서 파로키는 하나의 어려움에 직면한다. 「눈/기계」가 개관하는 세계는 인간이 세계로부터 소외된 경우만이 아니라 세계가 인간으로부터 소외된 경우까지, 강도 높은 소외의 세계다. 그것이 보여주는 환경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면서도 우리의 범위를 넘어서 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브레히트식 소외 효과가 이런 세계와 경쟁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극도의 소외가 일반적인 사태라면, 이를 모방해서 악화시킨다?물화된 조건들을 제 곡조에 맞추어 춤추게 한다는 마르크스의 대단하고 대담한 구식 시도?고 해서 진정한 도전의 방식으로 나오는 것은 거의 없다. 그렇게 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 p.173
오늘날 필수적인 문해력은 어떻게 획득할 수 있는가? 캡차 체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슈타이얼에 따르면, 우리는 이 체제를 그것의 무정형한 토대 위에서 대해야 하고, 그 체제의 프로그램들이 스캔하고 암호를 풀고 연결하는 것처럼 보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비록 이 게임에서 우리는 이 프로그램들에 완패를 당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한다.
--- p.178
최근의 픽션은 삶과 예술이라는 과거의 이분법을 극복하려 하면서 현실 경험을 징발해 소설 쓰기를 되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픽션은 대단히 인위적인 장치를 배치하기도 하는데, 이는 탈신비화를 위해서나 실재를 교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다시 실재적으로, 말하자면 실재를 그 자체로 다시 실질적이게, 다시 느껴지게 만들기 위해서다.
--- p.227
“거짓이 진실보다 내 삶을 더 잘 묘사했다”고 화자는 『10:04』에서 말한다(또는 그런 말을 한다고 상상한다).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라고 배우는 「무대를 위한 이벤트」에서 (아마도 이 작품을 만든 미술가를 위해서) 토로한다. 이러한 발언들은 역설을 즐기고 스타일을 옹호하는 오스카 와일드풍의 재담이 아니라 제안들로서, 픽션에서 깜박이는 유토피아의 빛처럼 인위적 장치가 어떻게 하면 실재에 도움이 되는 지점에 위치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제안이다.
--- p.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