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역사적인 대한민국 광복의 날, 8월 15일이 왔다. 히말라야 원정을 시 도하는 일은 한국 역사상 초유의 장거壯擧로 대내외적으로 커다란 관심사였다. 출발 당일 수많은 사람이 공항에 나와 우리 일행의 장도를 축복해 주었다. 우리는 원정을 성공시키기 위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찼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국가적인 책임감으로 외국 등산가들의 수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실력을 발휘하고자 마음 깊이 다짐했다.
--- p.26 「다울라기리」 중에서
태국과 인도의 찌는 듯한 더위에 비하면, 카트만두의 기온은 너무도 시원해서 우선 숨을 돌릴 것 같았다. 카트만두의 기후는 마치 서울의 9월 중순과 비슷해 저녁이면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8월 28일 오전 10시, 본대는 네팔 외무부를 방문해 나렌드라 빅람샤를 만나 내방 인사를 하고 입산료 잔금을 치렀더니, 통행증을 발부해주었다. ‘이번 대한민국 경희대학교 원정대가 다울라기리 2봉 정찰에 있어서 원정대가 거쳐 가는 마을에서는 이들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라’는 요지의 통행증이었다.
--- p.32 「카트만두」 중에서
9월 4일, 드디어 기나긴 카라반이 시작되었다. 아침 6시, 약속대로 포터들이 모였다. 송대원과 사다는 포터를 한 사람씩 불러 번호표를 나누어주고 일인당 30kg에서 40kg 정도의 짐을 배당했다. 포터는 모두 30명이다. 그중에 노인과 소년도 끼어 있어 무거운 짐은 될수록 젊은 청년에게 맡겼다. 포터들의 차림은 거의 다 해어진 셔츠에 엉덩이만 겨우 가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쿠쿠리를 허리에 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솔로몬 영화에 나오는 무인武人 그대로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맨발이었다.
--- p.49 「카라반」 중에서
베이스캠프에서 쓸 양 다섯 마리를 사들인 후 9월 13일 드디어 유명한 마그디 계곡으로 들어갔다. 우리 일행은 무리 마을 바로 앞에 있는 깊은 계곡을 거쳐 맞은편 산을 넘었다. 이 산과 계곡이 어찌나 험한지,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준령이었다. 보통 경사는 40도에서 60도인데 가도 가도 끝없는 절벽이 연이어 솟아 있어 사면斜面을 내내 트래버스 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을 때 한쪽 눈을 감고 파인더를 들여다봐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럴 수 없어 거리가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대충 찍어야만 했다.
--- p.72 「마그디 계곡Myagdi Khola」 중에서
이곳을 지나 또 한 골짜기를 넘어서 언덕에 올랐다. 여기가 다울라기리 1봉 산기슭, 본대의 베이스캠프(4,600m)였다. 오후 1시 25분, 도착 즉시 포터의 노임을 치르고 수고한 사람에게는 1루피씩 더 주어 떠나보냈다. 비록 포터라 할지라도 열흘 동안 생사를 같이한 그들이라 역시 헤어지기가 섭섭했다. 가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서로 고갯마루에 올라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작별을 서운해했다. 많은 사람이 갑자기 가고 나니 쓸쓸해졌다. 남아 있는 사람은 대원 4명, 셰르파 5명, 연락관 1명 그리고 로컬 포터 2명뿐이었다. 이제부터 우리의 생활이 펼쳐진다. 우리가 한 달이나 있을 곳이므로 캠프지 선택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무를 베어 나르고, 눈사태의 위험도 없는 곳을 찾아 캠프를 쳤다. 셰르파들도 이구동성으로 정말 명당이라고 기뻐했다.
--- p.88 「베이스캠프(B.C)」 중에서
빙하는 갈수록 험하고 눈도 깊어 전진이 지지부진했다. 오후 1시가 되어 겨우 5km 지점까지 나아갔다. 좀 더 동행하고 싶었으나 1캠프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도 있어 점심을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그들이 빙하를 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고글 속에 눈물이 서렸다. 돌아오는 길에 1봉 동쪽 5,400m 지점까지 올라가서 2봉을 정찰했다. 높이는 8,000m급에 뒤떨어지나 산의 개성이나 험준한 점은 결코 자이언트 못지않을 만큼 훌륭해 보였다.
--- p.335 「정찰偵察」 중에서
10월 11일, 마침내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는 등산 장비 외에 각자 2일분의 식량을 휴대했다. 정상에 올라갔다가 2캠프까지 되돌아올 것 같은 기세였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를 고려해 텐트를 가지고 가기로 하고 아침 8시에 2캠프를 나섰다. 간밤의 바람에 거의 사라져버린 발자국을 따라 차츰 고도를 높여갔다. 히말라야 등반에 있어서 빙하를 통과하지 않고 능선이나 정상에 오르기는 어렵다. 빙하에는 크레바스가 있고 그 밖에도 데브리debris와 세락 등 위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차츰 경사가 급해짐에 따라 스텝을 바가지 정도 크기로 파면서 전진했다. 2시간 후에야 비로소 6,200m 지점에 이르렀다.
