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 부부와 아이가 이루는 가정이 ‘정상 가족’이라는 생각은 그 범주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폭력으로 작용한다.
어쨌든 나는 한 남자와 이미 결혼이란 걸 해버렸고, 아이도 낳았다. 틈만 나면 싸우고 울고불고 진상이 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혼이란 걸 하지 않고 어찌어찌 살고 있다. 게다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격한 고부갈등을 겪고 나서, 그리고 딸을 키우면서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깨달아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수많은 싸움의 시작을 뜻하기도 했다.
부끄럽지만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결혼적령기에 결혼이란 인생 퀘스트 하나를 해치워버림으로써 결혼을 안 했을 경우 지속해서 시달리게 될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제 와 뒤돌아보건대 그 모든 것은 강수하의 말대로, ‘사회가 나를 속인 것뿐이다. 빼앗겼던 것뿐이다.’ 이 사회는 결혼하지 않아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숨겼다. 혹은 우리는 그것을 잘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을지도 모른다. 일일이 반박하고, 설명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삶에 지레 겁먹어서.
만일 결혼이란 걸 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태라면 한 가지만 깊이 생각해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당신이 세운 배우자 조건에서 25%쯤 포기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결혼할 땐 25%였지만 그 안에 들어가 보면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은 50% 혹은 70%일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은가? 그 사람은 과연 50%, 70%를 만회할 만한 사람인가?
그렇게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고 반페미니스트적인 마인드로 남편감을 고른 탓인지 나는 두고두고 힘들었다. 남편이 실은 돈을 지지리도 못 벌었다거나 알고 보니 시부모님도 찢어지게 가난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었다. 그저 남편의 능력에 기대어 좀 살아보려는 마음을 약간 먹은 것만으로도 나는 스스로 작아지고 피해의식에 젖고, 마음이 힘들어졌던 것이다.
나는 배우자감을 고르며 이 남자와 결혼하면 이득인지, 손해인지 같은 조건을 따지지 말았어야 했다. 설사 조건을 따지더라도 그런 이기적이고, 수동적이며 의존적인 조건은 내 목록에 넣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온전히 내 능력만으로도 혼자서 외국에서 살 수 있는 상태로 그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했어야 했다.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진짜로 사랑했다면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 것에 대해서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남자는 절대 나의 구원이 되어주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에 기대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부터는 온전한 나를 찾는 방법은 조금씩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일단 나 하나로 혼자 서기를 조언하고 싶다. 사랑은 오직 사랑하는 마음 그 자체로만 순수하게 남겨두자.
‘길들일 수 있을 것 같았던 남자’라는 신분에서 ‘죽어도 말이 안 통하는 놈’이 되었다가, 만 6년의 전쟁을 거치고 우리는 결혼 7년차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서로를 포기했다. 아니,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조차 사랑하고 지지해주기로 했다.
결혼은 정말이지 미친 짓이다. 한 인간과 인간이 만나 죽을 때까지 죽을 둥 말 둥 치고받고 싸우려고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다.
우리는 줄기차게 싸우면서 이제야 아주 조금씩 터득하게 된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님을, 너를 내가 원하는 입맛대로 바꿀 수 없음을,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보통의 부부들이 우리 기준에서 들인 이 만 6년 정도의 시간을 제대로 겪어내지 못해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거나 평생을 쇼윈도 부부나 그저 육아동지처럼 지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애초에 결혼에 대해 큰 환상이 없었고, 그 누구와 살았더라도 그 누구가 타인인 이상 같이 살면서 수많은 갈등을 겪으리라 예상했다. 결혼이 ‘내가 선택한 단 한 명의 타인인 배우자와의 평생 동안 지속될 갈등 조정 과정임’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결혼을 해 보기로 결정한 것도 나이므로, 이 모든 유치한 싸움이 지겹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과정이 힘들고 짜증난다고 누굴 탓할 것인가.
갓난아이를 키우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불어난 몸이나 부족한 잠보다 육아에서 반 발짝쯤 뒤로 물러나 있는 남편, 그리고 나는 이제 절대로 아이가 없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도대체 몇 년을 이 아이 하나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생각하면 까마득한 우울감이 나를 덮치곤 했다. 이런 중압감과 불안, 우울감은 아이를 사랑하는 감정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나는 ‘아이를 낳아 키워본 여자’의 삶만 살아보았기 때문에 ‘아이 없는 삶의 행복’은 죽을 때까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의 기준에서 더 행복하기 위해 선택한 삶을 나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가치 매긴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오만이었다. 우리는 그저 내가 선택한 자신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여자아이들이 다양한 색깔과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입고 어린이집에 갔으면 좋겠다. 서로가 서로의 핑크홀릭에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자아이들의 공주병을 고쳐나갈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반대로 남자아이들이 키즈카페에서 공주드레스를 입어보고 싶다고 해도 당황하지 않는 엄마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한술 더 떠 엘사 드레스를 하나 사준다면 좋겠다. 누가 알겠나. 그 아이가 커서 세계적인 여성복 디자이너가 될지.
법적으로 한 남자와 엮이고 나면 그 남자만 나의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뒤로 수많은 것들이 딸려온다. 흔한 예로 앞서 말한 바 있는 고부갈등이나 며느리로서 요구받는 ‘며느리의 도리’라는 것, 그리고 아이를 낳게 되면 ‘엄마의 책임’ 또한 내 어깨 위에 얹히게 된다. 싱글과 기혼자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책임과 자유의 영역일 것이다. 결혼에 뛰어드는 것은 이 아름다운 자유를 몸소 뿌리치고 책임과 의무의 영역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시부모 때문에 수없이 싸우다가 며느리 측에서 먼저 연락을 끊어버리기는 오히려 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어른을 변하게 만들기란 어렵다. 거의 불가능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들어도 계속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결혼은 쉴 새 없이 변하는 철학적인 의문들의 연속체이다. 당신이 고통의 순간들마저 삶의 한 부분으로서 즐기는 사람인지 자문해보라. 고통과 고뇌와, 슬픔과 고통과, 고통과 짜증남의 사이에 가끔씩만 등장하는 행복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인지, 내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 때로 과분한 것을 바라는 사람은 아닌지 물어보라고 하고 싶다. 그렇다면 결혼에 대한 많은 해답이 이미 그 속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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