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닫기
사이즈 비교
소득공제
나말여초 남종선 연구

나말여초 남종선 연구

[ 양장 ]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정가
25,000
판매가
25,000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지역변경
  • 배송비 : 무료 ?
eBook이 출간되면 알려드립니다. eBook 출간 알림 신청
  •  해외배송 가능
  •  최저가 보상
  •  문화비소득공제 신청가능

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10월 1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601g | 153*225*20mm
ISBN13 9788933706657
ISBN10 893370665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조범환
서강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서강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서강대학교 박물관 연구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우리 역사의 여왕들』(책세상, 2000), 『新羅禪宗硏究』(一潮閣, 2001), 『羅末麗初 禪宗山門 開創 硏究』(景仁文化社, 2008)가 있으며, 논문으로는 「神穆太后―新羅 中代 孝昭王代의 政治的 동향과 神穆太后의 攝政」, 「新羅 下代 憲德王의 副君 설치와 그 정치적 의미」, 「新羅 中代 聖德王代의 政治的 動向과 王妃의 交替」, 「王妃의 交替를 통하여 본 孝成王代의 政治的 動向」, 「신라 화랑도와 승려」, 「신라 源花에 대한 새로운 이해」, 「眞興王巡狩碑에 대한 몇 가지 疑問과 새로운 理解―〈北漢山碑〉·〈黃草嶺碑〉·〈磨雲嶺碑〉를 중심으로」 외 다수가 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도의선사는 821년 무렵에 당나라에서 귀국하였지만, 김헌창의 난으로 말미암아 경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또한 왕실이나 진골 귀족을 단월로 삼지 못하였는데, 그것 역시 김헌창의 난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에 그는 설악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 설악산에 들어간 그는 왕실의 배려로 진전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진전사와 억성사를 중심으로 설악산문을 형성하였으며 많은 선승이 그곳을 방문했다. 그가 살아 활동하였던 시기 동안에는 물론 열반에 든 이후에도 설악산문은 왕실의 지원 아래 성장했다. 그런데 설악산문에 변화가 생겨났는데, 그것은 억성사 출신의 체징선사가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개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설악산문은 가지산문에 비하여 그 영향력이 전보다는 낮아졌다. 게다가 명주에서 새로운 굴산문이 탄생, 발전하면서 설악산문은 그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설악산문의 위상이 약해졌다고 해서 도의선사의 위상까지 함께 약해진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도의선사는 가지산문의 개산조가 됨으로써 장흥 보림사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에서 새롭게 탄생하게 되었다.---p.39

현욱선사는 태어났을 때 진골 신분이었다. 그러나 신라 하대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버지인 김염균이 실세失勢하여 정치적인 출세의 길이 어려워지자 출가의 길을 택한 것으로 생각된다. ~ 현욱선사는 흥덕왕의 요청을 받고 귀국을 결심하였다. 흥덕왕의 선종을 통한 개혁 정치에 도움을 주고자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욱선사는 귀국하여 실상사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흥덕왕이 사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중앙의 정치적인 상황이 매우 혼란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민애왕과 신무왕으로부터 제자의 예를 받았다. 그런 가운데 실상사에도 변화가 있어 현욱선사는 실상사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욱선사는 남악 및 북악과는 거리가 먼 지역을 택하였으며 여주 혜목산에 자리를 잡았다. ~ 이후 경문왕은 현욱선사를 여주의 고달사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는 그동안 여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그를 배려한 것이라고 파악된다. 현욱선사는 고달사를 중심으로 남종선을 알렸으며, 염거선사의 제자인 홍각선사 이관이 그로부터 법을 받아 억성사로 돌아가 현욱선사의 법을 전하였다. ~ 원감선사 현욱은 신라 하대 선종의 수용과 그 전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봉림산문의 개산조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pp.66~68

