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요. 인간에게 이미 정해진 본질이나 운명 같은 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비난도 많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운명과 본질을 다 부정한다거나,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 깎아내린다는 비난이었죠. 그러나 그들에게 사르트르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아니다, 존재에 대해서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동, ‘실천’을 통해 자기 자신과 세계를 스스로를 만들어 나가야 하고, 자기 자신과 다른 모든 인간과 세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고. 이렇게 자기 자신과 인류, 그리고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를 던져야 하며, 그것은 오직 인간에게만 허락되었다는 것이 그의 반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는 인간을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중심주의’, 곧 휴머니즘이라는 겁니다.
--- p.44~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르트르가 그를 ‘이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성공과 실수의 대차대조를 따져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체 게바라라는 인간은 의사라는 직업과 엘리트 지식인이 되는 길을 거부하고 혁명가가 되는 길을 선택했고, 불가능해 보이는 쿠바 혁명을 실현함으로써 인간의 선택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혁명을 성공시킨 뒤에도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혁명에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겁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로서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여 자신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주장한 학자였고, 체 게바라의 삶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인간상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p.58
그런데 이 구정공세가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북베트남의 병사들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기습하면서 도시로 들어와 버리면서 문제가 생긴 건데요. 그렇게 도시에서 전투가 벌어지다 보니 공격당하는 도시와 죽어 가는 미군들이 방송국 카메라에 찍혀서 당시의 뉴미디어인 컬러텔레비전으로 미국 전역에 송출이 되어 버립니다. 이게 왜 중요할까요? 아까 말씀드렸듯이 미국은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하면서 미국 내부의 불만을 차단하고 있었는데, 이런 장면들이 방송으로 비춰지니까, 미국 국민들이 알아채 버린 거죠.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진실을 깨달아 버린 겁니다.
--- p.76
오늘날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다채로워진 매체들은 베트남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죠. 각종 인터넷 뉴스매체들과 다양한 유튜브 채널들은 특정 소비자들의 성향에 맞춰 재구성된 정보와 해석, 이미지를 쏟아 내고, 그것들은 다시 SNS를 통해 비슷한 성향을 지닌 그룹들 사이로 퍼져 나가며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강화됩니다. 그것들은 여전히 전쟁의 이미지, 곧 ‘진실’을 생산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중은 이제 그 ‘진실’들 중 일부는 선택하고 일부는 버리고 있는 거죠. 과거에는 매체가 생산한 진실이 단일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단일한 진실. 그래서 사람들을 묶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오늘날 생산된 진실들은 각각의 전쟁의 이미지들이 품은 각각의 수많은 ‘진실들’이고, 그것이 오늘날 매체와 이미지의 언어가 생산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 언어는 이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감정을 다루며 진영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는 거죠.
--- p.108~109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킹과 맬컴 X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 킹은 온건파로 여겨지고요. 그에 비해 피부색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서 자랑스러운 아프리카인임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맬컴은 과격파라고 여겨져요. 그래서 소수자 운동에 있어 기존 사회와의 소통과 통합을 주장하는 ‘온건파’들은 킹을 즐겨 인용하고, 분리와 독립행동을 주장하는 ‘과격파’들은 맬컴 X의 말을 자신들의 근거로 삼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들까지도 이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데요. 대표적인 마블 히어로 영화인 「엑스맨」과 「블랙팬서」 같은 영화에서도 이런 구분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 p.145
여기에 대해서 저는 앞서 말씀드렸던 ‘이기’와 ‘되기’라는 개념을 가지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기’와 ‘되기’는 소수자 운동에서 함께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소수자 운동은 대부분 ‘이기’에 집중하는 것 같아요. 많은 경우 소수자로서의 자신을 정의하고 끊임없이 그 정의와 소수자 정체성을 강화하는 형태로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이런 식의 운동은 중요합니다. 소수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침묵 속에 남겨지기 마련이므로 그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사회의 움직임을, 사회가 멈춰 서지 않고 변화할 것을 추동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거기에만 매몰된다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만을 되풀이해서 똑같이 설명하고 그 기억과 정체성만을 지키려 한다면 이번엔 소수자 자신이 그 안에 갇혀 멈춰 서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다수자의 사회가 변하지 않고 멈춰 있으려고 하는 것처럼.
--- p.167~168
이 글에서 언급된 ‘꼰대’들, 아렌트, 아도르노, 마르쿠제, 하버마스는 모두 젊은 시절 그들의 제자들 못지않게 기성의 세계와 치열하게 맞섰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들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도 과거 자신들이 그러했듯 도전해 오는 제자들과 대결했을지언정 그 모든 일을 무의미한 반복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로부터 세계를 변혁하고자 하는 자들의 태도를 읽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과 시대의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 우리가 포착해야 할 것은 되풀이되는 시대의 시간성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당사자들의 절박함이 지닌 현재성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이, 또 우리가 어떻게 그 절실함을 드러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며, 또 그들과 우리가 어떻게 그 절실함을 공유하고 공동의 문제로 풀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p.2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