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의 농부는 적지 않은 농기구를 제 손으로 마련하였다. 여름 짓기는 곧 농기구를 손에 쥐는 일이어서, 이 일에 온 정성과 슬기와 솜씨를 쏟아부었다. 이를테면, 지게 한 틀을 걸 때도 먼저 싹수가 보이는 어린나무를 골라두고 자라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둥치와 가지의 사이가 지나치게 벌어진다 싶으면, 나뭇가지에 맨 끈을 올려서 조이고, 좁게 느껴지면 돌을 매달아서 낮추었다. 이렇게 서너 해를 어린 피붙이 돌보듯 하며, 알맞게 자라기를 기다렸다. 어디 그뿐인가? 하다못해 도끼나 쇠스랑 자루 따위의 감도 어린나무 적부터 눈여겨보다가 되었다 싶을 때 거두었다. 그리고 맡은 사람이 있다는 표지로 새끼줄이나 덩굴을 둘러놓으면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 이 덕분에 누구든지 자신의 몸이나 나이 그리고 성품 따위에 따라 알맞은 기구를 쓸 수 있었다. 한 집에서 낫이나 호미는 물론, 지게에 이르기까지 여러 틀을 갖춘 까닭이 이것이다. 손재주가 모자라면 이웃과 품을 바꾸거나 손을 빌렸으므로 큰 불편을 몰랐다. 또 비록 제 산의 나무 한 그루라도 벨 때는 산의 주인 신령神靈에게 절을 꾸뻑하며 ‘베어갑니다’ 읊조렸고, 쟁기·절구·디딜방아 따위의 큰 감을 거둘 때는 제물을 차리고, “고맙습니다. 농기구를 쓸 때 사고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까지도 호미·괭이·보습 따위가 돌 따위에 걸려서 부러지거나 깨지면 그 조각을 남김없이 모아두었다가, 오는 봄에 찾아오는 대장장이에게 넘겨서 다시 구워 썼다.
농부는 저마다의 내력을 지닌 농기구를 손에 쥘 때마다 여간한 조심을 하지 않았다. 아껴서 쓰다가 부러지면 덧대서 잇고, 터지면 꿰매며, 해지면 깁고, 뚫어지면 메우고, 구부러지면 바로잡는 등 끊임없이 손을 보았다. 그리고 더 쓰지 못할 만큼 헐거나 낡아도 냉큼 버리지 못하였다. 특히 쟁기·디딜방아·지게·멍석 따위처럼 대를 이어 쓴 것은 대문 벽에 걸어두고 드나들 때마다 눈길을 맞추면서 쓰다가 남기고 간 이를 떠올렸다. 경기도 포천시의 한 농부는 부친이 걸어서 쓰던 쟁기 한 틀을 마지못해 농업박물관에 건네면서도, 나머지 한 틀은 아버지의 손때를 먹은 것이라며 막무가내로 손사래를 쳤다. 그는 지금도 헛간 벽에 걸린 쟁기에 눈이 갈 때마다 부친에 대한 그리움에 잠길 것이다. 스스로 장만하지 않고 돈으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이다. 30여 년 전,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오봉리 이씨 집 대청 벽에 나란히 걸린 서너 틀의 체를 들어내자 하나하나에 사들인 일자와 값 그리고, 남에게 빌려주지 말고 아껴가며 부디 오래 쓰라는 당부까지 적혀 있었다. 70대의 안 마나님은 어린 손자녀이기라도 한 듯, 두 손으로 체를 조심조심 쓰다듬어 가며 내력을 들려주었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이나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이다. 여름 짓는 이들은 꿈이자 보람이고 삶 자체이기도 한 농기구를 통해서 하늘의 운행과 땅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깨우쳤다. 옛이야기를 비롯하여 속담 따위에 등장하는 적지 않은 농기구가 좋은 보기이다. 이를테면 디딜방아에 38, 낫에 15, 절구에 14, 맷돌에 열, 쟁기에 아홉, 호미와 괭이에 여덟 개의 속담이 딸린 것이 그것이다. 쟁기가 하늘의 노여움을 드러내고, 메가 돌을 황금으로 바꾸며, 물속에 빠뜨린 도끼가 복을 부르고, 도리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며, 몽당빗자루는 죽은 이를 살려낸다. 어디 그뿐인가? 저울을 속인 탓에 쇳물이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허덕이고, 악독한 의붓어미가 작두날의 밥이 되며, 맷돌이나 절구는 음양 화합의 이치를 드러내 보인다. 