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 서화사에서 팔렸던 서화 중에서 단연 인기가 많았던 그림은 ‘속화’로, 오늘날 민화라고 부르는 종류였다. 1844년에 쓰인 가사(歌辭) 작품인 「한양가」는 광통교에서 팔려간 속화가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가사에는 형형색색으로 그려진 화려한 닭, 호랑이, 잉어와 봉황 그림이 광통교 서화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풍경과 신선도 혹은 사군자, 산수화가 집안의 벽, 창문, 덧문, 벽장, 대문 등을 치장하는 광경까지 묘사되어 있다. 집의 안팎을 꾸미고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상서로운 그림을 붙이는 유행은 서화 거래량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는 다시 표구 수요의 증가로 이어졌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은 쉽게 해어지지 않도록 배접을 해서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과연 광통교에서 팔렸던 그림들은 어떻게 표구되었을까. 이 그림들을 배접, 표구했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 p.26~27
고금서화관은 김규진 자신의 작품을 위시하여 전국의 유명 작가의 작품을 판매하는, 곧 초보적인 수준의 화랑이었다. 여기에 부수적으로 혼인이나 회갑 잔치, 사교에 필요한 선물에 대한 상담도 했는데, 아마도 가격을 조정하거나 선물 받는 사람의 취향에 어울리는 서화를 추천하였을 것이다. 특히 서화를 구입하려는 사람과 팔기를 원하는 사람, 본인의 작품을 판매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중간 역할도 업종의 하나로 명시해놓았다. 서화를 팔고 싶은 작가라면 스스로의 역량이 잘 드러나는 작품을 고금서화관에 위탁할 것을 요구하는 등 김규진의 사업가다운 포부가 광고 곳곳에 나타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금서화관의 영업 설명 중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표구와 관련된 내용이다. 고금서화관의 설립 목적 자체가 “서화와 표구의 발전”에 있었으며 특히 우수한 표구사를 ‘고빙(雇聘)’하여 빼어난 표구를 제공하겠다는 설명은 이전 시대에는 볼 수 없던 운영 방침이었다. ‘고빙’이란 ‘학식이나 기술이 높은 사람을 청해서 많은 보수를 주고 일을 맡긴다’는 의미이다. 김규진의 이러한 언급에는 여러 대가의 작품을 그에 걸맞은 표구를 통해 격을 높여서 판매하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김규진은 고종의 아들이자 순종의 아우였던 영친왕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당대 최고의 서화가였다.
--- p.70~71
표구점에서 미술품 판매까지 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었을까요?
제가 아주서화사를 열던 1970년, 근처에 현대화랑이 생겼습니다. 화랑은 쉽게 말해서 부유한 손님을 대상으로 고급 미술품을 판매하는 곳이에요. 당시 그런 고급 화랑이 많이 생겼어요. 화랑들이 생기니까 인사동에 가면 그림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서 오가며 그림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늘었습니다. 지금은 인사동길로 알려진 인사동, 관훈동에는 음식점도 많고 술집도 많았어요. 그때는 술 한잔 드시고 점포 앞을 지나가다가 들어와서 “이 그림 얼마예요?” 이렇게 물어보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그래서 얼마라고 하면, 또 “어? 술값보다 싸네. 좋은 그림 하나 주세요.” 이러면서 사가고는 했습니다. 꼭 값비싼 그림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그림을 파니 저도 기분 좋고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 p.141
상업화가라고 부를 수 있는 작가군이 따로 있었나요?