신라 하대 무진주 지역에 위치하였던 여러 선종 사찰 가운데 쌍봉사가 주목된다. 누가 개창하였는지 그리고 언제 개창되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리산문을 개창한 혜철선사가 839년 무렵에 머물렀고, 사자산문의 개산조가 되는 철감선사 도윤도 주석하다 열반에 든 곳이다. ~ 쌍봉사의 사세寺勢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경제적인 지원에 말미암아서이다. 장보고가 쌍봉사에 여러 가지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무진주 지역에서 쌍봉사의 영향력이 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보고 사후 왕실의 지원을 받고 있던 보림사의 보이지 않는 견제를 받아야 하였다. 경문왕은 당나라에서 귀국해 금강산 장담사에 주석하던 도윤선사를 쌍봉사에 주석시켰다. 도윤선사의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인데, 왕실의 그러한 의도는 결국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도윤선사는 경문왕의 지원을 받아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의 사세를 더욱 확장하였으며 사자산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견훤이 무주 지역의 맹주가 되자 쌍봉사는 다시 견훤 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견훤 정권의 보호 아래 계속해서 그 위상을 유지하였다.---pp.89~90

실상산문과 쌍계사가 지리산 자락에 위치하게 된 배경은 북종선과 중앙의 지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이후 지리산과 멀지 않은 서남지역에 많은 선종 사찰이 창건되었는데, 그것은 회진항이라는 항구와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많은 유학승이 당나라에 오갈 때 무주 회진항을 통하여 드나들었으며, 그 과정에서 서남지역에는 곧바로 새로운 사상이 밀려들어 왔다. 이에 선승들은 무주 회진항과 가까운 곳에 머물면서 남종선을 전파하고자 한 것이다. 이처럼 무주를 포함한 서남 지역은 사상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던 곳이다. 그 결과 선종 사찰들이 일찍부터 생겨났으며 쌍봉사와 황학사가 대표적인 사찰이다. 한편 선종 사원과 장보고 집단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우선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서남 해안지역의 해적 활동을 제압함으로써 선종산문은 중앙 진골 지배세력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장보고 집단의 활약으로 선종 사원들은 도적들의 침탈에서도 보호를 받았다. 이렇게 볼 때 서남 지역에서 선종산문이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장보고 집단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pp.115~116

범일선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명주 지역 토착 세력의 후원보다는 오히려 그곳에 외관으로 내려온 진골 귀족의 도움으로 굴산사를 개창하였다. 또한 그는 명주 도독의 힘을 빌려 강원도 지역의 여러 화엄종 사찰들을 선종 사찰인 굴산사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 굴산문의 범일선사가 열반에 든 이후 중심 도량인 굴산사에는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다. 범일선사의 제자 가운데 행적과 개청 두 선사는 굴산사를 벗어나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 굴산문 출신의 개청과 행적 두 선사는 서로 다른 단월세력을 만나 범일선사의 뜻을 유지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었다. 서로가 굴산문의 정수를 이었다고 하였지만 어쩌면 그러한 주장은 그들이 새로운 산문의 주도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 승려의 이와 같은 노력은 결국 굴산문의 분화를 이끌어내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굴산문이 오히려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결과까지 불러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pp.139~141

신라 하대 선승들과 왕실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둘의 관계가 밀접하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왕실은 여러 가지 의도를 가지고 선승들을 대하였다. 선종 불교가 들어온 직후에는 선승들을 지원하여 교학 불교 세력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며, 선종이 점차 세력을 확대하자 포섭하고 통제하려는 의도에서 선승들을 왕실로 부르기도 하였다. ~ 그러면 선승들은 왕실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대응했을까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대답하기는 매우 어렵다. 선승들 각자의 태도와 생각이 어떠하였는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었다. ~ 한편 선승들도 선종을 널리 홍포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경문왕대와 헌강왕대에 적극적으로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그만큼 그 시기가 그들에게 있어 중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의 선승들이 여러 측면을 고려하여 행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왕실과 관계를 가진 선승들은 왕실과 서로 호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신라 왕실과 선승들의 관계를 서로 밀접하게 본 것도 문제가 있지만, 소극적이고 비협력적으로 보았던 것도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선승들은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탄력적인 대응을 하였기 때문이다.---pp.174~175