따라서 농기구에 맺힌 깊은 애정과 오묘한 느낌과 오랜 세월 동안 갈고 닦아온 슬기는 우리 겨레의 인생관과 우주관이 낳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시대에 선보인 우리 농업 관련 서책은 30여 권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중국의 것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 많고, 독자적인 것은 다섯 손가락에도 차지 않는다. 이는 글줄이나 한다는 양반님네가 농기구를 손에 잡지 않고 사는 것을 큰 행운으로 여긴 탓이다. 농사를 오죽이나 몰랐으면 ‘호미를 어깨에 메고’, ‘낫을 허리에 찬다’는 터무니없는 시문詩文을 거침없이 남겼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중국을 앞서려고 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저들의 것을 이용하려고 나서지도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를테면, 중국의 무자위를 들여오자는 주장이 고려말에 시작되었음에도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여러 사람이 입으로만 찧고 까부르기만 한 탓에 우리 농군은 19세기 말에도 깜깜 절벽이었다. 오죽했으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무자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으니 (…) 입으로 밥알이 들어가는 것이 요행이라”는 한탄을 늘어놓았겠는가? 이에 견주어, 일본은 우리보다 7백 년 앞서 들여갔고, 우리는 나라를 빼앗긴 뒤에야 저들의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18세기 중·후반에 그림을 곁들인 농서가 줄줄이 나왔고, 중국의 것을 본뜬 경작도까지 선보였다. 따라서 20세기에 들어와서 우리 농기구에 대한 조사를 저들이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뿐 아니라 중국 및 대만 농기구에 관한 보고서도 여러 권 꾸몄다. 그 뒤를 이은 일본의 연구 수준은 말 그대로 하늘 높이 솟았다. 이는 서양의 근대 문화가 일본을 통해 우리와 중국으로 흘러든 과정과 같다. 동아시아의 농경문화를 나무에 견주면 중국은 뿌리, 한국은 둥치, 일본은 가지이다. 중국은 농사 기술에서부터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우리는 적지 않은 것을 일본에 건넸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인 저들은 우리와 중국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농기구 문화의 본고장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바뀐 것이다. 뿌리가 빨아들인 영양이 둥치를 거쳐 가지에 이르고 그 결과 꽃이 피는 원리 그대로이다. 이러한 가운데 1960년대 초중반, 북한 학자들이 쟁기와 호미 따위에 관한 글을 발표하고, 근년에 농기구를 다룬 『조선민속사전』을 선보인 것은 긴 가뭄 끝에 내린 소나기에 견줄 만하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면서 중국의 뿌리가 시들기 시작한 가장 큰 원인은 공산주의 탓이다. 저들이 민속을 모두 미신으로 몰아붙인 탓에, 이제는 운남·사천·귀주성 등지의 소수민족 기억 속에, 그나마 흐릿한 자취로만 남았다. 이러한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해마다 많은 농가와 여러 신사神社에서 농기구를 신체로 삼아 풍년을 비는 제사를 올리고, 가을걷이 뒤에 노고를 위로하는 의례를 치르며, 일반에서는 이를 축제로 즐겨온다. 허수아비에게 위로의 제사를 올리면서, 새해의 풍년을 비는 저들의 풍습을 미신이라고 비웃는 이가 적지 않을 것이다.
---「머리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