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는 마지막으로 바닥에 뒤집힌 채 놓여 있던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고작 그것만으로 심장이 쿵쿵, 요동을 쳤다.‘2학년 12반 학기 말 기념’이라는 글자가 하단에 프린팅되어 있는 단체 사진 속에는 새끼손톱만 한 얼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 속에서 찾은 앳된 자신의 얼굴에는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당시 담임이었던 박찬용 선생은 인원 체크를 하며 번호 순서대로 서게 했었다. 노진환, 남경훈, 도성재, 민우식, 박우진……. 하지만 ‘그 자식’은 없었다. 불현듯 가슴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이 꽉 조이는 듯 아팠다. 봉인해놓은 기억들이 풀어져 수면 위로 마구 떠오르려 했다. 연아는 탁, 소리가 나도록 사진을 뒤엎었다.
그만해. 이제 네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1권, 내 인생을 망친 개자식」중에서
조용한 건물 안에 시멘트 바닥을 딛는 구두 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연아는 맨들한 나무 손잡이를 쓸며 계단을 올라갔다. 오래 삭은 나무와 곰팡이 낀 집기류의 퀴퀴한 내음이 기시감을 주었다. 이윽고 3층에서 발걸음을 멈춘 연아는 4층을 향하는 계단을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 망설이다 첫 번째 계단에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어디선가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댕, 하고 울렸다.
“하나, 둘, 셋, 넷…… 여덟, 아홉, 열, 열하나, 열둘.”
댕, 하고 종소리가 멈췄다.
“여, 열셋……?”
발밑에서 하얀빛이 새어 나왔다. 일렁이던 빛은 연아가 서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점점 크게 번져 나가더니 이윽고 그녀를 덮쳐왔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기억 그대로였다.
주변의 공기가 울렁거리며 몸을 죄어왔다. 강렬한 빛에, 뒤바뀐 공기의 흐름에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곧이어 시야가 확 밝아지더니 팟, 하고 끊겨버렸다. ---「1권, 13번째 계단」중에서
미친 듯이 설레고, 미친 듯이 떨렸던 18살의 사랑.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아기새처럼 내 세상엔 네가 전부였다. 함께한 모든 것들이 환희와 경이로움으로 다가왔었다. 너와 함께라면 신호등을 건너는 순간도, 같이 우산을 쓰며 길을 걸어가는 순간도, 세상 어느 것보다 특별한 색으로 채색되곤 했었다.
넌 내 우주였고, 내 세상의 중심이자 전부였어.
가슴 한 곳이 찌릿하게 아팠다. 먹먹함이 가슴 전체를 뒤덮으며 심장이 조여왔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널 만나면서부터 내 인생은 꼬였어. 그리고 너도.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너와 날 망가뜨린 그날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라.
무게 추가 현실 쪽으로 기울고는 있지만 지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아직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라면, 정말 과거 속으로 뛰어든 것이라면 그토록 원했던 일을 할 것이다.
너와 엮이지 않는 것. 널 피하는 것.
---「1권, 맹렬하게 피해주리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