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오라기를 채 썬 듯한 가냘프기 짝이 없는 눈먼지 날리는 해변에 혼자 서 있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사람은 없고 텅 빈 백사장엔 뜻밖에 눈이 쌓이고 있었다. 이런 하찮은 눈먼지 따위도 쌓이고 쌓이니까 모래를 덮는구나. 쌓이는 김에 저 잔잔한 바다에도 눈이 쌓였으면 좋겠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2시였나 3시였나. 약속을 정했던 10년 전엔 백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겨우 10년 지났다고 약속 시간을 잊어 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서 있다가 쪼그리고 앉았다가 그냥 철푸덕 주저 앉고는 멍하게 겨울 바다를 바라본다.
---「사랑은 머리 아프고 이별은 가슴 아파」중에서
그녀와 함께 봤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내 인생 영화가 되었다. 영화 자체도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그 영화를 같이 본 날 오던 비,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같이 들어갔던 극장, 극장에서 앉았던 좌석, 영화 끝나고 같이 먹었던 햄버거가 아직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살짝 오래된 영화관에 장마 기간이어서 살짝 습기 먹은 내음이 코에 가득했고, 영화는 사실 나중에 따로 집에서 보면서 내용을 파악했을 정도로 영화는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 신경은 온통 내 오른쪽에 가 있었다. 영화관에서 나는 지금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팝콘과 콜라를 그녀를 위해 샀고, 나는 거의 입에 대지도 못했다. 물론 그녀도 거의 먹지 않았는데 아마 자리가 많이 불편했던 것 같다. 참 신기한 게 음식 남기거나 버리면 죄받는다고 해서 수능 날도 도시락 다 까먹다가 식곤증 때문에 영어 듣기 7문제를 듣지 못했던 내가 그날은 팝콘과 음료가 남았다고 불편해하지 않고 먹지 않은 그녀의 컨디션을 걱정했다.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은 부모님의 가정교육 영향이 컸는데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만든 그녀였다.
---「몽중인」중에서
내가 살고 있는 명진빌라는 아주 낡고 오래된, 열두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빌라인데 내가 이곳에 이사 와서 그나마 인사를 주고받는 주민은 두 분의 어르신이 전부. 직장생활을 하는 관계로 이른 아침 출근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다 보니, 빌라 이웃들을 마주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이웃은 나와 같은 층에 살고 있는 어르신과 내가 이사 왔을 때 주차장 이용 규칙을 알려주신 4층 어르신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계단에서 무언가 진지하게 의논하고 있는 두 분의 어르신과 마주쳤다
---「명진빌라 단톡방」중에서
왠지 쫓겨나지 않을까 싶은 걱정 속에 일신을 다짐했지만 별 수가 없어 보였음에도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려도 산다는 속담을 되뇌었던 것 같다. 그날 갑작스레 현장 출장이 있었다. 지자체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한 A복원 사업장은 지역의 최고 높은 지대의 산 등성 아래로 몇 헥타르 자리 잡은 부지의 현장이었다. 산등성의 임도에 차를 세우고, 의장은 산비탈로 내려갔고, 난 정신없이 의장의 뒤꽁무니를 뒤쫓았다. 전날 비가 왔는지 내리막길에 발끝이 살짝 미끄럽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의장은 휘청거리며 곤두박치기 직전이었다. 나는 순간 무슨 힘이 솟았는지, 엄청난 스피드로 의장의 어깨를 뒤로 잡아채었다. 소싯적 했던 유도를 통해 길러진 악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의장은 다친 곳 한군데 없이 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를 돌아본 의장의 스친 눈빛.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그간 나의 실수가 눈 녹듯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흐릿한 반전의 느낌이랄까. 희미하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진심」중에서
욕심은 끝이 없었고, TV에 나오는 대기업 총수, 미국의 유명한 투자자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일하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그 시간에 코인 매매를 하여 하루 만에 한두 달 치 월급을 버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회사에 출퇴근하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들게 입사했던 대기업을 그만두는 것은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20대를 보내온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 같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휴직을 선택했다. 목 디스크로 인한 휴직이었지만, 충분한 돈이 있었기 때문에 휴직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10억이 사라지게 되면 남는 것」중에서
그러다 내 눈을 의심했다. 오른발과 조금 떨어진 침대 밑 지점에서 검은색의 무언가가 뽈뽈뽈 기어나온 것이다. 스탠드 대신 천장의 형광등을 켜둔 상태였다면 흰 타일 바닥과 너무나 대비되는 그 검은 것에 놀라 날카로운 외마디 비명을 질렀을지 모른다. 허나 다행히 제 위치보다 높은 곳을 비추고 있던 주황빛 스탠드 덕에 때마침 바닥 쪽은 꽤 어두웠고, 그래서 그 검은 것의 등장이 준 충격도 상대적으로 덜했다.
---「한밤의 고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