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이후, 지난 시간을 떠올릴 때 이따금씩 느껴졌던 가슴의 통증이 사라졌다. 드라마를 보다가 수술 장면만 나와도 온몸이 찌릿하던 아픔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2012년의 가을밤, 하필 그 시간에 그 사람 이야기를, 내 이야기를 보게 된 것일까. 어쩌면 내게 위로가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고통 안에서 우는 것은 비명이었다. 하지만 고통 밖에서 나를 위해 우는 것은 위로였다. 힘든 시간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줄곧 자신을 잃어버린다. 고통에서 탈출하고 싶은 간절함과 좌절이 뒤섞여 내내 비명을 지른다. 그래서 고통 밖에서 고통 안의 나를 바라보는 것은 가장 익숙하면서 가장 낯선 일이 된다.
--- 나드 「고통 밖에서 울다」 중에서
그렇게 남편은 백수가 되었다. “나 같은 마누라가 어딨냐”며 큰소리 땅땅 치면서 호기롭게 남편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사실 막막하다. 남편은 불안한지 재차 “집에 있다고 뭐라 하지 마라.” “육아 전담시키고 바깥으로 나돌지 마라.” 등 몇 번이고 내 대답을 확인한다. 이런 결정이 시댁 어른들에게는 고마운 며느리로, 친정 식구들에게는 불쌍한 딸로 여기는 시선이 느껴져 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남편이 집에서 육아와 살림을 맡으면 안 되나? 화낼 일인가?
--- 정화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봐!”」 중에서
우리 할머니는 요양원에 산다. 이젠 거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녀는 자기 성깔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거주지에 적응하기 위해 어설픈 노력을 한다. 바쁜데 왜 왔냐, 앞으로는 오지 마라, 거짓말도 하고 “그려 그려” 순응의 말들을 연습한다. 마음에 없는 말들 끝에 이내 고맙다, 고맙다 하는 할머니 옆에 나는 딴짓 하다 늦게 도착한 빨간 모자처럼 카스텔라 상자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할머니 목소리가 반가움에 들뜰수록 나의 죄책감은 뱃속을 구물구물 휘젓는다. 앞으론 더 자주 와야겠다 하지만, 그 다짐은 요양원을 벗어나자마자 해야 할 일 리스트의 맨 밑바닥으로 옮겨질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 그레텔 「할머니는 숲에 산다」 중에서
내 나이 삼십대 중반. 나는 요즘 적당히 외롭고 꽤 괜찮은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나는 연애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그러니 연애하지 않는 자에 대한 당신의 섣부른 동정이나 참견은 살포시 넣어두시라.
--- 유자 「연애하지 않을 자유」 중에서
삼시 세끼 꼬박 챙기는 남편에 대한 불만을 랩처럼 쏟아내던 엄마는 밥 잘 챙겨 먹으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뒤 전화를 끊는다. 평생 밥만 하다 인생이 끝난다는 엄마의 얘기가 머릿속에서 진공관이 되어 계속 울린다. 올해 여든인 엄마. 결혼하고 60년간 밥을 차렸으니, 단순하게 계산해도 엄마가 차린 밥상이 65,700번이다. 밥상이 그만큼이니 엄마가 담은 밥그릇은 또 얼마나 될까. 그 많은 밥상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으면서도 여전히 아빠의 반찬 걱정을 하고, 누가 오면 인사가 끝나자마자 부엌으로 향하는 엄마. 엄마의 그 걱정이,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챙겨주고픈 마음이 나이 들어 작고 힘없는 엄마의 노동을 여전히 요구한다.