--- p.117 「도전」 중에서
10월 15일, 베이스캠프를 철수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전에 올라왔던 길을 더듬어 내려가는데 그동안 정글은 변화가 많았다. 어떤 곳은 사태가 나서 길이 허물어지고 또 어떤 곳은 낭떠러지기가 되어 갈 길을 막아놓았다. 약 200m를 새로 길을 만들며 가는데 무려 3시간 이상을 소비해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입산할 때 그렇게도 많던 거머리가 없어진 것이다. 어쩌다가 한두 마리 눈에 띄기는 했으나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도 계절 따라 자취를 감추는 모양이었다.
--- p.137 「귀로」 중에서
천지天地가 창조되던 당시에는 산이 없었다. 유사 이전 혹은 인류의 출현 이전에 해양이 점차로 얕아지면서 두 개의 대륙으로 분리되고, 대자연의 힘의 압박으로 서로 접근하게 되었다. 그래서 해저海底에 가라앉았던 지층地層이 위로 솟아올랐다. 이 지층은 육지와 함께 천천히 습곡을 이루었고, 이후 대산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암장巖漿은 아치형으로 서서히 굳으면서 암석을 변질시켰다. 또한 인도 몬순에서 발생한 폭풍우가 남방산맥南方山脈을 침식해 현재와 같은 복잡한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그중에 가장 높은 그레이트 히말라야Great Himalaya산맥은 북방의 티베트고원을 둘러싸듯 솟아 있다. 20,000피트를 넘는 이 고원에서는 태고 시대 바다에 살던 생물의 화석이 발견된다.
--- p.151 「히말라야 개관」 중에서
오늘날의 등산가들은 그 옛날 조상이나 선배들이 네팔 히말라야에 많은 미개척지를 남겨 놓은 것에 깊은 감사를 표해야 한다. 탐험하지 못한, 지도도 만들지 못한 미지의 땅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직까지도 네팔 히말라야에는 유럽의 지리학자들이 실정을 파악하지 못한 곳이 많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던 전 기간을 통해, 독립국 네팔은 영국의 측량가나 등산가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으며, 영국도 역시 역대 네팔 통치자의 방침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유의하여 왔던 것이다.
--- p.169 「네팔 히말라야」 중에서
정상까지 오르려는 몇 번의 시도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1950년 봄 오스카 휴스턴과 찰스 휴스턴Charles Snead Houston, H.W. 틸먼Harold William Tilman 등이 현지에서 계획한 정찰이고, 둘째는 1951년 몬순 이후에 실시한 에릭 십턴Eric Shipton 일행의 성공적인 정찰이다. 계속해서 1952년 몬순 전후 스위스 원정대의 2회에 걸친 공격과 생리학生理學 등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수집한 초오유의 십턴 원정대가 그 몇 번에 속한다. 그리고 마지막은 존 헌트 원정팀의 성공적인 정찰이 그것이다.
--- p.189 「에베레스트 등정」 중에서
낭가파르바트는 모르는 등산가가 없을 만큼 유명한 산 중 하나이다. 그리고 또 이 산은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산이기도 하다. 낭가파르바트에는 많은 이름이 있다. ‘공포의 산’이라고도 하고 ‘운명 의 산’이라고도 한다. 31명의 인명人命을 삼켜버리고도 아직 저 구름 위에 높이 솟은 거인巨人, 그저 희생을 요구할 뿐 아무것도 주려고 하지 않은 거인, 인간을 마력魔力으로 매혹魅惑해 잡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무자비한 왕국王國과도 같은 존재이다.
--- p.219 「낭가파르바트」 중에서
1957년 겨울, 야마다 지로山田二郞를 중심으로 ‘히말라야 등산 실행위원회’의 첫 모임이 있었다. 회원 대다수는 전후戰後에 졸업한 동문들이었다.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2봉(7,937m)을 등반지로 선정하고 1959년 봄에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같은 해 봄 외화 쿼터가 일본산악회 히말출리 원정대에 배정되면서 부득이 이듬해로 계획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문제도 생겼다. 1959년 외무성을 거쳐 네팔 정부에 입산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영국의 로버츠J.O.M. Roberts 등반대에 먼저 허가된 것이다. 부득이 다른 산을 선택해야 했고, 결국 네팔 중서부 다울라기리 산군 중 빼어난 다울라기리 2봉(7,751m)으로 목표를 변경했다.
--- p.319 「다울라기리 산군의 정찰」 중에서
기원전 500년 전 지금의 네팔 남부 지역에는 작은 왕국들이 생겨났다. 이후 이 지역은 마우리야, 굽타 등 인도 북부에 기반을 둔 왕조의 통치를 오랜 세월 받았다. 8세기 무렵부터 네팔 지역은 티베트인들을 중심으로 네와리 시대가 열렸지만, 11세기 경 인도 찰루키야 왕조의 영향으로 네팔 일대는 20여 개의 크고 작은 왕국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네팔 일대가 다시 통일된 것은 14세기 말 자야스티티Jayasthiti 시대였다. 하지만 1482년 카트만두, 파탄, 박타푸르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고, 세 왕국은 18세기 중반 고르카Gorkha족의 정복 전쟁을 거치며 현재 네팔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 p.349 「네팔의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