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의 기쁨을 위한 시
시는 태초부터 이어져 왔다. 우리 행성에서 시는 끊임없이 자아를 새롭게 하고 삶을 노래하는 예술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 더러는 흙 속에 묻히고 바람 속으로 날아갔으나, 5천 년 역사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시를 쓰려고 노력했고 많은 작품을 남겼다.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시를 쓰는 전통은 아주 오래되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 경험한 것에 대해서 쓴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시인이라도 그 상상의 근저에는 자신의 경험이나 시대의 경험이 채록되어 있다.
동시대의 사람들은 그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편이다. 시인은 별난 사람이 아니고 그렇게 이기적이지 않다. 시대가 공유하는 경험을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시인은 그 경험을 들추어내서 반추하고 제시할 뿐이다. 영국의 시인 필립 라킨Philip Arthur Larkin은 자신의 ‘경험을 보존하기 위해 시를 썼다’라고 말한 바 있으나, 시인의 시 쓰기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기장이었다. 말하자면 시는 인류의 기억 일부다. 그러므로 시는 순전히 개인적인 것을 초월해서 그 시대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큰 시대의 변화, 진정으로 영감을 주는 것을 만날 때마다, 통찰력과 활력을 발휘해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래서 ‘시인은 인정받지 못한 인류의 입법자’라고 시인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말했다.
권오숙 시인은 ‘뒤늦게 시 농사를 지어 보겠다고’ 나선 늦깎이 시인이다. 권 시인에게는 남들이 느끼지 못한 남다른 시대적 체험이 있는 것일까? 시 농사를 지어 보겠다고 뛰어들긴 했는데 걱정이 많다.
때를 놓쳐버린 곳에
싹이 제대로 틀까
줄기와 뿌리는
서로 엉키지는 않을까
- 「농사」부분
하지만 시인에게는 평생을 간직해 온 ‘감성 계좌’가 있다.
내 감성 계좌에
오래전에 숨겨놓은
몽당연필을 꺼내어
내숭을 떨어볼까
많이 늦었지만
지금 아니면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한 번도 꺼내 쓰지 않았는데
확인해 보면
감성에도
이자가 붙었을 건데
비밀번호가 뭐였더라
- 「감성 계좌」 전문
권 시인은 열쇠를 찾아낸 듯, 비밀번호를 찾아낸 듯 호기롭게 세상의 틈새를 비집고 들여다보며 한 번도 꺼내지 않은 물건들, 골동품들을 찾아낸다. 어눌한 것 같은 「솜씨」이지만 켜켜이 쌓인 물건들뿐만 아니라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숨겨진 곳간까지도 찾아낸다. 「물의 힘」을, 세상의 이치를 새로운 시선으로 깨치고 있다. 그것이 시인만이 지닌 자신만의 경험, 남다른 시대적 체험인 셈이다.
시는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 형식 중 하나다. 아름다운 시는 종종 독자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지속적인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시를 통해 시인은 산문에서는 종종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우리가 시를 읽거나 해석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을 읽는 것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읽는 것이다. 빨리 읽는 것보다 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읽을 때, 우리는 훨씬 더 깊이 있고 훨씬 더 오래 지속되는 이해를 얻게 된다. 그래서 미국 시인 로버트 크리리Robert Creeley는 시를 읽는 것은 “주의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말했다. 사실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배우는 좋은 방법이다.
「감성 계좌」의 비밀번호를 기억해 낸 권오숙 시인은 원금은 남겨두고, 오랫동안 붙은 이자만으로도 넉넉히 살림을 꾸려나갈 여력이 있어 보인다. 권 시인의 시는 생각을 전달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서정적인 단어의 배열로 장면을 묘사하거나, 여백餘白의 미학을 활용해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은 취하고 있다.
시의 기본 구성요소는 연聯라고 불리는 단락이다. 산문에서와는 달리 연은 같은 주제나 생각과 관련된 행(行)의 그룹이다. 권오숙 시인은 단어 사이에 여분餘分의 간격을 두고 행을 만들고 행과 행사에 여백을 만들어내는 행간行間의 미학적 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거기서 모두 성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게 독특한 성취를 이룸으로써 앞날을 기대해도 좋겠다는 느낌을 준다. 가령,
눈감고 누웠는데
알록달록 별 사탕이
머리 위로 쏟아진다
하나둘 수를 놓듯
줄줄이 꿰면
달큼한 시가 되겠다
-「밤1」 부분
캄캄한 밤중
이리저리 뒤척이다
빛나는 별을 외상으로 사고
그 외 푸성귀는
몇 푼어치 안 되어 떨이로 사 들고
파장이 될 때까지 바닥을 휩쓸고 돌아다닌다/「도깨비 시장」부분
더 슬피 울지 않게
비 행간에 프라이펜을 걸쳐
빈대떡이라도 부쳐주자
냄새 맡고 안으로 들어와
마른 눈물 닦을지
하늘은 실컷 울고
땅은 배가 불러야 조용해
나도 비 오면
슬픈지 고픈지
국시 삶아 한 행 두 행 리듬을 타
- 「빗물」 부분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하고 뒤돌아보니
2홉들이 소주 한 병이
소파에서 삐딱하게 누워 잔다
아직 초저녁인데
코를 골던 알코올이
간이 휴게소도 들리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시속 백 킬론지
정식으로 달린다
- 「밤2」 부분
바닥을 짚고 일어나
간신히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거실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안방으로
밤새 접혔던 관절과
근육을 늘려가며
오늘도 외줄타기
무난히 지나갈 수 있으리라
믿으며
중심을 잡아보는
- 「외줄 타기」 전문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 연과 연 사이에서 은은한 여백은 물론 팽팽한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다. 우주에는 우리가 모르는 진공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이나 높다고 한다. 현재까지의 관측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일반적 물질이 4.84%, 암흑물질이 약 25.8%, 암흑에너지가 약 69.2%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시에 대입해보면, 일반물질인 문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84%에 불과하므로 나머지 의미는 단어와 단어 사이, 행간과 행간 사이, 연과 연 사이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이치다.