무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선종산문이 개창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 지방의 해상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장보고의 해상 세력은 선종산문의 개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파악된다. 많은 선승이 장보고 선단을 이용하였으며, 이들은 장보고를 단월로 삼아 선종산문의 사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결국 장보고의 무역 선단이 신라의 선종을 일으키는 불씨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비록 장보고가 청해진의 대사가 되어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일본과의 해상 무역권을 장악하였다고는 하지만, 그의 정치적인 지위는 보잘것없었다. 특히 중앙의 진골 귀족들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장보고는 홍척선사를 통하여 자신의 활동을 중앙에 전달하고 나아가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고 볼 수 있다. ~ 장보고의 선종과 선종산문에 대한 관심은 무진주 지역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도 드러났다. 성주산문을 개창한 무염선사가 845년 신라로 귀국하기 이전 당나라에서 활동할 때 장보고가 지원하였다고 전한다. 그리고 무진주를 중심으로 찬란한 선종 문화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장보고의 정치적인 목적과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보고의 죽음 이후에도 선종산문이 크게 성장,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닦아 놓은 터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pp.94~195

견훤은 어린 시절부터 선종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가 태어난 상주는 교통의 요지이면서 선종 불교의 영향력이 매우 강한 곳이었다. ~ 무진주에 나라를 세운 견훤은 실상산문과 연결되었는데, 이는 선승들과의 연결뿐만 아니라 왕실과 연계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승들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그곳의 사정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도움도 얻고자 하였다. ~ 전주로 천도한 이후 견훤은 실상사의 편운화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실상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적극적으로 하였는데, 그것은 견훤이 신라로부터 사상적으로 자립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 견훤은 신라 말 최고의 선종산문이라 할 수 있는 가지산문과 동리산문 그리고 실상산문을 그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리고 성주산문이나 굴산문과 연결된 경보선사를 국사로 삼아 산문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또한 상주 출신의 긍양선사가 귀국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는 상주의 희양산문과 연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듯 견훤 정권과 선종 불교는 신라 말 고려 초 변혁기에 있어 그 친연성이 매우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pp.218~219

신라 하대의 사원 가운데에서도 특히 선종 사원은 박래품을 교역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해상 무역상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선종 사원의 경제적 기반과 관련하여 알려진 것과는 크게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즉, 토지가 사원의 경제적 기반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신라 하대 선종 사원의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 선종 사원은 당시 왕실과도 연결되었지만 지방 호족 세력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당물이 도착하면 선종 사원에서는 지방 호족 세력과 해상 무역상들을 연결하는 역할까지 하였고, 그러한 것을 통하여 사원의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였던 이유는 9~10세기 당나라에 유학하였던 신라의 선승들이 오랫동안 그곳에서 머물면서 여러 곳을 다닌 결과 중국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선종 사찰은 해상 무역상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가 되었고 해상 네트워크의 결절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종 사원의 발전과 해상 무역의 발전은 서로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고, 선승들의 생각이 달라진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pp.233~234

신라 하대에 선승들이 차를 마시게 된 것은 당나라 유학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에서는 일반인들보다 승려들이 먼저 차를 마시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수행의 방편이었으나 나중에는 선원禪院의 의식으로 발전하였다. ~ 당나라에 들어간 신라 승려들은 남종선을 익히는 과정에서 차에 대하여도 자연스레 익히게 되었다. 특정한 사찰에서 공부하는 동안 차의 재배부터 음용하는 방법 그리고 사용되는 도구들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던 것이다. 수십 년을 당나라에서 보낸 승려들이 차와 불가분의 관계에 이르게 되었다고 해도 무리한 지적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차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을 것이다. 신라에 돌아와서도 그들은 계속해서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그것은 왕실이나 진골 귀족들이 계속해서 차를 공양하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손수 차를 재배하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바로 흥덕왕대에 김대렴이 지리산 자락에 차를 심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 선승들은 차를 오로지 독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마셨다. 혜소선사의 예를 통하여 알 수 있듯이 차를 통한 평등사상을 일깨우게 된 것이다. 선승들의 차의 음용이 결국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이끌어내었다고 하면 어떨까 싶다.---pp.254~255

신라 하대에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승려들은 신라 사회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당나라 유학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귀국한 이후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배층들에게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을 요구하였다. 신라 승려들이 외국에서 경험한 새로운 체험은 곧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신라 하대에 당나라에 간 승려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불교인 선종을 접하게 되었고 그것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선종 사찰에서 공부하면서 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그곳 승려들과 일상생활을 함께하면서 공부와 수행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생활도 접하게 되었다. ~ 선승들은 기울어 가는 신라를 위하여 비록 적극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신라 사회에 적용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심지어 왕에게 정치적인 조언도 아끼지 않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신라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컸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즉, 당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신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노력의 과정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회의 도래를 맞이하였다. 신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 그들의 노력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당나라 유학을 한 선승들의 제자들과 새롭게 당나라 유학을 한 승려들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왕건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그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였다. 이들이 나말여초에 끼친 영향은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매우 컸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pp.277~278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회원리뷰 (0건) 회원리뷰 이동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

첫번째 리뷰어가 되어주세요.

