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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

: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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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528쪽 | 770g | 153*225*28mm
ISBN13 9788997871582
ISBN10 8997871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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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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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서양문명에 대해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값진 것은 정치적 자유(自由)의 개념이었다고 그는 나중에 회고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주의(自由主義) 사상, 그리고 인민이 자유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뽑는 민주주의(民主主義) 제도를 의미했다. 그 같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개념은 군주제와 신분제밖에 모르던 이승만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그는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조선왕국을 미국, 영국과 같은 근대적인 국가로 바꾸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p.26

박용만과는 달리 이승만은 독립운동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한 외교와 홍보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외교독립론자(外交獨立論者)였다. 한인들은 군사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은 강대국 미국이 일본을 전쟁에서 패배시킬 경우에만 가능하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군사훈련을 하는 한인들이 미국인들에게 ‘테러리스트’로 비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1822년의 중립법이 미국 안에서 사적인 군사훈련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그 법은 미국 안의 소수민족들이 독립자금을 모으는 것도 금지하고 있었다. 설사 한인들이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일본에 대항하게 된다하더라도, 미국과 영국은 일본 편을 들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일본의 도움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 pp.107~108

제네바에서 이승만 개인에게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장차 헌신적인 아내가 될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양을 만난 것이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근처의 인처스도르프에서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중소기업가의 셋째 딸이었다. 그때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프랑스 여행을 마치고 제네바로 와서 빈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이승만이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저녁 식사 때 사람들로 붐비고 있던 호텔 드뤼씨 식당이었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던 이승만이 종업원의 안내로 프란체스카 모녀와 합석하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만나게 된 것이다. 그때 이승만은 58세, 프란체스카는 33세의 나이였다.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지만, 며칠 뒤 프란체스카가 제네바를 떠나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모스크바로 가는 길에 빈에 들르면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고, 서로 결혼을 약속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모스크바에서 추방된 다음에도 빈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 pp.151~152

중국대표 유어만이 이승만을 돕기 위해 나섰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모택동의 공산당과 내전(內戰) 상태였기 때문에 남한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반공(反共)정부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어만은 음력설인 1948년 2월 10일 이승만, 김규, 김규식 세 지도자가 만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김구와 김규식은 끝내 남한만의 선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날 김구는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란 성명서를 발표해 남한만의 선거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메논이 뉴욕으로 출발한 지 이틀이 지난 2월 12일에는 하지 중장도 세 지도자가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려고 했다. 그래서 하지는 세 지도자를 자신의 공관으로 초청했다. 그때까지 하지 중장은 남한만의 선거에 줄곧 반대해 왔지만, 1948년 1월 13일 서울에 온 미 국무부의 앨리슨을 이승만과 함께 만난 다음부터는 태도를 바꾸었던 것이다. 그러나 끝내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은 남한만의 총선거에 동의하지 않았다.
--- pp.290~291

이승만의 경축사는 북한 대표들이 건국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으로 시작했다. 북한이 유엔의 총선거 결의를 따랐다면 통일정부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유감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목표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가 어떤 것임을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개인(個人)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였다. 그러므로 그는 대한민국이 미국 등 선진국들의 ‘권리장전’에서 밝힌 자유(自由)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한 자유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종교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의미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이념과 결합된 자유민주주의였다.
둘째,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자유선거(自由選擧) 제도를 통해 공직자를 선출하게 되는 나라였다. 그 때문에 그는 대한민국 국민이 자기네 나라가 5·10총선거를 통해 세워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같은 자유선거는 소련의 반대로 북한에서는 실시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민주주의를 지향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양반계급만을 위하던 조선왕국과는 다르게 될 것이라고 이승만은 강조했다. 왜냐하면 민주적인 제도들을 통해 평민의 자유가 보호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양반과 상놈, 부자와 빈자, 남자와 여자,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이 꼭 같이 대우받는 평등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은 모든 개인이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가지는 나라, 개인의 신분을 존중하는 나라,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한 나라, 그리고 노동을 우대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pp.323~324

문제는 농지개혁의 방법이었다. 당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좌익들이 주장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 따른 분배였다. 그 방법에는 중도파 정당들과 김구의 한독당도 찬성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농지개혁안은 그들의 것과는 달랐다. 이승만도 경자유전의 원칙에서 부재지주와 대지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유재산을 무상으로 국유화해서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에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의 농지개혁에는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동시에 농민의 직접경작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 p.338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이승만이 우려하던 북한의 남침이 시작되었다. 잘 훈련된 20만의 북한군은 일제히 38선을 넘어 남한을 공격했다. 북한군은 한국군이 갖지 못한 탱크, 중포, 전투기 같은 공격용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처음에 한국정부는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의 시작인지 아니면 항상 있던 국지전의 하나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전면전의 시작이라는 것은 오전 9시나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이승만에게 그날 새벽의 남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린 나치 독일군의 폴란드 기습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폴란드보다 더 비참했다. 왜냐하면 공격 당시 폴란드는 영국, 프랑스와 동맹 관계였지만, 한국은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p.354

이승만은 한미동맹이 앞으로 한국인들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았다. 그 같은 전망은 그가,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은 이 조약으로 누대(累代)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고 말한 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 후 한국인들은 이승만의 예상대로 미국의 군사적 보호막 안에서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과의 분쟁에서도 미국을 중재자로 활용함으로써 한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일이 없게 되었다.
--- p.404

대한민국은 6·25전쟁 직후에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중국대륙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게 되었다. 문명사(文明史)의 측면에서 그것은 아주 드문 결과를 가져 왔다. 대한민국은 중국의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미국의 ‘해양문명권(海洋文明圈)’으로 옮겨 가는 ‘문명의 전환’을 겪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어제의 적국(敵國)인 일본과 같은 해양문명권에 속하게 되는 특이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보조를 맞추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소련,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 자유중국(타이완), 한국 등의 자유주의(自由主義) 국가들을 하나의 지역공동방위체로 통합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한·일동맹의 체결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은 과거의 일본인들의 지배에 대해 나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서도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1949년 1월 대마도 반환을 요구하기도 했다.
--- pp.439~440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도 북한에 흡수되어 중국의 ‘대륙문명권’에 속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남한도 집단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공산주의 체제 밑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해양문명권’에서만 나타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체제는 개인(個人)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자유선거(自由選擧)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유지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밑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그것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고 지켜낸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한국에서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찬성과 반대의 논쟁은 대한민국을 해양문명권에 남게 하려는 세력과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세력 사이의 싸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본질적으로는 문화전쟁(文化戰爭) 또는 문명전쟁의 성격을 띄고 있다. 그것은 이 나라를 어떤 문명권(文明圈)에 두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구한말의 갈등과 같은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승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갈등은 구한말 개화파의 문명개화 전통을 계승한 ‘현대판 개화파’와 그것에 맞서는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대립인 것이다.
--- pp.495~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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