이런 시각으로 권 시인의 시를 접하면 시에서 여백이 암시하는 모든 것이 흥미롭다. 경험 또는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 고안된 단어의 배열 혹은 언어의 구성이 생경하면서도 강렬한 시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특이한 단어 조합을 즐겨 사용한다. 권 시인 시는 언어의 독창성 때문에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충격을 주고 있다. 거기에는 어떤 암시를 지닌 듯한 문학적 기법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시인이 고도의 기법을 터득했거나, 아니면 시인의 타고난 기질이 아닐까 싶다. 시는 경험이나 감정을 아주 적은 단어로 표현하는 장르이지만 그래서 어렵다. 시는 다양한 경험과 과정 감정을 몇 줄 또는 몇 연의 행간에 표현해야 하는 예술이다. 그래서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해내는 시인들이 있기에 아직도 세상은 살만한 것일 것이다.
17세기 철학자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는 인간의 삶을 ‘고독하고, 가난하고, 추악하고, 잔인하고, 짧다’라고 설파해서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 바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 시인은 우리가 살만한 세상을 위해 시를 쓴다. 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더욱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일으키고 지각을 넓히는 것은 물론 상징적 사고를 개발한다. 시는 감각을 발달시키고 감수성을 정제한다.
어쨌거나 늦깎이 시인은 평범한 일상을 비범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많은 시편에서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아온 연륜과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시를 쓰는 일은 내면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소통의 장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환갑 진갑 다 지난’ 권 시인의 부부애는 남달라 보인다. ‘작년 재작년에도 그랬듯이/올해도 어김없이/김칫소를 넣어주는 남’편이 있고, ‘안방극장에 모로 누워/사과가 먹고 싶다고/화면 보고 말했는데//몇 분 후/머리맡에 우두커니/포크에 꽂힌 사과’가 있다. ‘맛있다’
자식들 다 나가고
식구라곤 달랑 둘
메인을 한가운데 놓고
이것저것 가져다 먹으려니
허접하고
팔도 아프다
찬은 간이 맞는지
밥은 알맞게 잘 지어졌는지
굳이 말은 안 해도
코를 박고 먹는 소리에
미각으로 끄덕끄덕
중간쯤 먹었을까
식탁 모서리 옆
물병 사이로 손짓을 하니
냅킨을 쓱 빼서
말도 하지 않고 건네주는
- 「부부 1」 전문
부부애가 절로 느껴지는 풍경, ‘안 봐도 비디오’다. 시는 시인의 마음을 반영한다. 시를 읽는 재미는 시인이 마음을 잃고 나아가서 예술적 의도를 감지하고 그 어떤 메시지를 읽는 영혼의 일일 것이다. 경험이나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의 시 세계를 접하게 되면 독자는 자신의 곳간이 넉넉해진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침 먹은 후에 약은 먹었는지
약봉지가 있는 쪽으로 가보니
커피 마셨던 컵에 앙금이 그대로 있다
약도 안 먹었다
약과 물을 마시면서 시계를 힐끔 쳐다보니
정오가 다 되어 가는데
지금까지 한 일이 없다
그럼 내 정신은 그동안
어디에 다녀온 건가
- 「부재중」 전문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깜빡깜빡하는데 약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는 참 난감하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을.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넉넉한 아량으로 이 세상을 건너가야 할 일이다. 권 시인의 시에는 음식 패키지 시가 많은 데 그 중 「시 요리」는 절창이다. 권오숙 시인이 감성 계좌」에서 거듭 자금을 인출해서 ‘시 요리’의 대가의 반열에 오르기를 기원한다,
시 요리를 하려면
제목이 좋아야 하는데
아니야
시의 생명은
물
불
간이야
일류 요리사가
특등급 소고기로 국을 끓여도
삼박자가 맞지 않으면
제목이 없지
같은 재료로
며느리는 부엌에서
시어머니는 안방에서
시 요리를 시작한다
안방에선
제목만 보고도
혀끝의 미각으로
입맛을 다시는데
부엌에선
같은 제목을 받아 놓고
안방 전문가의 눈치를 살피며
물불 조절이 서툴러서
애를 먹는다
- 「시 요리」 전문
---「시집해설_ 김용길 시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