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월경, 어머니, 사춘기, 결혼 등은 오늘날에도 존재하지만, 조종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로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에서 순전히 생물학적인 의미 외에 그 어떤 영적 의미를 찾지 않는다. 월경과 임신이 지니는 우주적 상징체계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대부분 피임약과 콘돔의 기능으로 축소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위를 서로 연결시켰던 여성의 제식적 조정 기능은 수백 년 전부터 이미 잊히고 사장되었다.
---「2장 선사 시대 미디어로서 여성」중에서
이제부터 지배적인 미디어가 된 새로운 미디어는 원래 사냥꾼들의 의식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의식의 두 단계 발전 과정 중 첫 번째 단계다. 이 단계는 다시 고대의 새로운 미디어인 극장의 시작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극장에서는 신화에서 이성으로, 성스러운 제식에서 역사적인 행위로, 원형(原型)에서 구조로의 전환이 완결된다. 두 번째 단계로서 모계 사회의 제식들, 특히 성스러운 결혼은 그 기능이 전환되어 아테네 풍의 축제로 기술된다. 이로써 하나의 완전히 다른 발전의 갈래가 입증되었는데, 중세의 성에서 활동했던 궁정 광대들뿐만 아니라 농촌에서 일어났던 중세적 농부 놀이 및 축제와 함께 카니발 혹은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사육제로까지 이어졌다.
---「3장 가부장적 의식들」중에서
미결정성, 무상함, 공포에 당면했을 때 제공되는 확신, 안정 그리고 희망에서 유래한 힘은 다양한 형식의 예언술로 유입되기 때문에 위험한 고비, 거칠고 사나운 시기에 예언자, 직업적인 점쟁이, 치료사, 점성술사는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 선하고 악한 권력과 관련해 비전을 담은 경험과 신비로운 힘, 신탁의 표현 (…) 명민한 관찰, 치료의 능숙함, 동물 해부학과 성좌에 대한 기술적인 지식, 새점이나 그 밖의 예언이나 점성술에 속한 수단 덕분에 그들은 스스로 초월적인 사회 계층에 소속되었다.
---「7장 사제, 샤먼, 마법사, 예언자 : 고대 지배 미디어의 발전에 대해」중에서
아오이데는 라우테 또는 리라에 맞추어 직접 작곡한 신과 영웅들의 노래를 연주하고 다니는 유랑 가수다. 때에 따라서는 옛날의 전설, 춤곡, 장송곡도 연주했다. 문제는 그들이 궁정에서 특권을 누리는 직업적인 가수였다는 사실과 무엇보다도 죽음의 극복을 통해 얻은 명성이다. 헤르비히 멜러는 아오이데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그를 통해 위대한 영웅과 그들의 행적에 대한 회상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다.” 말하자면 그는 ‘알림’ 속에서, 곧 영웅들의 노래 속에서 그들의 영생을 위한 보증인이다. 이러한 존속은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죽음을 초월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호머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무엇인가 신적인 것이다. 자세히 말하면 그것은 인간에게 열려 있는, 신적인 것의 몫을 나누어 받는 유일한 형식이다.
---「8장 아오이데에서 음유 시인까지」중에서
비둘기는 파발꾼처럼 숨어서 기다리다가 편지를 강탈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안전했다. 불편한 점은 비둘기에게 무거운 것을 매달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랍인들은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은 종이 제조법을 알고 있었고, 이것으로 파피루스를 대체했다. (중략) ‘새종이’라고 불렸던 특히 섬세한 종류의 종이를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미 8세기에는 우편 비둘기의 정거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대개 일반적인 우편로를 따라서 보다 큰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우편 비둘기들은 말하자면 릴레이식 비행을 한 것이다.
---「12장 편지의 기원에서 “속달 운송” 체계의 붕괴와 칼리프들의 국가 우체국까지」중에서
드루이드 사제는 사제 신분 그 이상이었다. 장 마르칼레는 이것을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켈트족의 모든 종교적, 지적, 예술적, 사회적, 과학적 구상의 총체”라고 정의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켈트족에 대한 로마인들의 투쟁은 사실은 드루이드 사제들을 겨냥했고, 로마인들은 그들이 켈트족을 로마에 저항하기 위해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드루이드 사제들이 포괄적으로 가진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제식적인 의미와, 부분적으로 가진 경제적 의미는 매우 특별한 그들의 미디어 형식 때문이다. (중략) 켈트 문화는 순수한 구두 문화이며 조형 문화였다. 켈트족의 언어는 한 번도 문자로 쓰이지 않았다. 문자적 기록이 필요하면, 켈트족은 그들의 고유한 문자를 개발하는 대신 간단히 그리스 문자를 사용했다. 따라서 드루이드 사제들은 켈트족 사회에서 구두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적인 언어환경으로, 곧 사회적, 제식적 상호작용 과정들을 구두로 결정하는 조직원리로 기능했다.
---「13장 역사의 마지막 순수 인간 미디어로서 고대 켈트족의 드루이드 사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