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는 우리가 하느님과 더불어 맺고 있는 참된 종교적 관계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계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즉 “우리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루어졌다. 계시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것과 우리를 위한 그분의 존재에 대해 말해 줌으로써,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이 어떤 광물질은 아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해 바위가 되실 것이며, 우리는 그 바위를 믿고 의지할 수 있다. 히브리어로 ‘믿는다’(croire)는 것은 “~에 기댄다”(appui sur)는 것을 의미한다.
---「도입」중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소가 나를 이리로 인도해 주었다: 에큐메니즘과 역사에 대한 연구가 그것이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 연구하고 집필하는 것에 대한 (제한적이지만 현실적인) 관심이 추가되었다. 에큐메니즘과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 이유와 고유한 진리를 갖는 다른 조직들을 알게 해 준다. 스콜라학자들은 확실함이라는 자신들만의 세계 그리고 자신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갖지 않았던 교회 안에 너무 갇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대면해야 하는 경계(境界)들은 구멍이 많지 않은가? 아니면, 우리가 거침없이 세속화된 다원주의적 세상에서 오직 믿음, 사도적 믿음에 대한 고백만 따르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마주하는 경계들은 많은 신학적 전통을 알았고 또 알고 있다. 나는 나의 나약함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나약함을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교회에 의지하려 한다. 하지만 나를 교회의 다양한 요청 가운데 단 하나, 로마의 요청에만 국한시키지 않으며, 단지 그 요소들 가운데 하나, 교부들이나 스콜라학자들의 요소에만 국한하지도 않겠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도적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이 나누는 생생한 친교이기 때문이다.
---「도입」중에서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의 합리성에 대한 해설적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인격적인 의지적 결정에 뒤따르는 것으로, 인간에 관한 그분의 계획을 알려 주고 실현한다. 그분의 말씀은 효과적이다: “그분께서 말씀하시자 이루어졌고 그분께서 명령하시자 생겨났다”(시편 33,4). “난관에서 그들을 구하셨다. 당신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을 낫게 하시고 구렁에서 구해 내셨다”(시편 107,19-20). 그러므로 충실한 이스라엘 사람이 지녔던 자신감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신뢰였다
---「제1장 하느님은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말이 되시다」중에서
코린토인들은 바오로에게 다양한 질문을 제기했다: 결혼에 관한 질문(1코린 7,1), 우상들에게 바친 음식에 관한 질문(1코린 8,14), 그리고 그들이 ‘프네우마티카’(pneumatika, 1코린 12,1)로 부르는 이들에 관한 질문이 그렇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선물들에 관한 자신의 전망, 그 선물들의 역할과 가치, 그리고 그에 대한 올바른 사용에 대해 정확히 설명하는 가운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대답했다. 하느님은 다양한 봉사와 활동 그리고 다양한 선물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다. 이러한 것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주님으로부터, 성령으로부터 유래하므로, 하나의 동일한 유기체, 즉 그리스도의 몸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은총’(charis, 로마 12,6) 사건들이므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선물들을 ‘은사들’(카리스마들)이라고 불렀다.
---「제5장 성령의 자주성?」중에서
영(Esprit)은 성자의 영(Esprit du Fils)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를 하느님의 약속을 실현해 주는 그분의 자녀적인 삶으로 효과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러한 기능적 실재는, 그에 대한 존재와 진리를 정초하기 위해, 존재론적인 실재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규정하지 않았다.
---「제7장 성령, 그리스도의 영, 그리스도 일원론과 필리오퀘」중에서
영(Esprit)은 내면성이며 자유이다. 그분은 우리 “마음에” 선사 되었으며, 우리는 그분을 우리 영혼의 감미롭고 지극히 사랑하는 손님, 즉 “dulcis hospes animae”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분을 창조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소서, 창조주 성령이시여”(Veni, creator Spiritus). 우리는 전례 찬가에서 이러한 내면성과 영성 생활의 전망을 보게 된다. 창조에 관해 익히 알려진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차원을 계시한다: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 둥지의 존재에 정점을 찍는 새의 이미지도 있다. 가톨릭 신학은 창조주이신 성령과 관련된 우주적 주제를 많이 발전시키지 않았다. 위르겐 몰트만(J. Moltmann)은 필자의 작품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의 독어 번역본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거기에는 성령에 대한 우주론적 역할이 부족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제8장 우주에서 성령」중에서
필자는 말씀(Parole)과 숨(Souffle)을 분리해서 말하는 가운데 이분들을 구분해서 다루는 위험을 감수했다. 그러나 그분들은 서로 일치해 있다. 이는 그분들이 같은 일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그 일이란 결정적으로 ‘그리스도의 일’(oeuvre du Christ)을 말한다. 또한 우리는 니코스 니시오티스(Nikos Nissiotis)와 함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께서 육(肉)을 취하시는” 한 그리스도는 성령의 선구자(prcurseur)이시다. 그리고 성령은, 그분이 육체적으로 떠나신 이후 그분의 업적을 구현하는 한,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ire)’이시기도 하다. 이 두 전망은 모두 참되며 표현될 만한 가치가 있다.
---「끝맺으며」중에서
이브 콩가르는 도미니코회 회원으로 셰뉘의 제자이자 마리탱과 질송의 절친한 벗이다. 그는 이들의 도움에 힘입어 성 토마스의 철학적, 신학적 사상을 더욱 더 효과적이자 생기 있게 만들었다. 그는 성 토마스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영적, 종교적, 교회적 필요에 늘 관심을 가졌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위대한 주역이자 입안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그는 계시 헌장, 교의 헌장, 사목 헌장의 본문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이브 콩가르 추기경의 생애, 작품, 사상」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