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70대 여성 어르신이 다리에 골절이 되어서 깁스를 하고 집에 있다며 왕진 요청을 하셨다. 혼자 사시는 분이라 했다.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밥은 어떻게 드시나, 화장실은 또 어떻게, 그러다 또 넘어지시면 어쩌지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보개면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그분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계셨다. 그 동네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에 가는 대신 그분 집에 모여 같이 밥을 해 먹고 놀기도 하고 계신 것이었다. 아파트에서 볼 수 없는 광경. 마을 공동체가 살아 있으면 건강을 지킬 수 있다!
--- p.16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혼자 신나서 할 때는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지만, 내가 지치면 여태 하던 일은 한순간에 모래성이 되고 마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차에 당시 안성의료협동조합 2대 이사장을 맡고 있던 송창호 이사장이 찾아왔다.
“그렇게 혼자 애쓰지 말고 같이 해요. 의료협동조합 지점을 만들면 어떨까 해요. 이쪽은 아파트 지역이니 주부들이 많이 활동할 수 있게 해 주면 좋겠어요.”
아, 지점. 그 생각은 왜 못했을까.
--- p.29~30
의사가 되면 의사로서의 삶만 살고, 농민이 되면 농민의 입장에 충실하며, 회사원이 되면 회사원으로서의 이로움을 좇으면 된다. 그런데 협동조합을 하면 다양한 삶을 간접 경험할 수 있어 모두에게 이롭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깊은 산에 들어가서 닦는 ‘도’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닦는 ‘도’가 더 좋은 ‘도’가 아니겠냐고 말하곤 한다.
--- p.39~40
그런데 그 일을 겪은 뒤로 나의 내면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내 것을 조금 양보하여 좋은 일을 하는 의사로 살고 싶었던 화려한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조합원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니 말이다. 전에는 자신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 옳지 못한 일에 너그럽지 못했다. ‘지적질 대마왕’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그 일을 겪은 뒤로는 스스로 옳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리 옳지 못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지고 ‘옳고 그름’보다는 사람 자체를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 p.50
두통은 스트레스와도 관련이 많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얘기도 들어 주고 통합적으로 접근해서 치료하려는 의사가 중요하다. 전 국민 주치의 제도(환자의 건강 상태는 물론 가족 관계와 생활 환경 등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할 수 있는 주치의를 두는 제도)를 합리적으로 잘 시행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동네에서 나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관리해 줄 수 있는 의사를 찾아 주치의로 생각하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
그런 역할을 잘 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의료협동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 p.66
의사들은 주로 병과 약에 대해 공부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한 음식과 운동이, 친구가 약이기도 하다.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왕진, 요양보호사, 가정간호사가 필요하다. 장애를 입어 방과 화장실 높은 문턱이 힘겨운 사람에게는 문턱을 낮춰 주는 누군가가 의사 역할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의료협동조합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사가 되어 주자’고 한다.
--- p.68~69
대학병원에 다녀온 환자들은 궁금한 게 있어도 물어볼 수가 없다며 동네의원에 와서 물어본다. 팩트만 몇 가지 전달받았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면 동네의원에서는 그 환자의 여러 가지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주치의가 다시 스토리로 구성해 이야기해 주면 그제서야 이해를 하는 분들이 많다.
영국의 의과대학에서는 의대생들에게 지역 사회에 사는 환자 한 사람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졸업할 때까지 경과를 지켜보도록 한다고 한다. 의사가 팩트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팩트를 가진 사람의 스토리를 읽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질병을 가진 사람의 삶을 중심으로 병을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 p.80
주말 진료실로 쓰던 빈집의 방 안에 약장을 마련하고 후원받은 약품을 두었는데, 당시 마을 청년회 박중만 씨는 이 약들의 이름과 용도를 모조리 기억했다. 이 분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보다 훌륭한 의사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어느 날, 본인의 형을 살려냈다. 경운기 사고로 논두렁에 쓰러져 심장이 멎어 있는 형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심폐소생술을 하고 119를 부른 것이다. 진료 팀에서 했던 건강 강좌 중 심폐소생술 교육이 있었는데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 잘 익혀 두었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박중만 씨의 형 박중기 씨는 2021년 안성의료협동조합의 이사장을 지내고 있다.
--- p.97
“서울에 살았으면 나만 위해 살았을 것이고 아이들에게도 너만 위해 살라고 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집착도 많이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울려 사는 게 제일 잘 사는 것 아닌가. 엄마가 다른 사람들 도우며 사는 모습 보면서 아이들이 배우기를 바랐다.”
--- p.136
사람들이 어찌 여기 있는 사람들 뿐일까.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꿈과 땀방울이 모였지만, 개인적으로 감동을 받았던 분들 중 일부만 적었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다. 권성실이란 사람이 안성, 그것도 우리동네의원에서 의사로 일하며 경험한 일들을 아주 얕게 스케치했을 뿐이다. 같이 의료협동조합을 했어도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고 또 다른 숨결의 책을 내 주면 좋겠다.
돌이켜보면 이도저도 아닌 삶이다. 뜨거운 혁명가의 삶도 아니고, 학문적인 성공을 한 삶도, 사회적인 지위를 얻은 삶도, 그렇다고 경제적인 기반을 다진 것도 아니다. 현실에서는 항상 타협하는 삶을 살았고,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중도에 포기한 일도 허다하다.
하지만 나처럼 부족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했기에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만은 자랑하고 싶다.
--- p.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