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누트가 그러했듯이 에드워드는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동원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노르웨이 왕을 안전지대 밖에 묶어두기 위해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백작들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웨식스(Wessex) 백작 고드윈을 볼 때마다 형의 죽음이 떠올라 고통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고드윈의 도움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따라서 고드윈이 자신의 딸 에디스(Edith)와 결혼하라는 제안을 하자 그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고, 그녀는 그의 공식적인 왕비가 되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며, 후일 이를 두고 에드워드가 순결 서약을 했다거나, 성행위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들이 생겨났다. 잉글랜드 왕위 상속자가 될 자신의 손자를 탄생시킴으로써 본인의 가계를 왕위계승 라인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고드윈의 야망을 좌절시키기 위해 에드워드가 일부러 에디스와 거리를 두었다는 이야기도 거론된다.
---「제2장 노르만 정복」중에서
마틸다와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앙주의 조프루아 사이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황실의 격식을 (그리고 황후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계속해서 고집했으며, 나이는 스물여섯이었다. 조프루아는 기사도의 꽃으로 길러졌고, 프랑스어로 말했으며,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이 후계자를 생산하는 필수 조건은 아니었던지 마틸다는 1133년 아들을 출산해서 남편에게 안겼다. 아이의 이름은 그녀의 부친과 첫 번째 남편의 이름(하인리히)을 따서 헨리라고 지었다. …… 어머니로부터는 다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철 같은 용기와 사나운 성정을, 아버지로부터는 날카로운 정치적 지성을 물려받았음이 확연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대면했던 사람들이 가장 생생하게 증언하는 그의 자질, 즉 제어하기 힘든 에너지만큼은 그 자신의 것이었다.
---「제3장 해방된 주권?」중에서
잉글랜드, 웨일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농촌 사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제적 힘의 균형이 극적으로 바뀌고 있었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영주가 아닌 민중의 편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판햄의 장원 관리인은 ― 후일 그 자신도 흑사병으로 죽게 되는데 ― 추수 비용이 흑사병 이전의 두 배에 해당하는 1에이커당 12펜스가 들어간다고 불평했다. 노동자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그에 반비례하여 임금이 올라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판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국이 같은 양상이었다. 흑사병이 과연 이러한 농촌 대변혁의 원인이었는지, 혹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진행되어 오던 일련의 과정을 완성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것일 뿐이었는지를 떠나서, 중세 말기 브리튼의 농촌 지역은 불가역적으로 변화된 세계였다. 한 가지만 말하자면, 그 세계에는 더 이상 농노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비자유농에게 무임금으로 노동을 강제하는 일은 어려워졌다. 과거 그들은 땅과 집을 점유할 수 있도록 허용된 법적 권리의 대가로, 영주를 위해 건초를 운반하고 쟁기질을 해야 했지만, 이제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확실하게 생존자들의 편에 선 상황에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무급 노동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농부들은 영주나 관리인이 어떤 일을 해달라고 하면 임금을 지불해 줄 것을 요구하거나, 더 나아가 종전보다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제5장 죽음의 왕」중에서
그녀의 치세는 열매를 맺었다. 플랑드르에서 일어난 재앙은 잉글랜드 입장에서 볼 때 자본과 숙련 기술자들의 국내 유입을 불러온 선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안트베르펜(Antwerp)을 모방하여 잉글랜드에 처음으로 증권거래소를 개설했다. 잉글랜드 경제는 조금은 불안정하기는 했지만 괄목할 만한 산업의 팽창을 이루어내고 있었다. 주석과 철에서부터 리넨, 레이스, 유리, 비누, 그리고 소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류의 제품이 잉글랜드 안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주택들도 유리 달린 창을 다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고, 식탁용 식기류와 조리 도구에서도 백랍이 나무 재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잉글랜드는 매우 중대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풍요의 뿔(cornucopia)’은 모든 사람에게 그 과실을 풍족하게 나눠주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인구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잉글랜드 인구는 500만 명에 달했다. (스코틀랜드는 50만이었다.) 흑사병 이후 최대의 인구 증가가 이 시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먹여 살릴 인구는 늘어났는데 일자리는 부족했고, 임금 협상력은 떨어져서 노동자들은 전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농촌 지역에서는 수익이 높은 목축을 하기 위해 공유지에 대한 인클로저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수많은 촌락에서 백성들의 자급자족적 생계의 가능성을 봉쇄함으로써, 많은 이가 토지 없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이리저리 떠도는 수많은 부랑 빈민의 대열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7장 여왕의 신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