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뇨하새요. ……나눈 크라비우스임니다. ……나눈 수영 선수임니다.”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에르메가 내가 읽던 책을 획 덮으며 노려보자 ‘엄마야!’하고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이 자식이 하는 일이 이렇다. 한국어 책을 가져오랬더니 이따위 책을 가져오고 난리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내 이름과 직업을 소개하는 일이 뭐 그리 중요하냐? 이런 책을 가지고 오면 어쩌라는 거냐? 결국 책을 던져버리고 투명한 물이 찰랑이는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코치가 호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러자 호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묻는다. 「어제 신이 용서 안 해줬어?」 「무슨 소리야?」 「로페즈와의 일…… 그것 때문에 밤늦게 들어온 줄 알았는데. 코치가 자다 깨서 너 없다고 숙소를 홀딱…… 아얏!」 「너는…… 시합 앞둔 애한테 쓸데없는 이야기 하는 거 아니야. 크라비우스, 어제 잠은 좀 잤어? 컨디션은 어때?」 코치의 목소리는 헨젤을 살찌워 잡아먹으려고 과자를 먹인 마녀의 목소리처럼 달콤하지만 다 봤다. 호벤 옆구리 찌른 거. 그리고 이제 와서 이래 봤자 소용없다. 안됐지만 컨디션은 정말 엉망이다. 이래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젯밤엔 한숨도 못 잤다. 꼬맹이와 같이 있느라고 못 잔 게 아니다. 그냥 못 잤다. 일단 볼룸에서 꼬맹이와 숨쉬기 운동을 한 것부터가 안 좋았다. 아무도 없는데 둘이 있으면 둘이 함께하는 운동을 해야지 따로따로 숨을 쉬는 건 또 뭐냐? 그런데다가 바래다주는 길에 뽀뽀 좀 하려고 했다가 얻어맞았다. 두 대 맞지 않은 건 한 대를 때린 꼬맹이가 내가 오늘 경기가 있다는 걸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악! 게임!’하는 입술이 무척이나 예뻤다. 하지만 그 예쁜 입술로 ‘노’라고 말하면서 손을 X 자로 교차시켰을 때는 좀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꼬맹이는 경기 전에는 성적 욕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큰일이다. 그렇다는 건 경기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 한다는 뜻 아닌가? 그 전에 내가 미치는 게 더 빠를 텐데. 난감한 듯 인상을 찡그리다가 획 돌아서서 도도 뛰어가는 모습은 귀여웠지만, 곤란하다. 꼬맹이야 탁구 선수라 변덕이 탁구공 튀듯 튀는지 몰라도 나는 수영 선수고, 수영도 스킨십도 직진만 한다. 스킨십에서 이렇게 제동이 걸리면 수영이라고 괜찮을 리가 없다. 밤새 내 머릿속은 살색 찬연했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막 더듬다가 중간에 멈추면 얼마나 힘든지 꼬맹이는 모른다. 심지어 그 직후 여자가 남자를 만졌으면 이야기 끝난 거다. 이건 재앙이다. 나나 되니까 이 정도지 다른 남자 같았으면 어젯밤에 사고 쳤을 거다. 물론 나도 운동선수들이 시합 전에 섹스하는 게 기록에 좋지 않다는 기사는 읽어봤다. 하지만 동시에 섹스가 기록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기사도 봤다. 내 경우는 후자다. 이렇게 머릿속이 야해서야 수영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수영은 옷을 벗고 하는 스포츠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 꼬맹이는 그래도 안 된다고 하겠지. 우울해진다. 할 수 없는데 살아서 뭐 해? 「크라비우스, 이제 조금 있다가 100미터 접영이랑 50미터 자유형 있는 거 알아? 응? 알 거야. 분명히 크라비우스는 알고 있을 거야. 지금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고 있을 거라고. 내가 진짜 시합이 하나만 돼도 이런 말 안 하는데 두 개야. 두 개라고. 그것도 결승!」 코치는 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정신 차려, 제발. 이렇게 어깨 축 늘어뜨리고 있지 마. 너답지 않잖아? 응?」 암만 생각해도 어제 꼬맹이는 너무 심했다. 이렇고 그렇고 저렇게까지 됐는데, 그냥 나를 돌려보냈다. 이건 고문이다. 내가 잘못한 거? ……난 크라비우스다. 크라비우스는 원래 잘못을 한다. 꼬맹이 보고 싶다. 하지만 만나도 못 하게 하겠지. 할 수도 없는데 수영은 해서 뭐해? 「크라비우스, 나갈 차례야.」 코치의 눈에는 진짜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자신의 코치 경력이 망쳐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생각이 드나 보다. 언제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지. 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자마자 뒤에서는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야?」 어깨를 늘어뜨리고 서 있자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귀찮아서 흘깃 보니까…… 그러니까…… 얘가…… 누구더라? 「너 설마 나를 못 알아보는 거야? 유도니스잖아! 오스트리아!」 아……. 「왜 이래? 뭐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대꾸하기도 귀찮다. 못 하는데 대꾸는 해서 뭐해? 「어어? 진짜인가 보네? 이야, 마커스 크라비우스에게 심각한 일이라…… 살다 보니 이런 걸 다 보게 되는군.」 얘가 마커스라고 불렀는데도 화도 안 난다. 그냥…… 시끄럽다. 좀 조용히 해줬으면 좋겠다. 「안 심각해. 그러니까 입 좀 다물어.」 「싫은데? 싫은데?」 ……그럼 계속 떠들든지. 장내 소개가 이어지고 레인에 서는 그 순간까지 유도니스는 이죽거렸다. 하지만 상대할 힘이 없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만 자꾸 들고, 수영은 해서 뭐하나 싶고, 그냥 꼬맹이나 한 번 더 봤음 좋겠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을 더 봐도 못 하게 하겠지. 할 수도 없는데 난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그리고 문제가 터졌다. 휘슬 소리가 들렸는데, 출발을 못 했다. 들리긴 들렸는데 몸이 반응하지 않았다. 내 몸은 어젯밤 꼬맹이에게 민감하게 반응한 이후로, 반응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약간 늦게나마 다이빙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봐. 꼬맹이……,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라고……. 내가 문제가 생길 거라고 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