--- 담화 「엄마의 그 많은 밥은 누가 다 먹었을까」 중에서
그렇게 절망을 견뎌온 10대는 자라서도 PC방에서 절망을 해소한다. 대학교 PC방의 호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취업 시즌과 시험 기간이다. 이때 자리를 찾으려면 두세 군데는 돌아다녀야 한다. 게임이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불쌍한 청춘들이 가득하다. 나도 지난 학기 취업 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매일 한 번씩은 갔다. 자소서와 인적성 검사 준비로 뇌가 굳었을 때 누군가 “고?”라는 단음절만 외쳐도 모두 가방을 쌌다. 도피였지만 동시에 숨구멍이었다. 두뇌 회전이 멈춰도 자소서는 써야 했기에 빠르고 값싼 재충전이 절실했다. 우린 취준생에서 잠깐 화염의 마법사가 되면서 현실을 잊었다. 1시간 동안 게임 속 몬스터들에게 서러움과 외로움을 토해냈다.
--- 김귤 「‘PC방’이라는 피난처」 중에서
그날 난 큰애를 불러 얘기했다. “앞으로 너의 선택 기준에서 엄마는 빼라. 엄마 때문에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망설이는 일은 없길 바란다. 엄마는 네가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여자와 사귀든 무조건 너를 지지할 것이고, 적어도 네 인생에 훼방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나는 아이들에 대한 내 목표도 명확히 정리할 수 있었다.
--- 윤슬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중에서
허은실 시인의 시 ‘야릇’을 읽으며 두 동생과 함께 한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동생은 ‘내 몸에 살림 차린 이’였다. 시인의 시집 제목『나는 잠깐 설웁다』처럼 나는 서러워도 오래 서러울 수 없었다. ‘잠깐’ 서럽고 툭툭 떨쳐내고 닥쳐오는 일상을 살아냈어야 하는 날들이 뭉클하게 떠올랐다. 20대 중반인 내 딸을 보며 저렇게 빛나는 나이인데 내가 그 시절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나, 나도 미처 다 자라지 못한 나이였는데 그토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었구나, 그 시절의 내가 ‘잠깐’ 안쓰러웠다.
--- 바람 「‘서러운 짐이 살아가는 힘’」 중에서
칠십이 넘어서도 표시를 팍팍 내며 번들번들 팽팽한 피부는 여전히 싫다. 과한 것은 경박하다. 이미 링클 프리 맛을 봤으니 아주 끊을 수는 없을 것 같고 드문드문, 천천히 주름질 자유를 누릴 예정이다. 누가 그랬던가. 타고난 미인은 인정하면서 왜 성형미인은 안되냐고. 나는 호박에 줄을 잘 못 그어 수박은 못 됐지만, 그 말에 한 표 던진다. 거울을 보며 점차 원판 주름으로 회귀하는 내 얼굴에 언제쯤 요술을 부리게 할까, 때를 고민 중이다. 의술과 자본이 만나 부활한 청춘의 여신 헤베의 꼬드김은 달콤하고 집요하다.
--- 모그 「망한 성형, 성공한 보톡스」 중에서
고3이지? 작년 따분할 정도로 들은 말이다. 딱히 물음이랄 것도 없다. 이미 내 아이가 고3인 것을 알면 새삼 고3이라는 프레임으로 넌지시 던지는 말 속에 악의 없는 호기심, 동병상련의 염려, 입시 제도의 고단함 등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고3이지? 나는 번번이 다른 프레임으로 바꾸어 대답했다. 열아홉이야. 그 다음 자동적으로 나오는 말은 힘들겠다, 였다. 그들의 애정 어린 관심을 알면서도 나는 고집스레 또 프레임을 바꾼다. 아니, 아이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십 대잖아. 열아홉, 올해가 가는 게 너무 아까워. 고집스런 나의 대꾸를 저들은 입시에서 선전할 가망 없는 엄마의 항변쯤으로 들었을라나? 하지만 정말 나는 그랬다.
--- 둘리 「고3이 아니라 열아홉이다」 중에서
“별을 확대하고, 확대해서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황량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연결해 멀리서 보면 별자리가 빛나게 되죠. 사람은 별이 아니라 별자리라는 말을 왠지 당신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 바우새 「별자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