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라가몰려와 요
마른가지들이오들오들떨어 요
북풍이검은옷자락휘날리며유령처럼흐느껴 요
성큼성큼짓쳐들어와요앞산을떼메고와 요
뒷산이덮쳐와요빈들판이몸을부풀리며일어나 요
살얼음냇물이눈을감아요눈보라가대낮의불을꺼버려 요
벌떼처럼몰아쳐와요우리집을덮어버려요살구나무온몸을떨어 요
꽃눈이눈을꼭감아요눈송이가살구살구살구꽃잎처럼날려 요
나뭇가지들은아이좋아라손가락을쫙쫙펴고눈송이를받아 요
하얀꽃잎을받아먹어요눈송이를받아서잠옷처럼입어 요
눈송이로시린몸을감춰요살구나무는금세무덤처럼깊어져 요
무덤속으로어린가지들이숨어요새하얀방에서말잇기놀이를해 요
끝말을이어가다그만말이막혀요아이하나가울어 요
아이둘이울어요아이들이모두울어 요
토닥토닥달래던나도울어요울던아이들이나를달래 요
울다가한아이두아이 잠 이 들 어 요
점점깊어가는살구꽃무덤속에서꽃잎이되는꿈을꿔 요
집은겨울살구나무를닮았어 요
누구도말이없어 요
꽃잎으로서로를덮어줘 요
그러다또잠이들어 요
지빠구리한마리날아와 앉 아 요
또한마리날아와 앉 아 요
차가운무덤을쪼으며 앉 아 요
검은부리로콕콕문을두 드 려 요
눈발이유리가루처럼날려 요
무덤에는문이없어 요
잎눈속에서아이들이숨을죽여 요
살구살구파란살구노란살구벌레먹은살구
아직태어나지않은살구살구살구살구살구살구살구살구살구
---「살구나무 꼴라주」중에서
오늘 1957년 6월 25일, 또 하루가 저문다. 여기 황해남도 낙연광산 화강편마암 벽에 또 한 개의 금을 새긴다. 고향의 아버님과 산등성 적송 같은 내 자식들, 아내는 나로 인한 고초를 어찌 감당할까, 고향 샘골에서 내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리. 그 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품에 안겨, 아비의 맨발에 난 상처를 만지며 옹알이하던 산아!
벌써 아홉 살이겠구나.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할 아가! 나는 1913년 샘골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단다. 유학자인 넷째 아버지는 나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일제하의 미원국민학교를 졸업하게 해주셨단다. 열일곱 살에 네 엄마를 아내로 맞으며 가장이 된 나는, 일본인 측량기사 밑에서 일하며, 식민지의 참담함을 가슴속 깊이 새겨야만 했단다.
어느 날, 상관인 측량기사가 한 장의 소개장을 써주며, “이 사람을 찾아가라”라고 했지. 그렇게 나는 충청북도청 기관에서 공무를 보게 되었어. 일제의 수탈은 노골화되었고, 이 땅 청년들의 가슴 가슴마다 피가 끓었어. 나는 20대 후반에 청원군 가덕면장 발령을 받았는데, 타작마당마다 말을 탄 일본인 감시 눈초리가 살벌했단다.
산아! 돌 캐는 소리 가득한 이곳 갱도는 밤도 낮도 없이 캄캄하구나. 떠도는 돌가루가 안개 속 같단다. 서로 알지 못하는 우리는 눈빛만으로 안부를 묻고 생사를 짐작한단다. 두고 온 가족들의 삶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천길 땅속으로 꺼지는 것만 같다.
침략자에게 다 빼앗길지라도, 곡식 한 포기, 한 이삭, 한 톨을 자식이듯 가꾸는 우리 농민들은, 내 부모님이고 내 형제들이었지. 나는 타작하는 이들에게 잠뱅이 아랫단을 칡넝쿨로 묶게 했어. 알곡 한 줌이라도 바짓가랑이 속에 숨겨, 배곯는 어린 것들 죽이라도 쑤어 먹이라고. 너의 엄마도 늘 거친 죽을 쑤었단다.
면장인 나는 부면장의 집 건넌방을 얻어 살았단다. 그때 부면장 집 밥상에는 늘 밥이 올려졌나 보더라. 오죽하면, 밥때마다 그 집 밥상으로 달려가는, 당시 네 살 난 네 언니를 단속하며 달래곤 했단다. 1945년 일본은 패망했단다. 우리나라는 해방되었고, 일제의 권력을 업고 살던 이들은 숨어버렸지만, 나는 그 후 2년간을 더 피폐해진 가덕면민들과 함께 일했단다.
이 땅은 하나 된 독립 국가로 뭉쳐야만 했단다. 나는 대학의 강단에 서서 젊은이들을 깨우며, 우리나라가 중립국이 되기를 소망했단다. 그런데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말았지. 3·8선이라니! 우리 민족의 피눈물이 엉긴,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구나.
아! 나는 지금 어디에 와있는가? 네 엄마는 밤마다 너희들을 이불 속에 묻어놓고, 심청전을 읽어주며, 두려움을 잠재우겠지? 그러다가 문득 ‘산아 이마 위에 손차양을 해봐, 아버지 어디쯤 오는지……’ 생시인 듯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놀라 깨곤 한다. 일손을 멈추고 문득, 비석거리를 바라볼 너의 엄마를, 그리고 너희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아버지는 운다!
여보! 미안하오! 친일을 철저히 청산하는 이곳에서 일제하의 면장은 죄인이라오. 이 광산에서 나는 무엇을 캐고 있는가? 돌아가야 할 길을 등지고 캄캄한 앞길을 하루 또 하루 내 손으로 파 들어가오! 파낼수록 어둠은 깊어지오. 길은 점점 멀어지오……
---「어둠 속에서 쓰는 일기*」중에서
*이 글은 2006년 대한적십자사 본사에서의 남북 화상 상봉 때, 북에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소식을 전해 듣고 썼다.
1
갯벌 가득
빨간색 카펫을 짜다가
언덕의 발소리에
딸깍 불 끄는
농게들
끊어진 밧줄을 달고
검은 부표가 길을 잃었다
따개비 마을이 불 꺼진 지구에
매달려 있다
2
파랗게 눈뜬 빨강머리 루어
가시 꼬리로 갯벌 움켜잡고 있다
설게들 무덤을 만든다
텅 빈 갯벌에 버려진
하얀 플라스틱 대접 안에
바다가 쉬고 있다
일몰이 내려와 눕는다
---「그믐 사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