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할 명사구의 범위를 이렇게 설정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어에서는 ‘차’나 ‘학생’ 같은 맨 명사구(bare noun phrases)가 하는 역할이 무척 크기 때문이다. 모든 명사구에는 명사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므로 모든 언어의 명사구에서 명사의 역할이 핵심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어 명사구에서 명사가 차지하는 역할의 비중은 다른 많은 언어에 비해 훨씬 더 크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학생’이라는 맨 명사구와 대응되는 영어 표현으로 ‘a student’, ‘the student’, ‘students’, ‘the students’ 등을 들 수가 있다. 적당한 상황이 주어지면 영어의 이 네 가지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에 모두 ‘학생’이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가 있다. 영어의 ‘student’에 비해 한국어의 ‘학생’이 하는 역할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학생’과 같은 맨 명사구만을 가지고 상당히 다양한 의미들을 표현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한국어에서 조사가 명사구의 핵심적 의미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끼리’ 뒤에 ‘는’이 붙는지 ‘가’가 붙는지에 따라 ‘코끼리’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a. 코끼리는 잘 자요. / b. 코끼리가 잘 자요.
두 문장이 모두 코끼리의 수면 상황을 언급하지만, 각 상황에서 언급되는 ‘코끼리’의 의미는 동일하지가 않다. (1a)의 선호되는 해석 중의 하나는 코끼리의 일반적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때의 ‘코끼리’는 코끼리 전체 혹은 코끼리라는 종류를 지시한다. 이에 비해 (1b)의 선호되는 해석은 어떤 한 코끼리가 지금 잘 자고 있다는 것이어서, 여기서 ‘코끼리’는 한 마리의 어떤 코끼리를 지시한다. ‘코끼리’의 이와 같은 두 가지 의미의 차이는 ‘코끼리’ 다음에 붙은 조사 ‘는’과 ‘가’의 차이에서 비롯될 것이다. 조사 이외는 두 문장의 모든 것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명사 뒤에 붙는 조사로 인해 명사구의 핵심적인 의미가 달라지므로 명사구의 의미를 논할 때 조사의 역할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이상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우리가 관찰할 명사구의 주요 범위를 맨 명사구와 조사로 구성된 ‘차는’, ‘차가’, ‘학생은’, ‘학생이’와 같은 표현들로 설정하고자 한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한국어 명사구의 주요 의미 특성을 포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한국어 명사구의 의미와 관련하여 이러한 구성이 가지는 중요성이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지는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맨 명사구와 조사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여 이들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p.3
한국어는 초점 표지뿐만 아니라 화제 표지도 가지고 있어서 관계적 주어짐성은 적극적으로 반영된 반면에 지시적 주어짐성에 대한 직접적인 표지는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한국어의 지시적 주어짐성, 즉 특정성에 대한 관찰은 다른 간접적인 방식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인데, 화제 및 초점 등의 관계적 주어짐성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두 가지 주어짐성은 한편으로는 구별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유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주어짐성의 상호 관련성에 대해 지금보다 좀더 면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관련된 언어 현상들을 보다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p.95-96
이전의 많은 연구들이 ‘는’을 총칭 표지로 간주하여 이로부터 총칭성이 유래된다고 보았으며, 이때 명사구의 총칭성과 문장의 총칭성은 구별되지 않고 마치 하나의 현상으로 처리되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함을 살펴보았다. 이는 지시적 주어짐성과 관계적 주어짐성의 혼동의 한 예이기도 하다. 명사구의 총칭성은 종류에 대한 특별한 지시를 일컫기 때문에 지시적 주어짐성의 한 양상인 반면에, 표지 ‘는’은 기본적으로 화제와 연관되는 관계적 주어짐성을 위한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는’이나 ‘가’ 등의 조사가 총칭성의 실현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이전의 관찰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개체층위 술어 및 장면층위 술어와 같은 술어의 특성도 총칭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관성들은 이전의 연구들에서 다루어진 것보다 훨씬 세밀하게 작동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pp.169-170
복수성의 논의 전반에 걸쳐 직관적 판단의 어려움이 다른 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컸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원인의 하나로 한국어 복수 표지의 역사적 배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세국어에서는 복수 표지로 ‘?’과 ‘내’가 쓰였는데 이들은 각각 평칭 체언과 존칭 체언에 부착되어 사용되었다. 그리고 근대국어에서는 이러한 평칭과 존칭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점차 ‘?’의 사용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현대국어에 와서는 이러한 ‘들’이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네’의 복수 표지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영어의 영향을 들 수 있다. 영어가 도입되어 널리 사용되면서 그 영향으로 ‘들’의 사용이 늘어나서 지난 100여 년 동안 두 배 이상 증가하였다(노은주 2008). 영어의 복수 표지가 필수적이어서 그에 따라 ‘들’의 사용도 증가하였다는 설명이다. ‘들’을 둘러싼 이와 같은 복잡한 사정으로 인하여 ‘들’에 대한 직관의 차이가 매우 커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들’의 사용에 대해 최소한 경향성은 포착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이러한 경향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노력하였다. 앞으로도 이러한 노력들이 계속되어 직관적 어려움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 pp.245-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