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웬일이냐, 짱!
활기찬 목소리. 란영은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썽뇽, 오늘 시간 돼?”
- 나야 항상 오브 콜스지.
“너네 집 가자.”
- 우리 집?
“응. 난 너네 집이 편하더라.”
- 오늘은 좀 지저분할 텐데?
“상관없어.”
- 오냐, 알았다.
성룡을 만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란영은 오늘도 성룡의 신세 좀 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잘한 결정임이 분명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은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술 한 잔, 두 잔을 마실수록 어쩐 일인지 분한 생각이 들었다. 비워지는 술병이 늘어 갈수록, 가슴 깊숙이 묻었던 상처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실컷 울어.”
울어도 울어도 멈추지 않는 눈물은 성룡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더욱 섧게 흘러나왔다.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도,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것도 란영을 슬프게 만들었다. 별로 마시지 않았는데 몸도 마음도 흠뻑 취한 것 같았다.
“맘껏 울고 잊어버려…….”
성룡의 체취가 따뜻하게 다가왔다. 성룡의 두 손이 란영의 얼굴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눈물 자국을 지워 버렸다. 흐릿한 시선에 성룡의 얼굴이 커다랗게 잡혔다. 그리고 뭔가 따뜻한 것이 입술을 부드럽게 훑었다.
“뭐, 뭐하는 거야!”
화들짝 놀란 란영이 서둘러 성룡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란영아…….”
“너, 너…….”
란영은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방금 내가 한 게, 그게 뭐지?
란영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떡 일어선 란영의 뒤를 이어 성룡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짱, 방금 그건…….”
서둘러 변명하려 했지만 란영은 그럴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됐어, 이 자식아!”
아주 못된 녀석이야. 여자가 잠시 방심했다고 그런 엉큼한 짓을 하다니.
란영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성룡의 집을 빠져나왔다. 남겨진 성룡은 얼빠진 표정을 짓다가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갔다.
“내가, 미친…… 거야.”
‘하지만 정말 그 순간은 란영이 슬퍼 보였어.’
성룡은 중얼거렸다.
너무 섧게 우는 란영이가 가여워서, 아니 그보다 위로해주고 싶고 슬퍼하는 네 곁에서 오래도록 머물고 싶었어. 내 이런 감정, 잘못된 걸까?
란영이 가고 난 자리에 소주병과 맥주 캔이 뒹굴고 있었다. 성룡은 천천히 란영이 마시고 남긴 맥주 캔에 입을 갖다 댔다. 뜨뜻미지근한 음료가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다시 새로이 캔을 따서 마셔 봤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라면, 나라면 널 슬프게 하지 않아.”
단단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캔을 힘껏 움켜쥔 탓에 맥주가주먹 위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성룡은 축축한 느낌이 들지 않은 듯 눈을 들어 허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생기 없는 란영의 얼굴만이 가득했다. 성룡은 방 안을 휘휘 둘러봤다. 바로 조금 전까지 란영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마치 거짓인 양 집 안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내리눌렀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던 란영. 친구와는 절대로 연애를 하지 않겠다며 고집스럽게 말한 그 순간, 그는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그녀의 곁에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그 다짐은 오랜 세월 동안 지켜져 왔다.
란영이 남자를 사귀면 란영을 향한 마음을 억지로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그 역시 여러 여자를 만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연애 생활은 지극히 짧기만 했다.
란영이 그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눈에서 보이는 한 그는 란영을 제외한 그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온전히 줄 수 없었다.
란영의 사랑이 오래 지속될수록 성룡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지만 지금까지 아무 내색도 할 수 없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그녀의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경민에게 안착한 란영의 모습을 보면서 몇 날 며칠을 아파했지만 이내 그는 란영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 주며 친구의 거리를 유지했고, 바로 얼마 전 약혼한다는 말에 심장 한 곳이 도려져 나가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어둠은 어느새 성룡의 의식을 잠식해버리고 말았다. 창문 밖으로 흘러 들어오는 흐릿한 불빛 아래 성룡은 멍하니 앉아 뒹굴고 있는 맥주 캔들을 바라봤다.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점점 더 머리가 맑아지기만 했다. 축축해진 주먹을 슥슥 손으로 문지르며 성룡은 등을 곧추세웠다.
“이제, 조금 더 다가가도 괜찮겠지? 그렇지, 란영아?”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의지가 새어나왔다. 성룡의 눈동자가 희미한 불빛에 반짝였고 주먹은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힘이 잔뜩 들어간 주먹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가 창문 밖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카만 하늘에 박힌 몇 개의 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