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중국의 역사는 근현대 한국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한 국가, 혹은 한 민족의 역사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것은 근현대 시대 자체가 한 국가, 한 민족의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지역, 혹은 세계사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근현대 중국사를 관통하고 있는, 열강에 의한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라는 외부적 규정성과 그에 저항해 국가적 독립과 자주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들은 근현대 중국의 역사를 일국사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든다. 또 최근 벌어지고 있는 중국의 강대국으로서의 부상 역시 중국사를 일국사로만 설명할 수 없게 한다. 이를테면 근현대 중국의 역사는 출발에서부터 종착(현재)에 이르기까지 지역 내지 세계의 변동과 함께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p.30
건륭제가 십전으로 영역을 확보한 공적은 매우 컸지만, 내부 통치 구조 자체는 강희·옹정 연간처럼 공평하고 철저히 관리되지 못했다. 이는 화신(和?)을 비롯한 관료들의 부정·부패에 원인이 있었다. 1769년부터 화신은 두각을 나타내며 건륭제의 눈에 들기 시작한다. 화신이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어 권력의 핵심을 차지하는 1776년부터 20년간 건륭제 통치 체제는 느슨해졌다. 실권이 화신에게 넘어가면서 청나라의 관료 사회는 빠르게 부패해 갔다. 화신은 가경제(嘉慶帝)가 등극해 4년이 지난 1799년 건륭제가 죽자 바로 처형되었는데, 이때 몰수한 재산이 8억 냥에 달했다. 청조의 예산이 몇천만 냥이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화신을 비롯한 당시 관료들의 부패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 p.45~46
청조와 일본 메이지 정부의 근대적 수교는 1871년 근대적 평등 조약인 청일수호조규 체결로 시작되었다. 1874년 타이완 원주민의 류큐(琉球)인 살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타이완을 침공하자, 이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청의 이홍장과 총리아문이 일본의 류큐영유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원래 류큐는 중국 및 일본 사쓰마번(薩摩藩)과 조공·책봉 관계에 있는 왕국으로 일본의 고유 영토가 아니었다. 그런데 청은 류큐인의 피해보상을 주장하는 일본의 요구를 수용했는데, 1879년 일본이 류큐제도(琉球諸島)를 오키나와현(沖繩縣)으로 강제 병합하는 데 이것이 근거가 되었다. 이는 근대 국제법의 국가주권 관념이 도입되는 동아시아 질서의전환기에 일본이 주권 관념에 어두운 청조 관료들의 외교적 약점을 파고들어 청의 전통적 조공국을 잠식한 것이다.
--- p.101~102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에서 ‘동양(東洋)’의 소국 일본에 참패를 당한 것은 엄청난 충격을 주어 청 말의 근대적·정치적 변혁과 내셔널리즘을 본격적으로 출범시키는 역할을 했다. 청일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무력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청조 때문에 무술개혁(무술변법)으로 알려진 체제 내 개혁 움직임이 점차 여론의 지지를 받아 힘을 얻게 되었다.
--- p.118
“반만”의 구호를 내세워 “오랑캐를 몰아내자”라고 외쳤던 혁명파가 중화민국 성립 직후 곧바로 ‘오족공화론’을 인정해 버린 점을 주목할 필요가 한다. 이 오족공화론은 청조는 타도하지만 그 유산인 광대한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겠다는 내셔널리즘에 기초한 영토 의식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쑨원이 내세웠던 ‘반만’이라는 감성적 내셔널리즘보다는 근대국가의 영토 논리를 충실히 따른 냉정한 발상이었다.
--- p.147~148
『신청년』과 결별한 후스는 문학과 철학 주제를 주로 다루는 『노력주보(努力周報)』를 창간했다(1922). 봉건적 전통문화를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후스는 민족문화의 정수를 ‘과학적’ 방법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국고정리(國故整理)’운동을 펼쳐 학술적 업적을 쌓았다. 후스뿐 아니라 량치차오(梁啓超), 펑유란(馮友蘭) 등은 제자백가 철학을 새롭게 해석했고, 공자와 유가 철학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를 하며 근대적 학문 전통을 수립했다. 문학사 방면에서도 경시되어 온 고대문학 작품이나 대중문학 작품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켜, 유학뿐 아니라 다양한 전통의 정수를 정리하는 데 공헌했다. 특히 ‘신사학’이라 일컬어진 과학적 연구 방법의 역사학 발전은 신문화운동의 최대 결실로 평가된다.