화가의 길이라는 게 참 길고 험난하잖아요. 그걸 이기고 끝까지 그린 사람은 화가가 되지만 그만둔 사람, 절필한 사람은 사라지는 거죠. 인내심도 있어야 하고 경제적 뒷받침도 있어야 됩니다. 미술대학이라도 나온 분들은 중고등학교 교사를 할 수 있어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대학교육과 상관없이 그림에 흥미가 있어서, 재주가 보여서 스승의 화실에서 도제식으로 교육을 받은 분들은 정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서울대, 홍익대, 이화여대 등등 이렇게 미술대학이란 제도가 생겨나고 이 시스템이 견고해질수록 제도교육을 받지 않으면 작가로 인정받기 어려워진 거죠. 그렇다 보니 도제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았던 분들이 대중적인 산수화나 화조화를 많이 그려서 내놓았어요. 또 상업화를 그리는 작가 중에는 생계를 위해서 표구점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도권 교육을 받은 분들은 상업화가와 자신들의 그림을 구분하려 합니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상업화가의 작품이 더 친숙했죠. 일반인이 생각하는 동양화에 대한 인식이나 취향은, 사실은 이런 상업화가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시회를 갈 수 없는 대중은 이런 작품을 접하는 횟수가 훨씬 많으니까요.
--- p.179~180
국전 출품작은 표구에도 정해진 규격 틀이 있었나요?
크기만 제약이 있었습니다. 크기가 ‘액자 포함해서 몇 cm 이하’ 이렇게 제한돼 있으니까 액자를 화려하게 할 수 없었어요. 처음에는 크기 제한이 없었어요. 출품작이 몇 점 안 됐을 때는 넓은 공간에 작품을 가져다놓으면 40호 전지 크기는 작아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40호짜리 넉 장, 다섯 장 이은 것, 그런 것을 작품으로 냈어요. 그러다 너무 커지니 ‘작품 크기는 100호 미만’ 이렇게 정하게 됐죠. 크기 외에는 제약이 없었어요. 작가분들이 와서, 지목식으로 해달라 오당식으로 해달라, 자기 개성대로 요구하면 그대로 하는 거지요.
오당식이니 지목식이니 이런 스타일은 1970년대부터 유행하던 액자 스타일인가요?
원래 액자는 평액자, 목판액자 이런 것밖에 없었어요. 액자가 인기를 끌면서 개성적이고 독특한 액자 형태들도 나타난 겁니다. 예를 들어 지목식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지목 이영찬이라고,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유명한 산수화가가 있었습니다. 이분 작품이 표구된 형태라, 그분의 호를 따서 지목식이라고 했어요. 또 남정식, 오당식 등도 있었습니다. 남정 박노수와 오당 안동숙의 호를 딴 것이지요.
--- p.206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던 표구점-화랑은 이제 대량 생산 시스템을 갖춘 공장, 화랑, 문화재 보존, 그리고 소규모 표구점 등의 영역으로 쪼개져서 각자 운영된다. 현재 표구, 표구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배첩장’, ‘표구공’, ‘표구사’, ‘장황사’, ‘보존과학자’ 등 이들 각각의 이름 속에는 그 용어들이 탄생하고 사용되던 시대의 모습이 녹아 있다. 이처럼 닮은 듯, 서로 다른 얼굴과 성격을 지니고 오늘날 표구는 존재하고 있다.
--- p.267
액자, 병풍, 족자는 모두 작품 배접까지의 작업 과정이 유사하다. 다만 족자의 배접에서는 타솔로 주름을 펴는 과정이 추가된다. 액자와 병풍은 지지체가 있어 평평하게 펴진 채로 유지되지만 족자는 말고 펴는 과정이 반복되는 형태이기에 꺾임 방지를 위하여 종이에 유연성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 유연성 확보를 위하여 점도가 약한 풀을 사용하기 때문에 족자의 모든 배접 과정에는 타솔을 사용하여 접착력을 강화한다. 족자는 지지체 없이 형태가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풀의 사용, 건조방법과 시간, 배접 방법 등의 조건이 합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족자의 상하단이 뒤틀어져 작품이 왜곡되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말고 펴기가 힘들어진다. 때문에 족자는 충분한시간과 기술을 갖고 제작되어야 완성도 높은 형태가 나온다.
--- p.299