한줄평 (0건) 한줄평 이동

  등록된 한줄평이 없습니다!

첫번째 한줄평을 남겨주세요.

배송/반품/교환 안내

배송 안내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배송 구분 예스24 배송
  •  배송비 : 무료배송
포장 안내

안전하고 정확한 포장을 위해 CCTV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객님께 배송되는 모든 상품을 CCTV로 녹화하고 있으며, 철저한 모니터링을 통해 작업 과정에 문제가 없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목적 : 안전한 포장 관리
촬영범위 : 박스 포장 작업

  • 포장안내1
  • 포장안내2
  • 포장안내3
  • 포장안내4
반품/교환 안내

상품 설명에 반품/교환과 관련한 안내가 있는경우 아래 내용보다 우선합니다. (업체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품/교환 안내에 대한 내용입니다.
반품/교환 방법
  •  고객만족센터(1544-3800), 중고샵(1566-4295)
  •  판매자 배송 상품은 판매자와 반품/교환이 협의된 상품에 한해 가능합니다.
반품/교환 가능기간
  •  출고 완료 후 10일 이내의 주문 상품
  •  디지털 콘텐츠인 eBook의 경우 구매 후 7일 이내의 상품
  •  중고상품의 경우 출고 완료일로부터 6일 이내의 상품 (구매확정 전 상태)
반품/교환 비용
  •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 반송비용은 고객 부담임
  •  직수입양서/직수입일서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20%를 부과할수 있음

    단, 아래의 주문/취소 조건인 경우, 취소 수수료 면제

    •  오늘 00시 ~ 06시 30분 주문을 오늘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오늘 06시 30분 이후 주문을 익일 오전 06시 30분 이전에 취소
  •  직수입 음반/영상물/기프트 중 일부는 변심 또는 착오로 취소 시 해외주문취소수수료 30%를 부과할 수 있음

    단, 당일 00시~13시 사이의 주문은 취소 수수료 면제

  •  박스 포장은 택배 배송이 가능한 규격과 무게를 준수하며, 고객의 단순변심 및 착오구매일 경우 상품의 반송비용은 박스 당 부과됩니다.
반품/교환 불가사유
  •  소비자의 책임 있는 사유로 상품 등이 손실 또는 훼손된 경우
  •  소비자의 사용, 포장 개봉에 의해 상품 등의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예) 화장품, 식품, 가전제품, 전자책 단말기 등
  •  복제가 가능한 상품 등의 포장을 훼손한 경우 : 예) CD/LP, DVD/Blu-ray, 소프트웨어, 만화책, 잡지, 영상 화보집
  •  소비자의 요청에 따라 개별적으로 주문 제작되는 상품의 경우
  •  디지털 컨텐츠인 eBook, 오디오북 등을 1회 이상 다운로드를 받았을 경우
  •  eBook 대여 상품은 대여 기간이 종료 되거나, 2회 이상 대여 했을 경우 취소 불가
  •  중고상품이 구매확정(자동 구매확정은 출고완료일로부터 7일)된 경우
  •  LP상품의 재생 불량 원인이 기기의 사양 및 문제인 경우 (All-in-One 일체형 일부 보급형 오디오 모델 사용 등)
  •  시간의 경과에 의해 재판매가 곤란한 정도로 가치가 현저히 감소한 경우
  •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이 정하는 소비자 청약철회 제한 내용에 해당되는 경우
소비자 피해보상
  •  상품의 불량에 의한 반품, 교환, A/S, 환불, 품질보증 및 피해보상 등에 관한 사항은 소비자분쟁해결기준(공정거래위원회 고시)에 준하여 처리됨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
  •  대금 환불 및 환불 지연에 따른 배상금 지급 조건, 절차 등은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처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25,0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