--- p.168
중공이 처음으로 ‘장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1935년 12월, 마오쩌둥은 한 보고에서 “장정은 혁명의 선전대이자 선언서이고 파종기였으며 ……, 우리의 승리와 적의 실패로 끝났다”라고 선언했다. 지난한 역경 속에서도 강고한 혁명적 이상주의와 신념을 지켜낸 홍군 장정의 역사는 혁명을 향한 각고의 분투와 헌신의 상징으로, 이후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 p.196
스탈린을 개인숭배 하는 데 반대하고 비판하는 소련공산당의 투쟁은 “위대하고 용감한 일”이지만, 스탈린의 공적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프롤레타리아트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關于無産階級專政的歷史經驗)」를 1956년 4월 발표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만년에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잘못을 저질렀지만,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해 인류 사회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전망을 갖도록 한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공과를 고려한 스탈린 평가를 강조한 이 주장은 소련 지도부와의 거리 두기는 물론이고, 소련에 대한 중국의 우월감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들 또한 과거에 주관주의로 인한 개인숭배 등의 오류를 범한 적이 있었지만, 대중노선과 집단지도, 민주집중제 등과 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원칙에 입각해 성공적으로 극복해 왔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 p.276
공작조와 초기 홍위병이 출신 성분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이 이후 ‘혈통론’으로 발전하자, 이에 반대하는 대학생 조직들이 “반혈통론”과 “반공작조”를 외치며 별도의 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공작조를 파견하고 이에 적극 동조한 당 조직에 대해 비판적·대립적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들 또한 홍위병 조직이기는 했지만, 고급 간부 자제들로 구성된 ‘노홍위병’과 구분해 스스로를 ‘조반파(造反派)’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조반파’라는 명칭은 홍위병들이 스스로의 조직을 정당화하면서 찾아낸 “조반유리(造反有理)”라는 구호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당연히 조반파 조직은 열세였고, 공작조와 연계한 초기 홍위병 조직은 열렬히 혈통론을 주장하면서 “아버지가 혁명을 하면 아들은 훌륭하고, 아버지가 반동이면 자식은 쓰레기”라는 대련(對聯)을 내걸고, 반대파를 탄압했다. 반대 세력에 힘이 밀린다고 여겨 1966년 상반기 베이징을 벗어나 있던 마오쩌둥이 7월 말 베이징으로 복귀하여 “혈통론이 틀렸고 공작조는 오류를 범했으니 즉각 철수하라”고 지시함으로써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 p.304
중국의 소프트 파워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일당제의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인권과 법치 영역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여기에 더해 티베트(西藏)와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自治區) 지역의 소수민족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가 있다. 이런 과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중국은 서방 선진국뿐만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에게도 ‘정치 후진국’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중국이 정치 민주화를 달성해 경제와 군사뿐만 아니라 인권과 법치 영역에서도 커다란 발전을 이룩하기 전까지, 중국의 소프트 파워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 p.354
역사 속 속국관은 20세기 중반 장제스의 국제질서관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그가 조선의 독립과 자유를 요구한 것은 조공 관계에 기반을 둔 도덕의무에서 나온 것이지, 주권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한·중 관계의 역사적 맥락에서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장제스의 구상에는 한·중 관계의 ‘변하지 않는’ 요인인 비대칭성과 근접성, 한반도 위치의 중요성이 미국(과 소련)이라는 제3자의 요인에 의해 변형된 채 남아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을 지원하면서 이를 매개로 전후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유지 내지 확대하기를 기대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요구 등을 고려해 1943년 카이로회담 당시 미국과의 논의 과정에서 조선의 ‘즉시독립’을 제안했다.
--- p.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